78 화
다행히도 둘째 날과 셋째 날의 전투는 첫날처럼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의외의 일들이 벌어진 첫째 날이 었지만,그 경험을 한 덕분이었다.
레인저들과 용병들로 이루어진 루테리아 방어 부대는 큰 어려움 없이 몬스터들을 막아 낼 수 있었다.
다만,이틀 동안은 변수를 막아 내기 위해 준비해 놓은 물량을 쏟 아 내야 했다.
그래서 4일 차가 되자,슬슬 물 량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몬스터 들의 흐름이 끊어지는 시간이 줄 어들었다.
때문에 레인저들과 용병들의 피 로가 극심해졌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서, 5일 차가 되는 날.
마지막으로 보이는 웨이브가 밀 려왔을 때, 루테리아 방어 부대는 대장벽 위까지 몬스터들의 침입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이 떨어졌습니다!"
"화공이 불가능합니다. 기름도 떨어졌습니다."
"낙석용 돌도 부족합니다!"
"북쪽 저12 방어 라인이 위험합니다. 담당하고 있던 용병대가 무너 졌습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안 좋은 소식
에도,검을 집고 선 공작의 표정 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 웨이브가 마지막 웨이브라 는 이야기도 있었긴 했지만,그보 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영주가 불 안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공작 자신이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다른 귀족들로부터 고지식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그였지만,수백 년 동안 루테리아 를 지켜온 일족의 장으로서 그는 추호도 변할 생각이 없었다.
"니콜라스! 부대원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슈비! 너는 귀족들한테 가서 다리몽둥이를 걷어차서라도 숨겨 놓은 무기를 징발해! 사병들용으 로 비축해 놓은 게 남았을 거야!"
"껍,알겠어. 누나,다녀올게." 그리고 그가 움직이지 않아도 성 장한 자식들이 충분히 역할을 해 주었기에,위험한 상황에서도 공 작은 꽤 든든한 기분이었다.
항상 믿음직스러웠기에 병사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 보낸 첫째를 비롯해,조금 제멋대로인 경향이 있지만,할 일은 제대로 하는 막
내.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서 레인저 들을 지휘하는 레이첼.
특히 테스트 삼아 어제부터 지휘 에 나선 레이첼은 공작의 기대 이 상을 해내 주었다.
그녀는 여러 악조건인 상황에서 도 제대로 된 지휘를 해냈다.
공작은 그 모습을 보고는 그녀가 딸이라는 것을 더욱 아쉬워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녀가 동료라고 말하는 자들을 보면 웬만한 기사 이상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도 처음 보는 여성 도적 마나 사용자와 방패 기사로 보이는 소 년.
그리고 앰버가 인증했으나,뭔가 애매한 느낌의 마법사 청년.
실력은 단연코 대단한 마법사였 지만,공작은 그에게서 다른 마법 사들과 다른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그런 가신들과 본인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루테리아 영주가 되기에는 여성이라는 점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뭐,그 일은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겠지.'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는데 미 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는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 렸는데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는 게 더 신경이 쓰였다.
공작은 난전이 벌어진 대장벽 위 에서 시선을 거두어 멀리 흔들거 리는 대수림의 울창한 숲을 노려 보았다.
'그 속에 무엇이 있는 거냐' 숲은 여전히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같은 시각.
공작처럼 대수림을 노려보는 사 람이 있었다.
바로 동료들과 함께 몬스터를 상 대하던 제이크였다.
[마나양이 장난이 아닌데요?]
제이크와 감각을 공유하고 있던 파티마의 경고처럼, 대수림에서 느껴지는 마나양은 무서울 정도였다.
제이크는 이 마나를 전에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제이크에게는 멀리서 다
가오는 그 마나를 관찰할 시간이 없었다.
"마법사님! 아직 멀었어? 빨리 좀 부탁해!"
제이크 주변도 이미 몬스터가 가 득했다.
반쯤 썩은 몬스터들이 몸에 화살 과 창이 박힌 채로 꾸역꾸역 장벽 을 기어 올라와,용병들과 싸우고 있었다.
장벽 아래에서는 사람보다 큰 두 꺼비가 가끔 장벽 위를 향해 혀를 쏘아 보내,사람을 낚아채는 중이 었다.
거기다 다른 몬스터들도 장벽 아 래에 달라붙어 기어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첫날과 둘째 날까지는 제이크와 제시카 루이의 실력 덕분에 다른 곳과 다른 편한 싸움을 했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싸움으로 제이크 파티의 실력을 알게 된 지휘부 가 같이 싸우던 용병들을 다른 곳 으로 배치해 버렸다.
때문에 이들은 다른 곳보다 훨씬 적은 숫자로 장벽을 기어 올라오 는 많은 몬스터를 막아 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제이크를 지키는 진형을 만들어 몬스터를 상대했다.
이미 화살이 다 떨어진 뒤라,제이크는 마나로 만들어진 화살을 쏘아 대다가 위험할 때에 큰 마법 으로 적들을 쓸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제이크를 지 키는 일을 제일로 삼았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마법사를 지 키는 것이 제일인 만큼 진형 자체 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제이크가 쓰는 마법이 다른 마법사들과 다르다는 게 문
제였다.
"마법 갑니다. 모두 대비해요!"
"이번에는 무슨 마법인지 알려 줘야지!"
제이크의 말에 알렌이 급하게 소 리 쳤다.
그그도 그럴 것이,얼마 전에 제이크는 몬스터가 사람에게 친밀함 을 느끼게 하는 현혹 마법을 썼었다.
덕분에 몬스터들이 사람들을 공 격하는 데 주저하게 되어 상대하 기가 편해졌었다.
다만,그 마법은 몬스터들만 걸
리는 마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인간도 몬스터들을 보고 친밀함을 느껴 당혹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마나 사용자들은 어느 정 도 마법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마나를 각성하지 못한 일반 용병 들은 죽을상을 하고는 검을 휘두 를 수밖에 없었다.
"맞아! 저번에는 죽은 동생하고 싸우는 느낌이 들었다니까!"
"그 정도는 다행이지. 난 몬스터 에게 사랑을 느낄 뻔했어!"
계속된 싸움으로 꽤 친해진 덕분
에 용병들 사이에서 악의 없는 불 평이 터져 나왔지만,제이크는 그 불평을 무시하고 마법을 시전했다.
그 동안 살펴본 결과,주변에 있 는 몬스터는 전부 이미 한 번 죽 은 몬스터들이었다.
그것도 제이크가 전에 찾아갔던 분지에 있던 몬스터들임이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던전을 정복한 이후에 튀어나온 것 같아 보여 신경이 쓰 였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움직이는 사
체들을 상대할 마법을 생각해 내 는 게 중요했다.
죽은 사체가 움직이는 이유는 바 로 몬스터 속에 있는 마나를 연료 로 한 마법이 억지로 몬스터를 움 직이고 있는 것.
이미 시전된 마법을 깰 수는 없지만,다른 방법으로 마법을 멈출 수는 있었다.
"몬스터들이 잠시 강해질 거예 요! 조금만 버텨요!"
"뭐?"
"뭔 소리야!"
"마나여,너희의 힘을 밖으로 표
출해라! 네가 갇힌 그곳에서 나와 세상에 너의 모습을 알려라!"
크아아아앙!
캬아아!
제이크의 주문이 끝나자,몬스터 들의 눈이 붉어지더니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그리고 전처럼 흐느적거리는 죽 은 시체의 움직임이 아니라,분노 에 찬 광전사처럼 달려들었다.
"미친!"
"뭔 짓이야! 몬스터들에게 버프 를 주면 어떻게 해!"
"큭! 이건 그냥 버프도 아니고 광전사가 된 것 같은데!"
놀란 용병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 지만,뜻밖에도 용병들은 몬스터 들의 공격을 버텨 낼 수 있었다.
사실 이들 시체 몬스터들과의 싸움이 힘들었던 것은,몬스터들 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웬만해서는 죽지 않았기 때 문이었다.
그래서 방어만 한다면 잠시 막아 내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제시카와 루이는 더 낭패스러운 모습이었다.
다른 용병들과 달리,던전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스켈레톤과 싸 우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이크의 주문이 끝나자, 스켈레톤의 검에서 광채가 줄기줄 기 뿜어져 나왔다.
꼭 검에 마나를 실은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마나 사용 자들과 싸움을 해야 하는 꼴이 되 고 말았다.
"이익! 언제까지 막아 내야 하는 거야? 힘들어 죽겠어!"
모두가 제이크가 다음 마법을 써
주길 바랐지만,그는 다음에 쓸 마법이 없었다.
아니,처음 쓴 마법으로 마법은 끝난 것이었다.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
드디어 제이크가 원했던 상황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어, 얘네 왜 이러냐?"
강해진 힘으로 사람들을 밀어붙 이던 몬스터들의 다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용병을 물려던 반 쯤 뭉개진 몬스터의 머리가 목에 서 굴러 떨어졌다.
루이와 제시카를 공격하던 스켈
레톤도 그대로 허물어져 버렸다. 그리고 잠시 뒤,모든 몬스터들 이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전투가 끝이 났다.
모두의 시선이 제이크에게로 향 하자,그는 어깨를 한 번 으쏙거 리고는 말했다.
"연료를 태워 버렸어요. 버프 계 열을 쓴 덕분에 마법 저항도 별로 없어서 잘 먹혔네요."
그는 몬스터에게 강화 마법을 걸 었던 것이다.
강화 마법은 원래 걸린 주체의 마나를 이용해서 육체를 강하게
하는 것이니만큼 마나 소모가 극 심했다.
몬스터들의 마나는 제이크의 마 법에 모두 소모되었고,덕분에 몬 스터에 걸려 있는 네크로맨서 계 열의 마법이 연료가 없어 가동이 멈춘 것이다.
"에고고,매번 처음 보는 마법만 사용해서 간담이 철렁철렁한다니 까."
"원래 마법사들은 다 그런건 가?"
"그럴 리가! 대충 몇 개만 쓰던 데?"
"네가 마법사를 다 본 것도 아니 잖아!"
"그야 그렇지만."
바닥에 주저앉은 용병들이 떠드 는 것을 들으며,제이크는 슬쩍 공작과 공녀가 있는 곳을 바라보 았다.
다행히 아직 그쪽은 전투 중이라 마법사들이 이곳을 신경 쓰지 못 하고 있었다.
앰버 덕분에 마법사로 등록이 되 었다지만,다른 마법사들이 보는 앞에서 고대 마법을 쓰는 것은 조 금 부담이 되었다.
다행히 계속된 전투로 인해 눈치 를 채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옆에서 제이크의 마법을 계속 구 경한다면,그의 마법이 이 시대의 마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게 분명했다.
[빨리 성장하세요! 하루빨리 제 대로 된 마법사를 세상에 알려야 죠!]
이제는 어느 정도 현실을 깨달았 는지,파티마도 바로 세상에 고대 마법을 알리는 대신에 제이크의 성장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힘으로 눌러 주면 지들이 뭔 소
리를 하겠어요. 후딱 처리하고 마 법이나 공부하자고요.]
대신 고대 마법의 전도사에서 공 부만 강요하는 잔소리꾼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말이다.
"빨리 성 밖의 두꺼비들도 정리 하죠."
"좀 쉬자. 어차피 저 혀들은 숨 어 있으면 안 맞잖아."
제이크의 재촉에 제시카가 투덜 거렸다.
제시카와 루이는 뒤로 피해 있는 상태라 두꺼비 몬스터의 시야에서 벗어난 이 휴식을 조금이라도 더
취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제이크는 억지로 두 사 람을 이끌고 두꺼비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빨리 처리해야 해요. 놈이 다가 오고 있어요."
"놈이라니?"
제시카가 쏘아지는 혀를 막아 내 며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제이크가 마지막 남은 두 꺼비에게 마나 화살을 쏘아 보낸 뒤,멀리 대수림을 가리켰다.
"호수에서 만났던 몬스터 말이에요. 놈이 왔어요."
제이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 개를 돌린 제시카는 멀리 대수림 숲 위로 아름다운 소녀 하나가 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바로 아귀 몬스터의 촉수였다.
"맙소사. 저놈은 물고기잖아! 어 떻게 물 밖에 나온 거야?"
제이크도 같은 의문이 들긴 했지 만,지금은 그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니었다.
우지끈!
대수림의 거대한 나무들이 넘어 지는 소리가 이곳에서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장벽에서 몬스터들과 싸우던 다른 사람들도 대수림을 보고 얼 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아귀의 거대한 몸이 대수림을 뚫 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