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화
아귀 형태의 거대 몬스터.
호수의 왕이자 대수림의 지배자 들 중 하나인 그녀는 낮선 소리에 이끌려 호수를 빠져나왔을 때도, 인간을 죽이라는 지시로 머릿속을
가득 매운 채로 장벽을 향해 달려 갈 때도 한 가지 생각을 잊어버리 지 않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집에서 자신을 다치 게 한 뒤에 천 년 이상 키워 온 자신의 핵 일부를 떼어 간 인간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를 잡기 위해 다리를 만들었고,낮선 소리를 거절하지 않고 물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장벽에 가득 늘어선 인간들을 보자 분노가 폭발해서 장벽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
서 촉수로 마법사를 찾고 있었다.
덕분에 다치기도 하고 숨겨 놓았 던 작은 촉수들도 꺼내야 했지만, 결국 그녀는 그토록 찾던 인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아무래도 주인님을 향해 달려오 는 듯한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제시카와 루이를 따라 달려가던 제이크는 채 도착하기도 전에 자 신을 향해 달려오는 거대한 초롱
아귀를 발견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을 향해 달려오 는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그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주문을 외웠다.
거대한 덩치가 더욱 빠르게 커지 는 모습을 보며 주문을 외우던 제이크는 처음으로 자신이 고대 마 법사라는 것을 후회했다.
지금의 마법사라면 저장된 마법 을 이용해서 금방 시전했을 텐데, 자신은 급한 상황에서도 하나하나 주문을 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 몸은 바람처럼 가벼워지고
내 발은 번개처럼 빨라진다. 마나 는 내 몸을 가속해 나는 번개처럼 빠른 인간이 된다!"
다른 마법사라면 가볍게 가속 마 법을 외치면 되었을 텐데,그는 몇 개나 되는 문장을 외워야 했다.
다행히 아귀 몬스터가 코앞까지 들이닥치기 전에 제이크는 주문을 다 외웠다.
그러고는 곧바로 뒤로 돌아 꽁지 가 빠져라 달리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가속 마법으로 도망치 다니. 아무래도 폼이 안 나요.]
"지금 폼이 중요해? 우선 살아야 할 것 아니야!"
제이크는 마음속으로 말하는 것 도 잊고서 가속 마법을 건 몸으로 정신없이 달렸다.
쿠구구궁!
그리고 뒤이어 제이크가 있던 장 벽에 초롱아귀가 들이닥쳤다.
대각선으로 부딪쳤기에 장벽은 바로 무너지지 않았지만,장벽 위 에 있던 용병들 일부가 장벽 밖으 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거기다 남은 용병들은 장벽 위로 보이는 아귀 몬스터의 모습에 겁
에 질려 다리만 떨 수밖에 없었다.
초롱아귀는 그런 이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멀리 도망치고 있는 제이크를 쫓아 다시 움직였다.
과과과과!
그 여파로 장벽의 일부분이 엉망 으로 쓸려 나가고 말았다.
그렇게 장벽 위를 달리는 인간과 장벽 옆으로 그 인간을 쫓는 거대 한 몬스터의 모습이 잠시 이어졌다.
무척이나 황당하기 그지없는 모
습이었지만,아귀 몬스터의 뒤를 쫓고 있던 공작과 레인저 부대장 들은 그 달리기가 계속 이어지기 를 바랐다.
그들이 조금만 더 달려 나가면 성으로 둘러싸인 루테리아 시를 벗어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은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달리기는 아귀 몬스터가 제이크를 앞지르는 것으로 끝이 났기 때문이었다.
아귀 몬스터는 앞지르자마자 제이크가 달리는 장벽에 붙어 벽을
긁기 시작했다.
제이크는 장벽이 휘청이는 것을 느끼고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냉큼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루테리아 시가 있는 장벽 반대쪽 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안 돼!"
공작이 뒤에서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직후,아귀 몬스터는 모두의 걱 정대로 그대로 장벽을 들이받았다.
쿠앙!
아귀 몬스터가 장벽을 들이받는 소리는 좀 전의 소리보다 훨씬 강 력했다.
장벽이 그 충돌 한 번에 사방으 로 금이 가서 휘청거렸고,다시금 이어진 아귀 몬스터의 충돌에 결 국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운 신음을 흘리며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 에 없었다.
아귀 몬스터는 무너진 장벽을 지 나 루테리아시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곳은 루테리아 시의 남쪽 끝이 었기에,다행히 사람들은 없는 곳 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걱정 어린 눈 빛을 띠었다. 몬스터가 활개를 치 기 시작하면 어디로 들어왔건 의 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제이크도 생각 없이 뛰 어내린 것은 아니었다.
시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따 라잡힐 수밖에 없다면,그나마 피 해가 적은 곳으로 유인할 생각이 었던 것이다.
루테리아 시의 남쪽 끝.
그곳은 바로 대수림으로 향하는 용병들이 지나다니는 용병들의 남 부 대로였다.
과연 대로에는 지나다니는 사람 들이 전혀 없었다.
제이크는 홀로 대로의 중앙을 달 리며 뒤를 향해 중지를 치켜들었다.
크아아아앙!
제이크의 도발에 열이 받은 것일 까.
루테리아 시 안으로 들어선 아귀 몬스터는 다른 곳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곧바로 제이크를 따라 대로
를 달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남부 대로는 몸집이 더 거대해진 아귀 몬스터도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그럼에도 제이크를 추격하는 아 귀 몬스터에 의해 점차 피해가 발 생하기 시작했다.
달리는 아귀 몬스터의 꼬리에 맞 아 거리 옆의 낡은 상점 몇 채가 무너져 내렸다.
거기다 길가에 세워 놓은 가판들 은 아귀 몬스터가 지나가는 여파 만으로도 박살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그런 작은(?) 피해까지 신경 쓸 여력이,제이크에게는 없었다.
아귀 몬스터가 장벽을 무너뜨리 는 동안 겨우 벌려 놓은 거리다.
원하던 곳에 도착하기 전에 아귀 몬스터에게 발목을 잡힐 수는 없었다.
제이크는 정신없이 내달려 결국 성의 남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멈춰! 출입 금지다!"
바깥으로 나가는 성문을 지키던 레인저들이 달려오는 그를 막아섰
다.
"당신들이나 빨리 도망쳐!" 하지만 제이크의 뒤로 보이는 몬 스터의 모습에,그들이 기겁했다.
마나 사용자도 아닌 평범한 경비 병들이 거대한 아귀 몬스터를 막 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재빨리 몸을 돌려 달아나 기 시작했다.
제이크는 경비병들이 사라진 남 문을 통과해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제이크를 따라오던 아귀 몬스터 가 남문과 함께 남쪽 성벽을 무너
뜨리고는 제이크를 따라 시 밖으 로 빠져나갔다.
겨우 무너지는 성벽을 피한 남문 경비병들은 얼이 빠진 채로 남쪽 으로 내달리는 아귀 몬스터를 멍 하니 바라보았다.
같은 시각.
제이크의 저택은 난장판이 된 루테리아 시와는 달리 무척이나 한 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몬스터 웨이브에 저
택에 출퇴근을 하던 사람들은 모 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정문 을 지키던 용병들도 대장벽에 배 치가 되었다.
덕분에 저택에는 힐다 모녀와 몇 마리 말,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 만 남아 있었다.
"너 위험해. 이리 내려와!"
힐다의 딸인 앤이 마당에서 저택 의 지붕을 향해 소리를 쳤다.
저택의 지붕에는 고양이 한 마리 가 앉아 있었다.
며칠 전,집 주위를 돌아다니다 앤에게 발견되어 반 식객으로 저
택에 눌러앉게 된 고양이었다.
생긴 것처럼 무척이나 기품 있게 행동하는 고양이라 힐다도 무척이 나 마음에 들었는지,나중에 주인 님에게 허락을 받으라는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다만,힐다는 고양이를 집 안으 로 들이는 것은 안 된다고 앤에게 주의를 줬다.
제이크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거기 잘못 움직이다 보면 막 찌 릿찌릿한 거 맞아서 떨어진단 말 이야!"
도둑이 들어왔다가 마법에 당해 엉망이 된 것을 본 앤은 고양이가 날렵한 건 알고 있었지만,그래도 걱정이 되어 소리를 쳤다.
하지만,고양이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고양이, 아니,인간 감시대 소속 묘족 소녀 페이샤는 이 건물에 걸 려 있는 마법을 앤 이상으로 잘 알고 있었다.
건물과 담장 곳곳에 걸려 있는 신기한 방범 마법들과 각종 함정 마법들.
이곳에는 기존의 인간 마법사들
의 마법과는 다른,오히려 이종족 의 마법과 가까운 마법들이 걸려 있었다.
다행히도 적대하는 자가 아니면 발동하지 않기에 페이샤는 편안한 기분으로 지붕에 앉아 있을 수 있 었다.
'뭐, 처음에 몰래 집 안으로 들 어가려다가 죽을 뻔했지만…….
다행히 고양이 모습을 했기에 다 행이지,인간 모습이었으면 반쯤 익혀져서 기절했을 게 분명했다.
덕분에 그녀는 절대 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이렇게
저택의 마당과 지붕 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거 그냥 돌아갈까. 아무래도 거대 몬스터의 둥지에 들어온 느 낌인데.'
몬스터를 잡으려면 몬스터 둥지 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저택에 오긴 했지만,곳곳에 설치 된 마법은 그녀를 풀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평범한 마 법사와는 다른 마법 때문에 그녀 가 쉽게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만 들었다.
"오늘은 왜 이리 말을 안 들어? 그동안은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처럼 행동하더니."
앤은 천연덕스럽게 귀를 만지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는 한숨을 내 쉬었다.
사람들이 저택을 모두 떠나 조금 은 겁이 나고 외로웠던 그녀였다.
물론 이 저택은 사람이 지키지 않아도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 었지만,풋풋한 소녀의 감성은 이 성과는 또 다른 면이 있었다.
다행히 멋진 고양이가 나타나 즐 겁게 며칠을 보낼 수 있었는데 오
늘따라 고양이가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고양이 페이샤도 앤의 말을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루테리아 시 쪽에서 뭔가 거대하 고 불길한 기운이 이쪽으로 다가 오는 것을 느끼고는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험을 미리 알아차리는 고양이 족의 오감이었다.
이 오감 덕분에 많은 위기를 헤 쳐 나갈 수 있었던 페이샤였지만, 이번에는 도망치려고 해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그렇게 지붕에 있다가는 주 인님 오면 쥐로 만들어 버릴지도 몰라! 주인님은 무시무시한 마법 사란 말이야!"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앤은 마음껏 마음속의 비밀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뒤쪽에서 뜻밖에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보였 던가?"
"끽:!"
놀란 앤이 뒤를 돌아보자, 무척 이나 지쳐 보이는 젊은 남자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어,주인님!"
그 남자는 루테리아 시에서부터 이곳까지 달려온 제이크였다.
"아,다녀왔어."
빠르게 주문을 외워 한숨을 돌린 제이크가 앤을 향해 빠르게 이야 기했다.
"빨리 집에 들어가서 힐다를 데 리고 서재로 와. 급한 일이니까, 당장 달려!"
"넴!"
엄하게 이야기하는 제이크의 말 에 앤이 급하게 집 안으로 뛰어들
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난 제이크가 지 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붕 위에는 방금 전까지 어딘가 를 바라보던 고양이가 지금은 빤 히 제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죽기 싫으면 나를 따라오 도록. 어차피 표적 마법을 심어 놓았으니 도망갈 생각은 말아."
제이크의 말에 고양이의 몸이 딱 딱하게 굳었다.
'언제 걸린 거지?'
"생각할 시간 없어. 빨리 들어 와!"
하지만,페이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다시금 호통을 치는 제이크의 말 뒤로 멀리 루테리아 시 쪽에서 몬 스터의 괴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아아!
페이샤는 몬스터의 괴성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냉큼 지붕에서 뛰어내려 후다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크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인 지 저택은 아무런 마법도 발동하 지 않았다.
"파티마! 방어 시스템을 가동 해!"
고양이가 저택 안으로 들어간 것 을 확인한 제이크는 멀리 언덕 뒤 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아귀 몬 스터를 보며 명령을 내렸다.
[방어 결계를 가동합니다. 던전 의 방어 시스템을 활성화합니다.]
저택과 담,그리고 저택의 뒷산 까지 흐린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던전 핵과 연결해. 한번 붙어 보자. 던전을 가진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놈에게 알려 주자고!"
[던전 핵과 연결합니다. 마나 공
명이 시작됩니다. 힘껏 서포트하 겠습니다!]
제이크의 손에 들린 완드가 환하 게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제이크의 저택 뒷산에 수많은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랜 과거에 사라진, 살 아 있는 던전의 힘이 세상에 나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