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화
고대 숲을 떠나 평야로 들어섰을 때,제이크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들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까이 오지도 않고 모습도 보였
다 안 보였다 했지만,주변의 마 나를 감지하고 구별할 수 있는 그 였다.
마나를 품은 고양이를 못 알아차 릴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몬스터라고 생각했지 만,마나의 갈무리 방식이 몬스터 와는 전혀 달랐다.
거기다 겉모습이 몬스터처럼 변 형되지도 않아,그는 파티마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때 파티마는 그에게 고대에 동 물로 변할 수 있는 이종족에 대해 알려 주었다.
속칭 고양이족이라고 불리는 종 족으로, 다른 동물들로도 변할 수 있지만 고양이로 변하는 일이 많 아,고양이족이라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했다.
제이크는 파티마의 말을 듣고, 자신을 따라오는 고양이를 그냥 놔두기로 했다.
괜히 접근했다가 달아나기라도 하면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적대적이지 않기 에,나중에 제대로 된 기회가 오 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때문에 자신을 따라오는 고양이 에게 한동안 신경을 쓰지 않고 있 었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영지까지 따 라 들어온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마치 자신의 집인 양 편안하게 있는 모습에 제이크는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괜히 싸움에 휘말리면 곤 란하기에, 일단 고양이를 집 안으 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지금,제이크는 생각했던 대로 고양이가 미리 달아날 곳을 전부 차단했다.
그리고 그 뒤에 고양이와 독대할 수 있게 되었다.
변신을 풀자,고양이였던 그녀의 모습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네 다리가 점점 길어지면서 팔과 다리로 변했고,얼굴은 점점 인간 과 닮아졌다.
온몸에 나 있던 털은 점점 줄어 들었고,머리 위로 머리카락이 자 라났다.
그리고 잠시 뒤.
제이크 앞에 알몸의 소녀 한 명 이 주저앉아 있게 되었다.
"완전히 인간으로 변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네."
제이크가 소녀의 모습을 보고 말 했다.
그의 말처럼 소녀의 귀는 아직 고양의 귀처럼 종긋 솟아 있었고, 엉덩이에는 긴 꼬리가 나 있었다.
그런데 그때,소녀가 가만히 서 있던 제이크를 향해 양손을 펼치 며 재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바람의 칼날!"
그녀의 주력 마법이자 압축된 공
기로 칼날을 만들어 적을 공격하 는 마법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의지와는 달리, 마법이 펼쳐지지가 않았다.
"어째서?"
얼이 빠진 얼굴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는 소녀에게 옷들이 날아 들었다.
제이크가 그녀의 알몸을 감싸 줄 옷들을 마법 배낭에서 꺼내 그녀 에게 던져 준 것이다.
변신 상태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 인간으로 변신했던 페이 샤는 정작 마법이 시전되지 않자,
겁에 질린 얼굴로 제이크를 바라 보았다.
-예상대로였네요. 과거와 마나 사용법이 별로 달라지지 않아 마 법 시전을 모두 막는 데 성공할 수 있었어요.
이미 눈앞의 소녀가 어떤 종족인 지 들었던 제이크가 아무 준비 없 이 그녀가 변신하도록 가만히 놔 둘 리가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마법사의 던전!
다른 마법사에 대한 대비가 없는 게 이상했다.
이미 이 던전에는 제이크 이외의
마법사는 마법사용이 어렵게 하는 마법진이 깔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이크와 같은 고대 마법사나 대마도사급이 아닌 마법 사들이 펼치는 마법은 구현이 되 지 않게 되어 있었다.
"왜 안 되는 거지?"
하지만 고양이족 소녀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소녀는 마법이 펼쳐지지 않자, 당황해 자신의 두 손을 쳐다봤다.
마법 공격이 막힐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마법 자체가 발동이 안 되다니!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먼 옛날 마도 제국의 마법사들 은 악마였단다. 마법으로 하늘에 집을 만들고,사람들을 노예로 삼 았지. 그들은 정말 못 하는 일이 없었단다…….]
페이샤는 그제야 어렸을 때 들은 장로의 말을 떠올리고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이내 제이크를 바라보던 얼굴이 검게 죽어 갔다.
-아직,유전자에 남겨진 공포가 일부 살아 있는 것 같아요. 당장 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 같으 니 신체를 제약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그런 파티마의 음성에 제이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파티마에게 이종족에 대해 들었을 때,제이크는 많은 충격을 받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파티마의 말에
따르면 대수림 너머에 살고 있는 이종족은 고대 마법사들이 마법을 이용해서 인간을 개조해 만든 종 족들이 었다.
각종 마법 실험을 위해,그리고 노예로 쓰기 위해 몬스터와 인간 을 섞고,마법으로 유전자를 변형 해서 만든 일종의 키메라.
이종족은 바로 그런 존재들이었다.
파티마가 잠들기 전에 그들은 마 도 제국의 노예와 실험 재료로써 삶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종족에게는 고대
마법사에 대한 공포가 마치 유전 자처럼 깊게 심어져 있었다.
그런 이종족이 지금은 대수림 너 머에서 몇 개의 왕국을 이루며 살 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는 지금 인간 들의 문화 수준보다도 훨씬 뛰어 났다.
그것은 제이크가 미래에서,대수 림 너머 이종족의 왕국으로 진격 한 황제의 군대들에게서 들은 이 야기 였다.
당시 황제의 군대는 내전과 다른 왕국의 공격으로 본국으로 귀환하
기 전에 이종족 왕국들의 반 이상 을 멸망시켰지만,그들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때문에 제이크는 이종족을 만나 면 물어볼 것이 많았다.
어떻게 이종족들이 마도 제국을 탈출해서 대수림 너머에 정착하게 되었고,마도 제국의 멸망 때 살 아남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대수림 너머에서 멸망의 괴물들이 나타났는지…….
하지만 지금은 우선 겁에 질린 소녀를 안심시켜야 했다.
"그냥 죽이지 않는다고 하면 안
되려나?"
-믿을 리가 없겠죠.
제이크가 말을 꺼내 봤지만,파 티마에게 단칼에 무시당했다.
"그렇다고 옆에 데리고 다니면서 설득하기에는 너무 오래 걸리는 데…… 그냥 놓아줘야 하나?"
제이크의 말에 풀 죽어 있던 고양이 귀가 종긋 올라왔다.
-그럴 수는 없어요. 그녀는 주인 님의 던전을 봤으니까요. 만약 그 녀가 다른 이종족들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녀를 놔줬다가는 수많은 이종족들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커요.
"역시 그렇지? 이대로 놔줄 수는 없겠어. 그럼 어떻게 하지?"
하지만 이내 이어진 제이크의 말 을 듣고,종긋 올라갔던 고양이 귀가 다시금 아래로 쳐져 버렸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그럴 것 같 았기 때문이다.
물론 동료들이 그 사실을 쉽게 믿을 리는 없겠지만,그녀의 보고 가 올라간다면 제일 먼저 그가 고 대 마법사인지 확인부터 하려고 들 게 분명했다.
그리고 사실이라고 판단한 즉시
제국에 있는 그녀의 동료들이 다 시 나타난 고대 마법사를 죽이기 위해 몰려들 것이다.
페이샤는 우울해지는 기분에 몸 을 웅크렸다.
그 모습을 본 제이크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의외로 순진하네. 자기 혼자라고 변명하지도 않고.'
덕분에 다루기가 쉬워 보였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 세상으로 보 낸 스파이치고는 독하지 않은 모 습에 제이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사는 진실을 말하므로 세상 을 변화시키는 존재. 마법사라면 거짓을 말하느니 침묵을 지키겠 죠.
'그래,알았어. 난 맨날 뻥치고 다니는 썩어 빠진 마법사다.'
파티마의 진실이 담긴 돌려 까기 에 제이크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어쨌거나 일을 진행하기는 편하 겠어.'
파티마와 만담을 나눈 제이크는 다시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럼,이제 어쩐다? 우연히 마 법사용 에고 아이템을 얻었다고
봐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제 핑계를 대도 별 차이가 없 을걸요? 어차피 제이크가 마법사 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제이크는 파티마가 소리 내어 말 하는 동안,슬쩍 소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제이크는 파티마와 대화를 하는 동안 일부러 소리를 내서 말하면 서 슬쩍 소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소녀는 다시 제이크의 말에 귀를 종긋 기울이고 있었다.
파티마와 대화를 마치고 크게 한 숨을 내쉰 제이크가 페이샤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이런 상황이니 방법이 없네. 그 렇다고 너를 죽일 수도 없고. 그 러니 우리,마법 계약을 하지 않 겠어?"
제이크의 말에 페이샤가 얼굴을 들었다.
전과 달리 페이샤의 얼굴에는 옅 은 기대감이 솟아 있었다.
"마나를 걸고 서로 계약하는 거야. 네가 나에 대해 다른 이들에 게 비밀로 해 주는 대가로,난 너
를 죽이지 않고 내 주위에서 나를 지켜보게 해 주는 것으로."
제이크의 말에 표정은 변하지 않 았지만, 페이샤의 눈동자는 이리 저리 흔들렸고,그녀의 꼬리가 위 로 말려 까닥였다.
나름 표정을 감추었지만,다른 부분이 저렇게 표시를 내니 제이크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을 수밖 에 없었다.
"정말,죽이지 않는 건가요?"
처음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연 페 이샤의 말에 제이크는 어깨를 으 쏙거렸다.
"죽일 이유가 없어. 방금 들은 것처럼 난 마법사용 에고 아이템 을 얻은 평범한 용병일 뿐이거든. 여기 에고 아이템도 고대 마법 몇 개만 알고 있는 반쪽 에고고."
제이크가 완드를 꺼내 흔들어 보 이자,바로 머릿속에서 파티마가 투덜거렸다.
-음,아무리 회유를 위해서라지 만,저를 비하하는 것은 그리 듣 기 좋지 않은데요.
하지만 제이크는 그녀의 말을 흘 려버리고 페이샤에게 집중했다.
"만약 너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이 던전으로 데려올 게 아니라 집 밖에 그대로 놔뒀을 거야."
만약 집 밖에 그대로 뒀다면 몬 스터와 제이크의 싸움 때,그리고 몬스터의 자폭 때 목숨을 잃었을 게 분명했다.
페이샤가 생각해도 제이크의 말 은 틀린 게 전혀 없었다.
"우선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 보고 그 뒤에 다시 이야기해 보는 게 어때? 왜 나를 감시했는지 모 르겠지만,그게 뭐든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뭔가 결정하는 게 좋 지 않을까?"
부드러운 제이크의 말에 잠시 고 민하는 듯하던 페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스!'
-축하해요. 성공하셨네요.
파티마와 짠 연극이 결국 성공했다.
물론 제이크 말에는 별로 거짓이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그녀와의 계약을 위해 약간의 과장과 연출 은 어쩔 수 없었다.
제이크는 몰래 마법진을 조정해 서 페이샤가 기초적인 마법을 쓸 수 있게 만들었고,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마법 계약을 진행했다.
마법 계약이란,마법사 두 명이 서로 자신의 마나를 걸고 약속을 하는 것.
마법사가 마나를 걸고 맹세를 하 는 것의 파생 마법이었다.
마나를 걸고 하는 맹세처럼 마나 계약은 한쪽이 약속을 어겼을 때 그 어긴 쪽의 마나가 모두 사라지 면서 계약이 파기되는 무시무시한 마법이 었다.
그래서 마법사들도 쉽게 하지 못 했다.
"마나를 걸고,나 페이샤는 마법
사 제이크와 계약합니다. 그의 비 밀을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 고 서로 새로운 합의를 할 때까지 그의 곁에서 지켜볼 것을 맹세합 니다."
"마나를 걸고,나 제이크는 마법 사 페이샤와 계약합니다. 나는 페 이샤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그녀 가 주변에서 지켜보는 것을 보장 합니다."
서로 손바닥을 마주 대고 맹세를 마치자,서로의 마나 일부가 상대 방에게 스며들었다.
제이크의 마나는 페이샤의 서클
한쪽에 자리를 잡았고,페이샤의 마나는 제이크의 단전을 돌다가 슬며시 그의 마나에 섞여 들었다.
-너무 불공정한 계약이에요. 솔 직히 사기라니까요.
제이크도 마음 한구석이 심하게 찔렸지만,자신의 비밀을 지키면 서 이 소녀를 옆에 두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서클이 없어서 안 걸리는 걸 어떻게 하라고? 그냥 혼자 맹세하 라고 했으면 절대 안 들었을 거야.
미안한 마음에 최대한 약속을 지
키리라 다짐을 한 제이크는 우선 그녀를 데리고 지상으로 올라가기 로 했다.
저택이 무너져 버렸으니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다.
"우선 넌 고양이로 다시 변해 있어. 사람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 으니까."
기껏 옷을 입었는데 다시 고양이 로 변하라는 말에 페이샤는 울상 을 지었다.
하지만 제이크의 말이 틀리지 않 았기에,그녀는 다시금 고양이로 변해 힐다와 앤이 있는 숙소로 걸
어 들어갔다.
"너 어디 있었어? 함부로 움직이 면 큰일 나!"
고양이가 들어오자,앤은 반가워 하며 그녀를 껴안았다.
마법으로 그 소리를 확인한 제이크는 지금은 거의 꺼져 가고 있는 던전의 핵이 있는 중앙으로 걸어 갔다.
파티마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 비쳤다.
-이 마석은 더는 핵으로 유지가 힘들 것 같아요.
제이크가 봐도 이번 일로 너무
핵을 혹사했다.
던전도 망가지고,저택도 무너지 고,던전의 핵마저 수명을 다 써 버렸으니 이번 일로 너무 손해가 컸다.
"뭐,공작이나 공녀가 보상을 한 다고 해도 그리 의미는 없겠지."
제이크는 혀를 차고는 마법 주머 니에 손을 넣어 조심스럽게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거라도 구하지 않았으면 억울 해서 잠도 못 잤을 거야."
제이크의 손에는 앞에 떠 있는 던전의 핵과 같은 기운이 풍기는,
하지만 그 핵보다 몇 배는 커다란 마석 하나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