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화
버려진 성.
레이첼 성으로 이름 붙은 낡은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진 요새 형태의 성이었다.
뒤쪽의 높은 언덕과 내성 주위를
원형으로 둘러친 외성.
그리고,그 안에 높게 자리 잡은 영주의 내성.
외성 안에는 아직 여러 개의 건 물이 남아 있었지만,외성 밖에는 버려져서 흔적만 남은 집터만이 흩어져 있었다.
삼천의 히베루니아 군은 마지막 남은 영지민들의 흔적마저 뭉개 버리면서 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 었다.
그리고 그들이 달려오는 반대편 외성 벽 위에 세 여성이 서 있었다.
레이첼 공녀와 앰버,그리고 제시카.
다른 삶에서 수많은 전쟁을 겪어 본 제이크와 달리,처음으로 수천 명의 진격을 보게 된 세 명의 얼 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으아,삼천 명이라는 게 이렇게 엄청나다니……
몰려오는 인간들의 기세는 웨이 브 때 겪은 몬스터들의 공세 이상 이었다.
제시카는 질린 표정으로 투덜거 렸고,앰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 로 공녀를 바라보았다.
"공녀님,우리만으로 괜찮을까요? 제이크 씨만 믿기에는 너무 적이 많은 것 같은데요."
하지만,공녀의 표정에는 긴장 이외에는 다른 표정이 보이지 않 았다.
"그가 하는 일은 믿을 수 있어요. 저는 제이크 씨를 믿어요."
제이크와 바닥없는 협곡을 탈출 하는 동안,공녀는 수많은 싸움과 위기를 겪었다.
그러면서 공녀는 제이크의 말이 라면 무조건 신뢰했고,제이크는 그녀의 신뢰를 어긴 적이 없었다.
"그거야 그렇죠. 계획 없이 음직 이진 않으니까. 문제는 간 떨어지 게 만드는 계획을 종종 잡아서 그 렇지……
하지만 이어진 제시카의 말에 공 녀는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그거야…… 그렇죠."
이번에도 내키지 않는 일을 부탁 하는 바람에 공녀는 난감한 상황 이었다.
레이첼 공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서 보면 번쩍이는 창날처럼 보이겠지만,실제로는 지하 창고
에서 찾아낸 낡은 창들.
창은 성내벽에 기대어 세워 놓 아,사람들이 창을 들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 놓았다.
이렇게 한 것은 제이크의 지시였다.
멀리서야 들키지 않겠지만,성에 접근만 해도 바로 들킬 게 분명했다.
하지만,그를 믿기로 했으니 공 녀는 마음을 굳게 하고 제이크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이윽고 적들이 성벽에 가까이 왔 을 때,에고 검의 목소리가 그녀
의 머릿속에 들려왔다.
-공녀,지금이야.
에고 검은 에고 아이템끼리 메시 지 마법으로 연락된다는 것을 알 게 된 제이크가 통신기 대용으로 써먹고 있었다.
당연히 에고 검은 불만을 가졌다.
그렇지만 그동안 제이크에게 당 한 게 하도 많아서 차마 반항할 엄두도 못 냈다.
공녀는 에고 검의 목소리가 들리 자,성벽 앞으로 나섰다.
성벽 앞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모
습이 점점 변해 갔다.
판금 갑옷은 정갈하지만 아름다 운 드레스로 변했고,질끈 묶은 머리는 단정하게 말아 올려졌다.
공녀는 자신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난간 앞에 서서 달려오는 병사들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그대들은 이 레이첼 루테리아를 죽일 생각인가요? 버림받은 제국 의 황태자비를?"
얼굴이 벌겋게 변해서 내뱉는 공 녀의 말이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으엑? 저게 뭔 소리야?"
신나게 성벽을 향해 달려가던 시 두스 장군은 갑작스러운 여자 목 소리에 그만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겨우 자세를 잡았지만,장군의 말은 돌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장군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이 나 병사들도 매한가지였다.
성 쪽에서 들려온,아름답지만 우수에 찬 여자의 목소리는 병사 들의 전의를 모두 식혀 버렸다.
장군과 마찬가지로,그들도 달리
던 속도를 줄이며 서로 눈치를 보 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돌격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장군은 인상을 찡그리며 병력을 멈춰 세웠다.
[.이 버려진 성에 던져진 마
지막 목숨을 그대들이 원하시는 건가요…….]
병사들이 멈춘 사이에도 성 위에 서 음성이 계속 들려왔다.
큰 목소리가 아님에도 마치 옆에
서 들리는 듯한 음성에 병사들은 모두 어쩔 줄 몰랐다.
담담하게 전하는 공녀의 목소리 는 그들의 마음을 울렸다.
"뭐지? 제국의 전 황태자비는 요 괴나 마녀였던 건가?"
장군은 가슴을 두드리며 의문을 표했다.
병사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에 게도 공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서글프게 들려왔던 것이다.
장군의 질문에 참모가 마법사들 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맞습니다. 마나의 유동 은 있지만,몬스터로 보이지는 않 습니다."
"음성 증폭 마법으로 공녀의 말 을 키운 것뿐입니다."
"그런 건 나도 알아. 문제는 여 자가 하는 말로 어떻게 병력을 멈 춰 세운 거냐는 말이지."
장군은 마법사의 말에 짜증을 냈다.
"아무래도 약점을 제대로 찔러 들어온 것 같습니다. 우리 쪽 병 력이 여자에 약하다는 것을 이용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끙,제국 놈들은 기사도도 버릴 생각인가?"
어느새 다가온 참모의 말에 장군 은 인상을 찡그렸다.
히베루니아 왕국.
군벌이 나라를 다스리는 이 왕국 은 다른 나라와 달리,남자와 여 자의 역할이 분리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과 나라를 가꾸는 여성들과 전장에서 다른 사람과 몬스터와 싸움을 하는 남 자들.
여성이 싸움터로 나오지 못하게
한 그들은 그런 만큼 여성과 싸우 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여자와 싸우는 것은 남자답지 못 한 일이었고,고통받는 여성을 보 호하지 못하는 것은 남자의 명예 를 더럽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제국을 음해하기 위해 쫓 겨난 황태자비 이야기를 널리 퍼 트렸던 까닭에,병사들의 머뭇거 림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예 노렸군. 옷도 드레스 차림 이고. 어라? 좀 전에는 갑옷 아니 었나?"
잠시 의아한 표정이 되었던 장군
은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분명 시간을 끌기 위해서일 거야. 이대 로 이곳에서 미적거리고 있을 수 는 없다. 기사단이 나설 시간이 다! 성문을 열도록!"
장군의 말에 기사단원들이 말에 서 내려 성벽을 향해 달려가기 시 작했다.
모두 마나를 각성한 기사들이었다.
그들도 속으로는 여성과 싸우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마나를 각성한 그들은 병
사들과는 다르게 들리는 음성에도 혼란을 느끼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성벽에 도착한 그들은 바로 성벽을 밟고 위로 치솟기 시 작했다.
성 지하,던전 중앙에 있는 마법 사 실험실에 파티마의 음성이 들 려왔다.
[기사들이 방어 라인 안쪽으로 들어왔습니다.]
[마나 사용자들에게는 현혹 마법 이 잘 안 먹히는 것 같습니다.]
제이크는 파티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예상했던 대로지. 어차피 테 스트에 가까운 거였으니까. 첫 진 격을 막은 것으로 만족해. 그보다 방어를 시작해."
[방어 마법 가동합니다.]
그는 공녀의 의상을 환상 마법으 로 가리고,음성 전달 마법으로
공녀의 음성을 모든 병사에게 들 려 줬다.
그리고 음유 시인으로 변장했던 이종족에게서 몰래 흠쳐 낸 현혹 마법으로 병사들의 심장을 마구 흔들었다.
물론 공녀의 음성에도 그동안의 회한이 서려 있었지만,제이크의 마법이 아니었으면 군대가 멈출 리가 없었다.
다행히 제이크의 마법은 꽤 성공 적이었다.
그 덕에 적의 진격을 막아 낼 수 있었고,기사단과 병사들을 분리
할 수 있었다.
"부끄러운 모양이지만 연기 자체 는 꽤 잘하네."
제이크는 한쪽 화면으로 붉은 얼 굴로 계속 말을 이어 가는 공녀를 보며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 뒤에 그는 중앙에 떠 있는 화 면으로 성벽 위를 내달리는 기사 단을 확인했다.
기사단들은 아직 성벽의 반도 채 뛰어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뛰어오르는 기사단원들의 숫자도 전보다 줄어 있었다.
이미 성벽에 만들어 놓은 마법으
로 인해 기사들의 수가 줄어든 것 이다.
콰지지직!
다시금 화면이 하얗게 변하며 기 사들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십 미터가 넘는 높은 성벽이었지 만,기사들은 자신의 실력을 믿고 있었다.
자그마한 틈만 있어도 저 정도 높이는 충분히 뛰어오를 수 있었 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자신감은 성벽을 밟고 위로 치솟는 순간 바로 사라 져 버리고 말았다.
기사들이 성벽을 밟자 바로 아래 로 미끄러졌다. 그리스 마법 때문 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억지로 올라가자, 이번에는 성벽에서 전격이 쏟아져 나왔다.
콰직! 콰지직.
전기가 너무도 잘 통하는 판금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
일부 기사들은 전격이 방지되는 마법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그렇
지 않은 기사들은 전격에 당해 아 래로 처박히고 말았다.
물론 이 정도 전격에 쓰러질 기 사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높은 데서 떨어진 충격과 떨리는 몸을 가라앉히려면 기사들 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제이크와 일행에게는,그 시간이 황금 같은 기회였다.
제시카가 성벽 위에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앰버는 성벽 아래에 모 인 기사단에게 화염 마법을 퍼부 었다.
그 공격에 놀란 기사들이 급하게
갑옷으로 몸을 가리는 동안,본진 주위의 땅들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땅이 푹 꺼지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일 선두는 방패를 든 루이였 고,그 뒤로는 비밀 통로를 통해 뒷산으로 빠져나간 용병들과 병사 들이었다.
"공격해!"
땅에서 튀어나온 공녀의 병사들 은 들고 있는 쇠뇌와 활을 사용해 서 적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 보냈
다.
사방에서 발사된 백발이 넘는 화 살이 병사들에게 틀어박혔고, 튀 어나왔던 공녀의 병사들은 금방 다른 구멍으로 뛰어들어 모습을 감추었다.
"젠장! 당했다! 굴을 파고 기다 리고 있었어!"
타고 온 말과 얼굴을 가린 팔에 화살에 박힌 시두스 장군은 말의 죽음과 팔의 고통보다 적들에게 놀아났다는 것이 더 화가 났다.
그래서 장군은 분노와 고통을 적
에게 풀기로 했다.
"추격해! 길어 봤자 성안으로 이 어져 있을 거다!"
흥분한 가운데에서도 장군이 내 린 판단은 무척이나 타당했다.
그가 보기에,공녀 쪽도 이 성에 온 지가 그렇게 오래되었을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냥 작은 굴을 만들어 놓고 매복하든가 성에 있던 기존 의 비밀 통로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매복형 굴이면 그 자리에서 잡아 죽여도 되고,비밀 통로를 이용했
으면 성안까지 들어갈 길이 생긴 것뿐이었다.
장군의 말에 외각의 병사들은 공 녀의 부대를 따라 땅속으로 뛰어 들었다.
물론 장군의 생각은 평범한 전쟁 이었으면 옳은 이야기였겠지만, 장군에게는 안타깝게도 이 동굴을 만든 사람이 제이크였다.
"크악! 무너진다!"
"살려 줘!"
땅속으로 들어간 수백 명의 병사 들은 쏟아지는 토사에 묻혀 목숨 을 잃고 말았다.
"젠장,후퇴해! 뒤로 물린다!" 땅이 꺼지는 것을 본 장군은 급 하게 병력을 뒤로 후퇴시켰고,성 앞에 있던 기사단들도 불러들였다.
장군은 군대를 바로 수 킬로미터 이상을 물러나게 한 뒤에 병력을 점검했다.
초전에 땅속에 묻힌 병사만 수 백,그리고 성벽에 달려갔다가 돌 아오지 못한 기사 여러 명.
장군은 어이없는 패전에 허탈해 했고,성벽 위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어느새 갑옷을 입고 있는 레이첼 공녀가 무심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