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화
몬스터들의 괴성이 사방에서 울 려 퍼졌을 때.
버려진 성의 뒷산에는 루이와 용 병,병사들이 숨어 있었다.
적들을 기습하고 신나게 도망친
뒤에 공녀가 성을 탈출하면 후퇴 할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일이 잘못된 거 아냐?"
그런데 공녀 일행이 있을 쪽에서 뜻밖에 소리가 들려오자,숨어 있 던 용병들과 병사들이 서로 바라 보았다.
"아무래도 몬스터들이 다가오는 것 같은데……
"주변에 있는 놈들이 다 달려오 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된 거 지?"
경험이 많은 용병들이 당황해하 며 수군대자,그걸 들은 징집병들
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여기 있다가는 우리도 위험해지 는 것 아닙니까?"
"더 기다려야 합니까?"
병사들을 통솔하던 레인저들은 모두 루이를 바라보았다.
"공녀님을 구출해야 하는 건가?" 니콜라스 부대장이 루이에게 물 었다.
하지만 루이는 성을 바라보느라 그의 말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멀리 성벽 위로 반투명하게 솟아 오른 여성의 상반신.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부르는 듯한
모습이었지만,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듣기 거북한 고음뿐이었다.
그걸 보고 루이는 왜 몬스터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다만,저 몬스터가 왜 지금 성에 있는지는 전혀 짐작되는 바가 없 어 답답했다.
'아,혹시 제이크 님이 벌인 일 인가?'
이런 상황에 그가 아는 한,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마법사는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마법사는 항상 상상을 뛰어넘는 일을 해 왔던 마법사.
'마법사가 하는 일은 이해하려 들지 마라.'
……라는 기사들의 격언을 떠올 린 그는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바로 날려 버렸다.
"우선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법사님이 벌이신 일 인 듯하니까요."
"아, 앰버 님이 하신 일이라고?" 다른 마법사를 떠올린 니콜라스 였지만,루이는 그의 말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나도 제시카 씨나 제이크 님에 게 물들었군.'
루이는 남들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니콜라스와 다른 레인저들이 병 사들과 용병들을 다독이자,소란 스러운 부대 분위기는 곧 정상으 로 돌아왔다.
하지만,그 분위기는 곧 몇 분도 되지 않아 다시 엉망이 되고 말았다.
"몬스터들이 이쪽으로도 온다!"
"방어 대형!"
"제길,미리 도망갔어야 했어!"
수많은 몬스터가 성을 향해 달려 가는 동안,일부 몬스터들이 그들 이 숨어 있는 뒷산을 타고 올라온 것이다.
대형을 이탈해 산으로 올라오고 있는 몬스터는 산양처럼 생긴 몬 스터였다.
물론 평범한 산양보다 두 배는 큰,칼날처럼 날카로운 뿔을 가진 몬스터였기에 상당히 무서워 보였다.
그 몬스터는 나름 험한 산을 마 치 평지처럼 뛰어올랐다.
"젠장,칼날 산양이잖아!"
"저거 막기 힘든데!"
"왜 하필 산양이야!"
용병들이 이를 악물었고,병사들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루이와 니콜라스 부대장도 방패 와 검을 잡고 병사들 앞에 섰다.
그런데 불평도 잠시,곧 그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달려오던 몬스터들이 훌쩍 그들 을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몬스터들이 인간을 무시해?" 놀란 용병들의 목소리가 들려왔 지만,칼날 뿔 산양들은 그대로
성을 향해 껑충껑충 뛰어갔다.
* * *
콰과과과과-
수많은 몬스터들이 버려진 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어미를 잃은 남은 들개 무리들, 그리고 나무 몽둥이를 든 녹색 두 발 몬스터, 머리가 두 개 달린 말.
동물이 변한 마물에서부터 대수 림에서 내려온 몬스터까지,수백 이 넘는 몬스터들이 성을 향해 밀
려 내려오고 있었다.
당연히 그 모습은 성에서도 너무 나 잘 보였다.
아직 성에 들어가지 못한 천여 명의 병사들은 달려오는 몬스터들 을 보고 비명 같은 고함을 질러 댔다.
"몬스터다!"
"몬스터들이 몰려온다!"
"막아!"
"자리를 지켜라!"
병사들이 급히 성 밖으로 방어진 을 펼치자마자 몬스터들이 방어진 을 들이받았다.
쿠앙!
곳곳에서 큰 충돌음과 함께 사람 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병사들의 방어진은 사람들을 대 비하기 위한 것. 당연히 몬스터들 의 돌진을 막기는 무리였다.
순식간에 진형이 붕괴됐고,몬스 터들과 사람과의 난전이 시작되었다.
"진형을 유지해!"
"기사들을 중심으로 뭉쳐라!"
"여러 명이 달라붙으면 막을 수 있어!"
히베루니아도 대수림에 붙어 있
는 나라였다.
몬스터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 는 병사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빠르게 작은 그룹으로 진 형을 재구축해서 각각 몬스터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진형은 안타깝게도, 몬스터를 성안으로 들어가도록 열 어 주는 역할이 되었다.
그룹으로 뭉친 사람들 사이를 뒤 따라온 몬스터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우르르르-
몬스터들은 옆에서 싸우는 인간
들을 무시하고,열린 성문을 통해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성 밖에 있던 병사들은 남은 몬 스터들을 상대하느라 안으로 들어 가는 몬스터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나마 성안에는 기사 대부분이 들어와 있었고,성 입구도 좁아 처음에는 몬스터들을 잘 막아 내 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잠시 뒤 산을 통해 성벽 을 넘어온 칼날 뿔 산양들 때문에 성안에서도 난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어이없게도,그 광경을
한가롭게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급하게 성벽 위로 몸을 피한 공녀와 제이크 일행이 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겨우 성 벽 위로 몸을 피한 그들은 멀리서 달려오는 몬스터를 보고 처음에는 상당히 놀랐다.
하지만 몬스터들이 그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 게만 달려들어서,곧 그들은 싸움 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 * *
"으,이거 괜찮은 거 맞아?"
제시카는 자신 앞에서 고개를 갸 웃거리는 칼날 뿔 산양을 보고 앓 는 소리를 냈다.
성벽을 넘어간 칼날 뿔 산양들 중 하나가 성벽 위에 남았던 것이다.
칼날 뿔 산양은 제시카 앞에 서 서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괜찮을 거예요. 괜히 자극하지 마세요."
뒤에서 제이크가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물론 제시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였지만,가만히 있는 몬스터를 굳이 먼저 건드릴 이유 는 없었다.
"자극할 리가 없잖아! 날 뭐로 보고."
억울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제시카였지만,손에 쥔 단검을 보니 제이크가 말하지 않았으면 덤벼들 었을 게 분명했다.
칼날 뿔 산양은 그렇게 잠시 제시카를 바라보다가,다른 몬스터 들과 똑같이 성안으로 뛰어들어
싸우기 시작했다.
"휴,놀랬다."
제시카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 이에 앰버가 제이크에게 질문했다.
"도대체 몬스터가 왜 몰려든 거 죠?"
제이크가 그 이유를 알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지만,돌아가는 상황 을 보니 질문할 사람은 한 사람밖 에 없었다.
앰버의 예상대로,제이크는 짐작 되는 부분이 있었다.
"저도 확실히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한 가지 이유밖 에 없을 것 같네요."
제이크는 아직도 이상한 괴성을 지르고 있는 반투명한 여성체를 가리켰다.
상반신만 여성이고 하반신은 뱀, 혹은 기둥처럼 보이는 반투명한 여성.
"마석에 에고가 생기고,그 에고 가 마법,혹은 원래 본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휘한 모양입니다. 바로 몬스터를 조정하는 능력 이죠."
원래 아귀 몬스터의 촉수였던 그
녀는 현혹 마법으로 많은 몬스터 를 이끌고 다녔다.
호수에서는 물속에 사는 이면어, 그리고 영지를 공격했을 때는 여 러 종류의 몬스터를…….
-그래도 에고 아이템이 되어 마 석이 박혀 있던 몬스터의 능력을 쓰는 건 처음 보네요.
-설마,복수하거나 그런 건 아니 겠지?
-그러면 주인님 일행만 공격 안 할 리가 없죠. 딱 봐도 주인님에 게 종속된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제 겨우 마법 아이템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제이크였다.
에고 아이템이 어떻게 만들어지 는지 알 리가 없었다.
제이크의 말에 앰버는 눈이 휘둥 그레져서 더 이야기해 달라고 보 챘다.
하지만 그 이상은 제이크도 아는 바가 없었다.
"뭐,어쨌든 우리한테 도움이 되 면 그만이죠."
앰버와 제이크가 이야기를 나누 는 동안 제시카는 난간에 걸터앉 아 신나게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오,잘 싸우는데? 세상에,몬스
터들을 응원하게 되다니. 별일이 야."
그녀의 말에 일행 모두는 모두 쓴웃음을 지었다.
제시카의 말대로,몬스터들은 정 말 잘 싸웠다.
기사들에게 썰려 나가는 몬스터 들도 많았지만,이미 난전으로 돌 입한 상황이라 일반 병사들의 피 해가 엄청났다.
"이럴 때는 정말 난감하네요. 이 성적으로는 두고 보는 게 맞지만, 감성으로는 사람들을 돕고 싶 고……
억눌린 공녀의 말에 앰버가 조언 을 했다.
"그럼,이 기회에 물러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남아 있다가 다시 포위당하면 곤란할 듯한데요."
앰버의 말에 공녀는 제이크를 돌 아보았다.
얼마 전부터 공녀는 일을 결정하 기 전에 제이크의 조언을 듣곤 했다.
마법사로서,또 참모로서 제이크 의 조언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이크도 그녀의 신뢰에 보답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 니다. 곧 적들이 물러날 것 같습 니다."
"응? 어째서? 꽤 잘 싸우고 있잖아?"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공녀는 제이크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듯했다.
"지휘권자가 없군요."
"네,다음 지휘권자가 인계받겠 지만,정식 지휘권자가 아니니 후 퇴를 하겠죠."
공녀와 일대일로 싸운 장군이 아
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치료 포션을 사용했지만,치료 포션은 상처만 치료할 뿐이었다. 피를 늘려 주거나 체력을 회복시 켜 주는 물건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런 싸움터 한가운데에 상처를 입은 장군을 던져두기엔 그의 영향력이 너무 컸다.
"퇴각하라!"
과연 장군을 지키고 있던 부관과 기사단장이 서로 눈을 맞추더니,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의 말에 히베루니아 병사들은 허겁지겁 성문을 빠져나가기 시작
했다.
그리고 성 밖에서 싸우던 병사들 도 빠르게 물러났다.
기사들이 후방에서 몬스터들을 막아 내며 후퇴를 도왔지만,진형 이 무너진 채로 후퇴하는 군대는 다른 군대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는 것을 여실히 증명했다.
물론,이번에는 인간들의 군대가 아니었지만.
좁은 성문으로 빠져나가던 병사 들이 몬스터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성을 빠져나간 후에도 기
다리던 몬스터들에게 수많은 병사 가 죽어 갔다.
히베루니아 군대는 그렇게 엄청 난 손해를 입으면서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히베루니아 군대와 군대를 추격 하는 몬스터들이 떠난 성은 수많 은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선 곳이 되고 말았다.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보게 된 일행은 전쟁의 참혹함에 모두 고
개를 젓고 말았다.
"또 몰려올까요?"
"무리일 겁니다. 병사들이 반 이 상 죽었습니다. 그건 전쟁 수행이 불가능한 수치인 만큼,더 작전을 진행하기는 힘들 겁니다."
제이크의 말에 공녀는 한숨을 내 쉬었다.
"휴,그럼 난 루이와 병사들을 데려올게."
더 보기 힘들었던 제시카는 루이 와 병사들을 데려온다는 핑계로 성 밖으로 뛰어내렸다.
제이크도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
지만,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반 투명한 여성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새 소리를 멈춘 촉수가 그에 게 다가온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앰버는 눈이 둥그 렇게 변해 버렸고 슬픈 표정이었 던 공녀도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얼굴이 되었다.
촉수는 난간을 뚫고 제이크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제이크를 빤히 바라보았다.
"흠,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인
사를 해야 하나?"
이런 경험이 없었던 제이크는 난 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을 수밖 에 없었다.
-제 경험에 비춰 봐서는 아무래 도 이름을 지어 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요?
"이름?"
-자아가 깨어났다고 완전히 에고 아이템이 된 건 아니에요. 주 인이 이름을 붙여 줘야 에고 아이 템으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녀 는 좀 다른 상황이긴 해도,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예요.
"이름이라……
이름이라는 말을 꺼내자 무표정 한 그녀의 얼굴에 슬쩍 표정이 스 쳐 지나갔다.
"이름이 필요하다는 거지?"
-이름을 받고 폭주해 버린 에고 도 있긴 하지만,어쨌거나 이름은 필요해요.
뭔가 겁을 주는 파티마였지만, 제이크는 이름 하나가 생각난 상 황이었다.
제이크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의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