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화
조금은 혼란스러운 시간이 지나 간 뒤,사람들은 평범한 파견 부 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징집병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성 을 보수했고,용병들은 다른 식량
을 구하기 위해 성을 들락거렸다. 레인저들은 만약을 대비해서 멀 리까지 정찰을 나갔지만,물러간 적들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주변에는 토끼 같은 작은 짐승 밖에 없습니다."
적들을 쫓아간 몬스터들도 돌아 오지 않아,성 주변은 지금 고요 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한가한데요?"
오랜만에 갑옷을 벗고 병사들과 함께 성을 보수하던 루이는 제이크를 보고 씩 웃었다.
"하기야,식량 쪽 문제가 없다면 이곳에서 있는 것도 나쁘지 않 지."
겨울이라 몹시 춥긴 했지만,외 성이 바람을 막아 줘서 성안에서 는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아래쪽은 다 끝난 건가요?"
"급한 보수는 전부 끝났고, 이제 는 천천히 만들어 가야지."
전에는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너 무 과하게 마나를 퍼부은 까닭에 뜬금없이 던전 에고가 깨어나기도 했다.
다행히 마석과 던전의 제어가 돌
아왔기에 망정이지,성과 함께 던 전마저 잃어버릴 뻔했다.
"그런데 잠든 에고가 다시 깨어 날 생각을 안 하네."
에고가 잠든 지 일주일이 넘었지 만,던전 중앙에 떠 있는 마석은 평범한 던전 코어 역할만 할 뿐이 었다.
-자아를 가지게 된 뒤에는 자신 의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오랜 시간 잠들게 되어 있어요.
"깨어나면 다시 날뛰는 건 아니 겠죠?"
루이가 조금은 걱정된다는 얼굴
로 물었다.
루이도 아귀 몬스터와 두 번이나 싸웠던 만큼 그를 꺼림칙하게 여 겼다.
"파티마 말로는 깨어난 뒤에는 새로운 성격이 구축되어 전혀 걱 정할 것이 없다던데……
-확실하다니까요. 저를 보시면 아시잖아요. 에고 아이템은 마스 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니까요.
하지만 그동안 파티마가 한 일을 생각하면,그녀의 말을 백 퍼센트 신뢰하긴 어려웠다.
제이크는 어깨를 한 번 으쏙거렸다.
"어쨌거나 제대로 활용만 할 수 있다면 좋은 방어 수단을 하나 더 가지게 되는 거니까."
제이크의 말에 루이가 고개를 끄 덕였다.
그 점에 관해서는 루이도 동의하 는 바였다.
몬스터들을 얼마나 조종할 수 있 을지 모르겠지만,쓰기에 따라서 는 숨겨 놓은 강력한 비밀 무기를 하나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다들 꽤 풀어져서
움직이고 있죠."
그러고 보니 적들이 물러갔다지 만,성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영 지 내에 있는 사람들처럼 긴장이 풀려 있었다.
하지만 제이크도 루이도 그 점에 관해 주의하라고 할 생각이 없었다.
정찰하는 중인 레인저들과 제이크가 펼쳐 놓은 감시망이 동시에 문제가 생기지만 않으면 이 성은 꽤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아직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도 있지."
제이크가 성벽을 보며 말을 하 자,루이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영지 소식도 알 수 없고,이곳 에만 묶여 있으니 저럴 수밖에 없 죠."
성벽 위에는 공녀가 홀로 서서 영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 틈이 날 때 마다 저렇게 성벽에 올라가 루테리아 영지를 바라보곤 했다.
그동안 귀족답지 않게 솔선수범 해서 존경과 함께 사랑도 받았지 만,그만큼 사람들이 걱정하게 되
었다.
"그럼,조금 도와 볼까."
"하하,여기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제이크 님밖에 없죠."
어서 가 보라는 루이에게 손을 흔들어 준 제이크는 공녀가 서 있 는 성벽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있으면 사람들이 걱정합 니다."
뒤에서 들려온 제이크의 말에 공 녀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제가 그걸 미처 생각 못 했 네요.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앰버가 옆에 있다면 알려 줬을
텐데,앰버는 던전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도 걱정이 많이 되죠?"
"네,동생이 영지를 잘 다스릴지 모르겠네요. 거기다 오빠가 소식 을 들으면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제이크는 생각과 다른 대답에 다 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도 많이 다치셨다는
데……
"걱정이 되긴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거라 생 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요."
하지만,말과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받아 온 교육 때문인가. 아니면 성격 탓인가.'
겉으로는 제대로 된 귀족의 모습 을 하고 있었지만,아직 젊은 나 이였다.
물론,제이크가 더 어린 나이였 지만.
-그 속에는 늙은 너구리 하나가 들어 있죠.
가끔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 은 파티마의 말에 헛웃음을 짧게
지은 제이크가 공녀를 슬쩍 쳐다 봤다.
"걱정되시면 슬쩍 한번 가 보시 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이크의 말에 공녀는 고개를 저 었다.
"전에도 말했지만,내전을 벌일 생각이 아니라면 영주 대리의 지 시를 따라야 해요."
공녀는 성 안쪽에 흩어져 있는 지원병들과 용병들을 바라봤다.
"더구나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동생 쪽 사람들도 있을 테고요. 무사히 다녀왔다고 해도 나중에
이 건을 문제로 삼을 게 분명해요."
확실히 그녀 말대로였다. 제이크 도 그녀를 싸우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럼,이곳 사람들도 모르게 다 녀오면 되잖습니까? 어차피 저도 다녀와야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네? 그게 가능해요"
놀란 공녀의 물음에 그는 다시 한번 완드를 꺼내 들고 인사를 했다.
"전 마법사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앰버는 처음으로 제이크에게 투덜거렸다.
공녀가 몰래 영지를 다녀오는 것 은 앰버도 동의했다.
그렇지만 그 뒤에 이어진 제이크 의 계획을 들은 그녀는 제이크를 한껏 노려봤다.
"아니,마법사라고 멋지게 소개 했다면서요! 근데 왜 일은 전부 내 차지가 되었죠?"
앰버는 지금 거울 앞에서 분장하
고 있었다.
"그거야 앰버 님이 딱 맞는 적임 자이시고,공녀님을 위해서라면 분명 승낙하시리라고 생각했으니 까요."
"세상에,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 용하고 착실한 젊은 청년으로 생 각했는데…… 본성은 전혀 달랐 군요!"
"제 마법으로 다른 사람으로 보 이게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 지만,특정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어려워요."
그가 말하는 마법은 얼마 전에
본 아인종의 현혹술을 분석해서 만든 일종의 환상 마법이었다.
"하지만 앰버 님의 분장 실력과 연기력이면 충분히 공녀님 역할이 가능하실 겁니다."
오랜 시간 공녀와 보낸 앰버였다. 그녀의 연기력이라면 공녀가 없는 동안 대역이 되기 충분했다.
"그런데 정말 분장 실력이 대단 하네요. 마법이 필요없을 정도인 데요?"
어느새 분장을 끝낸 앰버는 제이크가 보기에는 공녀와 별로 다르 지 않았다.
더구나 이리저리 공녀 연기를 하 는 모습은 몇 개월간 공녀랑 같이 다닌 제이크가 보기에도 구별하기 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앰버는 불안한지 계속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기사가 아니라 다른 기 사들이 보면 바로 알아차릴 게 분 명해요. 마나도 다르고 기사 특유 의 기세도 없으니……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마 저 공녀와 크게 차이 나지 않아, 제이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제가 마법으로 감출 수 있
습니다."
이내 감정을 수습한 제이크가 자 신 있게 말하자,앰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정말 공녀와 똑같아 제이크는 내심 또 한 번 놀랐다.
제이크는 분장을 마친 앰버에게 브러치를 건네주었다.
던전에서 구한 마법 아이템으로, 제이크가 환상 마법 전용으로 개 조한 것이다.
"던전의 마나로 구동되는 방식입 니다. 이 성안이나 가까운 곳에서
는 마나를 불어넣지 않아도 계속 유지될 겁니다. 필요하다면 앰버 님의 마나를 사용해도 되지만 마 나 소모가 심할 것이니 자제하심 이 좋을 거예요."
앰버는 마석이 보석처럼 박혀 있 는 브러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 았다.
"남자한테는 처음 받아 보는 것 이네요. 이런 상황에 받는 게 좀 아쉽지만,기분은 나쁘지 않네요."
"대여입니다. 끝나면 돌려받을 겁니다."
단호한 제이크의 말에 앰버가 툴
툴거렸다.
"괜히 친해진 것 같아요. 당신은 얼굴과 달리 매너가 부족해요."
하지만,매너를 찾기에는 마법 아이템은 너무 값어치가 큰 물건 이었다.
물론,앰버도 농담으로 하는 말 이었다.
그녀도 마법사였다.
잘못하다가는 실험용으로 날아가 버릴지도 몰랐다.
곧이어 브러치의 마법이 시전됐 고,두 사람은 방 옆에 붙어 있는 응접실에 들어갔다.
"맙소사!"
"세상에!"
응접실에 있던 네 사람,공녀와 제시카,그리고 루이와 니콜라스 부대장은 응접실에 들어온 앰버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은 공녀와 앰버를 번갈아 보 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똑같아. 정말 어느 쪽이 진짜인 지 모르겠어."
"모습이 같은 것도 신기하지만, 기사의 기세나 마나도 느껴지는데요? 이게 가능한 겁니까?"
겉모습에 놀란 제시카와 달리, 니콜라스는 그의 감각에 느끼지는 마나에 더 놀란 눈치였다.
알고 보니 니콜라스 레인저 부대 장도 공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그는 원래부터 공녀와 앰버와 친 하게 지내던 인물이었다. 공녀와 함께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온 것 도 같은 이유였다.
공녀도 그동안 놀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앰버가 변장 을 잘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가능할 줄은 예상하 지 못했어요."
공녀도 무척 놀란 모양이었다.
제이크의 말을 들었을 때도 반신 반의했지만,지금 앰버의 모습을 보니 마치 거울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괜찮겠어? 내 흉내 내는 거 무척 힘들 텐데. 힘들면 안 해 도 돼. 제이크만 다녀와도 되는 데."
"괜찮아요. 잠깐씩 얼굴을 비출 뿐인데요. 일은 니콜라스 레인저 님과 루이와 제시카가 해 줄 거예
요."
공녀를 안심시킨 후에 그들은 곧 세세한 계획을 짰다.
그들은 제이크와 앰버가 지하에 있는 마법 실험실에서 연구한다는 핑계를 대기로 말을 맞췄다.
마법사는 원래 몇 주에서 몇 개 월까지 실험실에 처박히기도 하는 인간들이었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럼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그 동안 부탁드리겠습니다."
공녀의 인사를 끝으로,두 사람
은 출발 준비를 모두 마쳤다.
제이크와 공녀,두 사람은 성 지 하에 만들어져 있던 비밀 통로를 통해 몰래 성을 빠져나왔다.
공녀는 성 뒤쪽에 있는 산의 중 턱에 서서 성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렇게 나만 빠져나와도 될까 모르겠네요."
"방어 시스템이 다시 구축됐으니 그리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앰버 님에게도 가동 방법은 알려 드렸 고,솔직히 성만 지킨다면 몇 개 월은 충분히 버팁니다."
물론 얼마 전처럼 수천 명이 밀 어닥치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물러난 병력이 이 겨울에 다시 공 격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공녀를 안심시킨 제이크 는 자신들의 옷을 새삼스레 훑어 봤다.
공녀는 전신을 낡은 판금 갑옷으 로 둘러싼 방랑 기사처럼 보였고, 제이크는 긴 로브를 입고 한 손에 는 마법 지팡이를 든 전형적인 마 법사 모습이었다.
"그럼 갈까요?"
"그런데,이 겨울에 영지까지 가
기 쉽지 않을 텐데. 눈도 꽤 쌓였고."
공녀의 말에 제이크가 지팡이를 들지 않은 손을 가슴에 얹고 공녀 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마법사 제이크가 책임지 겠습니다."
얼마 전에 들었던 말과 비슷한 말을 들은 공녀는 떨떠름한 표정 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공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하하,눈썰매 어떻습니까? 이 정도 속도면 금방 도착할 겁니
다."
"너무 빠른 것 같아요!"
"아,충분한 가속이 없으면 눈에 파묻혀서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꼭 붙잡으세요. 예상보다 길이 험 하네요!"
제이크와 공녀는 뗏목처럼 생긴, 돛이 달린 눈썰매에 탄 채로 눈길 을 달렸다.
제이크가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 켜 눈썰매를 달리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험한 길을 말보다 빠르게 달리는 바람에 공녀는 겁에 질릴 정도였다.
"앞에 나무! 부딪칠 것 같아요!"
"괜찮아요! 아귀 몬스터가 사는 호수에서도 무사히 빠져나온 뗏목 이에요! 제이크 2호! 드리프트 다!"
"꺄악!"
처음 듣는 공녀의 비명을 뒤로 한 채로,개조된 뗏목 제이크 2호 는 엄청난 속도로 눈길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