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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 서기관의 회귀-97화 (97/222)

97 화

얼마 전,아귀 몬스터에 의해 반 파된 루테리아의 서쪽 성문은 아 직도 수리 중이었다.

수리하기 위한 나무 구조물들이 성벽 옆에 얼기설기 붙어 있는 가

운데,많은 사람이 성 앞에 줄을 선 채로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줄 끝에는 판금 갑옷 을 투구까지 둘러쓴 기사처럼 보 이는 사람과 로브를 입고 긴 지팡 이를 든 마법사가 추가되었다.

새로 나타난 두 사람은 제이크와 레이첼 공녀였다.

대수림과 루테리아 영지의 경계 로 눈썰매를 타고 빠르게 넘어온 두 사람은 대장벽이 보일 때쯤 다 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걸어서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이렇게 추운데 줄이 왜 이리 길

죠?"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약속한 대 로,공녀는 말없이 긴 줄을 노려 보기만 했다.

대신 같이 온 제이크가 앞 사람 에게 물어보았다.

두 사람 앞에 줄을 서고 있던 행 상은 들려온 질문에 짜증 나는 얼 굴로 돌아보았다.

그러다 두 사람의 복장을 보고는 긴장한 듯 표정이 바뀌며 성실하 게 대답했다.

"아,얼마 전에 남쪽 왕국 병사 들이 쳐들어와서 영주님이 크게

다치신 모양입니다. 그때부터 검 문이 강화돼서,안으로 들어가려 면 보통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닙니다."

파랗게 언 얼굴로 겨우겨우 이야 기하는 모습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볍게 마법을 시전했다.

"공기여 움직여라. 진동해라."

작게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 의 공기가 빠르게 따듯해지기 시 작했다.

-아무튼,주인님 마법 쓰는 방법 은 이상해요. 공기의 주파수에 맞

춰 진동을 시켜서 따뜻하게 한다 니,한 번도 보지 못한 방법이라 니까요.

제이크야 전생에 전자레인지를 쓸 때마다 봤으니 익숙했지만,이 세상 사람들이 그런 방법을 알 리 가 없었다.

-뭐,마나 소모가 훨씬 줄어들었 으니 좋기만 하잖아.

-그야…… 그렇지만요.

제이크가 파티마와 잠깐 이야기 를 나누는 동안,근처에 있던 사 람들은 모두 따뜻해진 공기에 놀 라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아,감사합니다. 대단한 마법사 님이신가 보네요."

처음 대답을 했던 행상도 제이크 의 마법에 놀란 모양이었다.

"이야기하기 편하도록 조금 힘을 썼습니다."

제이크의 말에서 좀 더 이야기를 꺼내 놓으라는 뜻을 알아들은 행 상은,주위를 둘러보더니 입에 손 을 올리고 작게 속삭였다.

"영주님이 다치고 나서 셋째 아 들이 영주 대리가 되었는데,아무 래도 본인이 다음 영주가 되고 싶 은 모양인가 봅니다. 벌써 영지

내에 충성 서약을 받고 형 쪽 세 력을 정리하고 있다고 해요."

그의 말에 투구 아래쪽에서 나지 막이 한숨이 흘러나왔다.

공녀로서는 예상했던 내용이었지 만,막상 직접 듣게 되니 생각보 다 더 가슴이 답답했다.

행상은 말없이 서 있던 이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고개를 끄 덕였다.

"답답할 노릇이지요. 그동안 우 리 영지는 큰 싸움 없이 이어져 내려왔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요. 공녀님도 전쟁광 황제에게 버

림받으시고. 이번 대는 영 걱정이 에요."

그 말에 제이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공녀는 아무렇지도 않 은 듯했다.

슬쩍 눈치를 보던 제이크가 다시 질문했다.

"그럼,다음 영주님은 그 셋째 공자가 되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병사들하고 싸움 터에 가 있는 첫째 공자가 돌아오 면 한바탕하겠죠. 뭐,무사히 돌아 온다는 가정하에서지만…… 첫째 공자님도 영주님 못지않으니."

거기까지 말한 행상은 모여드는 사람들로 말을 멈추고 말았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한 곳만 따뜻해졌으니 사람들이 모이는 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흐지부지됐지 만,그것만으로도 대충 상황을 파 악할 수 있었기에,제이크는 이 정도면 됐다 싶어 펼쳤던 마법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흩어졌다.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나고,드디 어 두 사람이 검문을 받을 차례가

됐다.

문에서 검문을 하는 레인저들은 전에 성문을 지키던 레인저들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싸우고 온 것처럼 보이는 살기등등한 레인저들이 성 문 앞에 서 있었다.

레인저들은 기사와 마법사로 보 이는 두 사람을 보고 움찔했지만, 곧 정색하고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투구를 벗고 로브를 제쳐서 얼 굴을 보이도록. 영주 대리님의 지 시니,기사도 귀족도 예외는 없

다."

레인저의 말에 공녀는 슬쩍 제이크를 바라보았고,제이크는 먼저 자신의 로브를 뒤로 넘겼다.

로브를 넘기자 마르고 딱딱해 보 이는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 냈다.

공녀도 이어 투구를 벗었다.

투구를 벗자 공녀와 비슷한 잘생 긴 청년 얼굴이 그 안에서 나타났다.

두 사람의 모습에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던 레인저는 두 사람 의 이름과 방문 목적을 물었다.

"저희는 둘로 이루어진 파티입니다. 저는 마법사이고,이쪽은 기사 입니다. 실력을 키울 겸 대수림 탐험을 할 생각입니다."

제이크의 말에 레인저는 떨떠를 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하필 이런 시기에 수행 여행이라니."

수행 여행.

이제 막 기사가 된 사람이 실력 을 키우고 명성을 올리기 위해 제 국을 여행하고 대수림을 방문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제국이 시작된 초기부

터 이어져 내려온 유구한 전통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전통은 전통일 뿐,근래 에 들어서는 실제로 볼 수는 없었다.

남을 돕고 괴물들을 처리하면서 실력을 키운다는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행동은,방금 기사 직위를 얻은 기사를 죽게 만들기 딱 좋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 탓에 이제는 아무도 하지 않 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꿈을 찾아서 바보짓을 하는 사람도 있는 법.

조금은 한심한 듯이 두 사람을 바라보던 레인저는 두 사람의 여 행증과 출신지,이름을 확인한 뒤 에 성문을 통과시켜 줬다.

그런데 성문을 통과하는 중에 제이크가 잠시 성문 옆의 벽을 짚었다.

공녀가 의아한 듯 바라보자 제이크는 메시지 마법을 전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 몰라서요. 작은 마법을 남 겨 놓았습니다.

제이크가 손을 땐 자리에는 마석 하나가 성문 옆 벽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성벽 안의 도시는 밖에서 볼 때 보다 더 분위기가 안 좋았다.

거리에는 중무장한 레인저들과 용병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집 들은 창까지 모두 꼭꼭 닫혀 있었다.

더구나 용병 거리는 아귀 몬스터 에 의해 망가진 건물이 수리가 채 끝나기 전에 멈춰 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공녀는 살벌한 영지의 모습을 잠

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제이크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우선 저희가 머물고 있던 집으 로 가겠습니다. 아직 유지되고 있 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그곳부터 확인하죠."

제이크의 말에 정신을 차린 공녀 는 그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공녀는 공작의 상태가 궁금했지 만,몰래 숨어 들어온 입장에서 벌건 대낮에 영주성을 찾아갈 수 는 없었기에 순순히 제이크를 따 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용병 거리를

걸어갔다.

두 사람을 지나가던 레인저들과 용병들이 쳐다보기도 했지만,함 부로 두 사람에게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다행히 제이크가 지내던 저택은 멀쩡했다.

"마법도 아직 남아 있네요. 도둑 맞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집을 지키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유지하고 있던 것은 바로 마법이 었다.

"힐다가 마지막까지 지시한 대로

마법을 가동해 줬군요."

제이크는 공녀와 함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선 제이크는 텅 빈 집 대신 한 소녀의 외침을 듣게 되었다.

"여긴 마법사님의 집이다! 함부 로 들어왔다가는 물벼룩이 될 거 야!"

1층 홀 구석에서 앤이 빗자루를 치켜들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곧 주인님이 돌아오실…… 설마 제이크 주인님?"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가던 그녀는,제이크가 로브를 뒤 로 젖히며 환영 마법을 풀자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뒤이어 공녀가 투구를 벗 자 이번에는 창백한 표정으로 변 했다.

"공녀님은 오시면 안 돼요! 혹시 공녀님이 오셨을지 모른다고 사람 들이 찾곤 했어요!"

그때 홀 안쪽 복도에서 힐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네요. 마침 식사가 준비되 었으니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먼

길을 오시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 했을 텐데."

"엄마,공녀님이 오셨어요. 사람 들이 오기 전에 빨리 숨으셔야 해요."

"그렇게 떠들지 않아도 돼. 어련 히 알아서 하실까."

힐다는 앤을 진정시키고는 두 사 람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제이크와 공녀에게 따끈 한 스프와 빵을 대접했다.

"간단하게 드시고 계시면,제대 로 된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공녀는 침착하게 말을 하고 앤을

데리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힐다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제이크,그대는 어디서 저런 사 람들을 모으는 거죠? 그녀도 미래 에서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인가요?"

제이크는 공녀의 감탄이 섞인 질 문에 볼을 긁적였다.

힐다와 앤은 단지 소개를 잘 받 았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제이크와 레이첼 공녀 는 식사를 마친 뒤 힐다에게 그동 안의 이야기를 들었다.

"영주님이 다치시고 이슈비 공자

님이 영주 대리가 되셨다는 이야 기를 듣고,집에 머물던 다른 사 용자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제이크 님이 말씀하셨던 마법 스위치 를 올렸습니다."

"원래는 무슨 일이 생기면 떠나 기 전에 집에 마법을 걸어 달라고 했던 건데. 두 사람은 남아 있었 군요."

"돌아오실 게 분명하니 그동안 집을 지킬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요."

상황을 파악한 뒤에 현명하게 대 응하고 그 뒤에 자신의 책임을 다

하는 모습에,공녀는 그만 힐다에 게 반한 모양이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혹시 나중에 이직을 생각하시게 될 때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제 하녀장 자리를 비워 놓겠습니다."

힐다를 향해 정중히 말하는 모습 에 제이크는 진땀을 흘렸지만,다 행히 힐다는 그녀의 제안을 정중 하게 거절했다.

"아직 제이크 님을 주인님으로 계속 모시고 싶습니다. 공녀님은 좋은 시녀님과 하녀분들이 있으시 니 저 같은 평민에 신경을 쓰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저도 지금은 빈털터리랍니다. 아…… 하긴,제이크에게 얹혀사 는 형편이니 제안을 할 형편은 아 니네요."

공녀의 씁쓸한 자기 비하에 제이크는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좀 전에 이야기했듯이,영주성 을 살펴본 뒤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때 두 사람도 같이 가지 않겠어요? 조금 외진 곳이라 불편하기는 하겠지만,저 는 두 사람과 같이 가고 싶군요."

제이크는 원한다면 꽤 많은 돈을

받고 일을 그만둬도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조금 전에 제이크를 계 속 모시겠다 말한 힐다답게,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이크를 따 라가기로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그날 밤.

지하에 숨겨 놓은 마법 아이템과 금화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제이크는 공녀와 함께 영주성으로 출발했다.

밤에도 경계는 삼엄했지만,고대 마법사와 실력 좋은 기사의 잠입 을 어둠 속에서 찾아내는 것은 아 무리 실력 좋은 레인저라 해도 힘

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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