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화
깜깜한 밤.
사람들은 모두 잠이 들고,경비 병들만이 나와 순찰하는 시간.
영주의 침실에 루테리아의 영주 인 공작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숨을 편안히 몰아쉬는 것으로 봐서는 단지 잠든 것처럼 보이는 모습.
하지만 그의 배에는 피가 배어 나와 붉어진 붕대가 둘러져 있었다.
그리고 누워 있는 공작 옆에는 그의 막내아들,이슈비 루테리아 가 서 있었다.
"아무래도 용서를 구하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왔습니다."
이슈비는 억눌린 목소리로 누워 있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영주 대리를 스스로 차지하고
누님을 돌아오지 못하도록 명령하 고,영지 내부를 정리한 것을 용 서해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 피 후계자 싸움을 하려면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니까요."
잠시 말을 멈춘 채 붕대 쪽을 홀 깃 바라본 이슈비가 다시 공작의 얼굴로 눈을 돌렸다.
"다만,실수이긴 해도 아버지의 몸에 상처를 낸 것은 용서를 구하 겠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과 달리, 공작의 부상은 히베루니아의 기습 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아버지의 말에 화가 났 다고 해도 검을 휘둘러 버리다 니…… 아무래도 역시 난 패륜아 가 맞나 봅니다."
자조 섞인 표정을 하던 이슈비는 곧 얼굴을 싸늘하게 바꿨다.
"하지만,아버지도 그렇게 말씀 하시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슈비는 다시금 그때 일을 떠 올렸다.
며칠 전,영지 남서부.
히베루니아군을 상대하기 위해 나섰던 루테리아군의 숙영지는 전 쟁터에 자리 잡은 곳답지 않게 꽤 밝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히베루니아군과의 첫 싸움에 승 리해서 적들을 영지 밖으로 몰아 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히베루니아군이 곧 철 수할 것 같다는 소문까지 들려와, 밤늦은 시간에도 조금은 흥겨운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다만 그런 숙영지 분위기와 전혀 반대의 기색을 뿜는 막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영주,루테리아 공작의 막 사였다.
막사를 지키던 병사들은 공작의 지시로 모두 물러서 있어 막사의 분위기는 음침하기까지 했다.
"대답해 봐라.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열심히 막아 내다가 밀려난 것도 아니고,적에게 잡혔다가 풀 려난 데다가 그 대신 철수해 줬다 고?"
회의까지 겸하는 곳이라 작지 않 은 막사였건만,공작의 성난 기세 는 막사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수하들의 입을 막는다고 묻힐 거로 생각했단 말이냐! 이 멍청한 놈!"
넘실거리는 공작의 기세에 이슈 비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들지 못 하고 있었다.
"기사가 무슨 짓이냐! 네 형은 병사들을 이끌고 적을 치러 나갔 고,레이첼도 남자 이상을 하는데 넌 기사로서의 기본도 지키지 못 했어!"
쏟아지는 공작의 말에 하얗게 질 려 있던 이슈비의 눈이 조금씩 번
들거리기 시작했다.
"돌아가면 넌 근신이다."
"그럼,후계자 건은……
"미친놈! 지금 후계자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말이 되냐! 넌 후계자 는커녕 쫓겨날 걸 걱정해야 해! 어디서 이런 녀석이 내 아들이 되 었는지...
공작의 말이 점점 심해지자,이 슈비의 손이 덜덜거리며 허리를 향해 움직였다.
분노에 차 말을 쏟아 내던 공작 은 미처 이슈비의 변화를 알지 못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슈비의 허 리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푹!
"억! 네,네가 감히……!"
자신의 배에 꽂힌 검을 보고 공 작은 황당해하면서도 분노 어린 표정이 되었다.
"이깟,검 하나로 나를 어찌 해 볼 수 있다 생각하느냐……!"
원숙한 마나 사용자인 공작이 고작 검에 찔렸다 해서 쓰러질 리가 없었다.
공작은 더욱 분노하여 몸에 마나 를 돌리려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 검은…… 뭐지? 왜 마나 가……
공작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자 신의 막내아들을 쳐다보며 바닥으 로 무너져 내렸다.
이슈비는 반쯤 얼이 빠진 얼굴로 자신의 손과 공작의 배에 꽂힌 검 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그는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는 공작의 몸에서 검을 뽑고 옷으로 대충 지혈한 뒤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공작님이 다치셨다! 적의 기습 이다! 비상!"
조용하던 숙영지가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이 뛰어오고,치료사와 마 법사가 달려왔다.
그리고 공작을 기습한 자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레인저들이 수색하 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레인저들의 수색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영지군은 적 들이 물러가기 시작하자 바로 루테리아 시로 돌아왔다.
그 당시의 일을 떠올리던 이슈비 는 일그러진 얼굴로 작게 키득거 렸다.
"결국,핑계일 뿐이지. 어차피 난 이런 인간이니까."
자기 비하를 하던 이슈비는 일그 러진 얼굴을 쓸어내린 후,담담한 얼굴로 누워 있는 공작에게 선언 했다.
"아버지,아니,공작님은 그곳에 서 조용히 누워 계시면 됩니다.
영지는 제가 잇겠습니다."
그는 대답 없는 공작을 방안에 남긴 채로 공작의 침실을 나섰다.
야옹-
그가 떠난 공작의 침실에는 어디 선가 들려온 작은 고양이 울음만 남았다.
이슈비는 조용한 복도를 걸어 영 주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밤이 늦은 시간이었지만,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그는 바로 일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영주의 집무실에서 그를 기다리 던 사람 때문이었다.
누가 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 한 이슈비가 문을 닫자,상대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영주 대리님을 한참 기다렸습니다."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뼈만 남은 음침한 마법사.
이슈비는 집무실을 제집처럼 드 나드는 마법사를 보고 눈살을 찌 푸렸다.
공녀의 친구인 앰버라도 영주성 에 있다면 저렇게 다른 나라의 마
법사가 영주성을 자기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을 것이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 집무 실에 있는 거야! 내가 아니라 다 른 사람이 들어왔다면 그대로 죽 었을 것이다."
"집무실에 영주 대리님 이외에 들어올 사람이 있으려고요. 더구 나 이 성에는 저를 발견할 만한 기사나 마법사는 없습니다."
쓰러진 공작이나 성에 없는 첫째 조니건,혹은 레이첼,앰버 등이 있다면 이 마법사가 이렇게 잘난 척을 할 수 는 없었을 것이다.
이슈비는 또다시 자기 형제들과 의 격차를 느끼는 바람에 울컥 분 노가 치솟아 올랐지만,어차피 이 곳에는 화를 낼 당사자들이 없었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기분 나 쁜 마법사는 얼마 전까지 적이었 지만,지금은 한배를 탄 사람이었다.
"휴우,어차피 감시자가 필요하 다는 건가? 하지만,어차피 난 너 희들을 벗어날 수 없다. 감시고 뭐고 필요 없단 말이다!"
"감시라니요. 저희는 그저 이슈
비 님께 지원을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다. 언제 저희가 이슈비 님 을 어렵게 한 적이 있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언제나 도와 드린 적 뿐인 것을요."
"네 말이 맞긴 하지. 나를 잡았 다가 풀어 주고 그 소문을 아버지 에게 흘리고,나한테 이 마법 검 을 줘서 아버지를 찔러 잠들게 했 으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오해입니다. 저희는 선의로 풀어 드린 거 고,다른 이들에게 알리지도 않았 습니다. 아마 부하분들 중에 한
명이 공작님에게 알린 거겠죠. 그 리고 마법 검은 이슈비 님께 단지 선물로 드린 겁니다. 저희가 어떻 게 그 검을 바로 쓰게 될 줄 알았 겠습니까."
"하,말은 청산유수군. 정말 난 지옥의 악마들과 동맹을 맺은 모 양이야. 어떻게 내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이제는 그 런 비밀 정도는 의미가 없을 지경 이야!"
얼마 전 그가 히베루니아군에게 잡혔을 때,히베루니아의 장군은 그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이대로 죽을 것인지 아니면 자신 들에게 협력할 것인지.
거기다 그들은 이슈비만 알고 있 는 비밀을 가지고 그를 협박했다.
그가 꼭꼭 숨겨 놓고 있던 몇 가 지 실수와 한 번의 살인.
분명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라 생 각했건만,히베루니아 장군과 마 법사는 그의 비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슈비가 협박에 굴하자,장군은 그에게 다음 대 영주가 되는 것을 지원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를 풀 어 주었다.
그들은 공작이 이슈비에게 쓰러 진 뒤에 병력을 곱게 뒤로 물렀다.
대신 마법사 한 명을 이곳에 남 겨 둔 것이다.
그가 바로 눈앞에 있는,뱀과 같 은 암흑 마법사였다.
"주무실 시간이 지났습니다. 건 강을 위해 너무 오래 일하시지 않 는 편이 좋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후후,제가 너무 말이 많았군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마지막까지 기분 나쁜 미소를 보
내고는,마법사는 다시 어둠 속으 로 사라졌다.
"정말 지독하게 기분 나쁜 마법 사야. 그런데 왜 집무실에 있었던 거지?"
잠시 의아하게 생각하던 이슈비 는 곧 그에게 관심을 끊어 버렸다. 마법사가 하는 일까지 신경 쓰기에는 너무나 해야 할 일이 많 았다.
형이 돌아오기 전에 영지를 정리 해야 했고,남쪽에 남겨 둔 누나 도 어디론가 치워 버려야 했다.
한번 찔리면 다시 깨어날 수 없
다는 마법 검에 찔려 잠든 공작이 었지만,만약을 대비해 최대한 빨 리 끝내 놔야 했다.
이슈비는 제거해야 할 귀족들의 명단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장 한 장 문서를 들여다 보다,문서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발견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온 달빛에 의해 생긴 그림자였다.
"고양이인가?"
이슈비는 의아한 얼굴로 창문을 쳐다보았지만,이미 그림자는 사 라지고 무언가 창문 밖으로 뛰어
내리는 작은 형체만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한편,집무실 어둠 속으로 사라 졌던 히베루니아의 마법사는 영주 성 지하를 내려가고 있었다.
영주성 지하에는 다른 성들처럼 죄인들을 가둬 두는 감옥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계속 비어 있던 감옥이었지만,이슈비가 영주 대 리로 온 뒤에는 하나둘씩 감옥이
채워지고 있었다.
"역시 영주 집무실에 마법 아이 템도 없고,숨겨 놓은 장소를 알 려 주는 문서나 책도 없었어. 바 보 같은 영주 아들도 모르는 것 같고."
중얼거리던 마법사는 곧 히죽 웃 었다.
"뭐,한 번에 찾을 거라고는 생 각하지는 않았으니까. 흐음…… 공작하고 가까운 사람은 알고 있 겠지."
바로 그런 사람이 이 지하에 수 감되어 있었다.
"그건 그렇고,멍청한 영주 대리 주제에 묘하게 감이 좋단 말이야. 어떻게 다 정답을 맞힐 수가 있 지?"
이슈비의 생각대로 소문을 흘린 것도 히베루니아였고,마법 검을 준 것도 그의 아버지를 상처 입히 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마법 검에 걸려 있는 마 법이 두
가지라고는 눈치 못 랜 것 같은 데……
이슈비가 받은 마법 검은 마나를 동결시키고 잠들게 하는 마법 이
외에 검을 가진 자를 흥분시키는 마법이 담겨 있었다.
이슈비가 공작의 꾸중을 참지 못 한 것도 바로 그가 가지고 있던 마법 검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레타니아에서 보내 준 문서의 득을 크게 봤어. 바보 공 자의 약점에다가 그의 정신적 문 제까지 고스란히 맞아 들어갔잖아?"
혼자서 키득거리며 그는 아래로 내려갔고,그 모습을 계단 위에서 한 고양이가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뒤.
마법사가 지하의 어둠 속으로 사 라지자,고양이 옆에 두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영주성으로 향했던 제이크 와 공녀였다.
공녀는 충혈된 눈으로 마법사가 사라진 지하를 노려보는 중이었 고,제이크는 고양이를 향해 고개 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오자마자 일부터 시키기예요?"
"네가 아니었으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확실히 알기 어려웠으니 까."
"뭐,어렵지 않은 일이긴 했지 만…… 영 상황이 껄끄럽네요."
고양이,아니,고양이로 변신한 아인족 소녀는 발을 굴러 제이크 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제이크는 고양이에게 준비한 과 자를 물려 준 뒤에 공녀를 돌아봤다.
변형된 패밀리어 마법을 이용해 고양이가 본 광경을 똑같이 보고 들은 제이크였다.
그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정리 해서 공녀에게도 알려 줬고,공녀 는 생각보다 훨씬 나쁜 결과에 이
를 악물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제이크는 눈치를 살피며 공녀에 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우선. 성에 들어온 쥐. 새. 끼를 잡죠."
이를 악물고 한 자 한 자 토해 내는 공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낯 설어 보였다.
하지만 공녀의 심정이 충분히 이 해가 갔기에,제이크는 고개를 끄 덕였다.
잠시 뒤,두 사람과 고양이 한 마리가 마법사가 사라진 지하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