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데이지는 마차 구석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녀는 도무지 지금 상황이 현실 같지 않았다.
황제 옆이라는 자리까지 올라갔
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 고,거기다 지금은 제국군에게 목 숨을 위협받게 되다니…….
몇 개월 전,무도회를 기웃거리 며 귀족 세계를 훔쳐보던 그녀에 게는 너무 힘든 시간들이었다.
만약,아무 말도 듣지 못한 채 지금 상황을 맞이했다면 그녀는 더 버티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지금 그녀가 한 가닥 이성을 유 지하고 있는 것은 고양이와 이야 기를 나누던 붕대를 뒤집어쓴 이 상한 남자의 따뜻한(?) 말 한마디 덕분이었다.
마차 안에는 입을 열 수 있는 모 든 부상자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었다.
자신들을 죽이려는 자들을 저주 하는 목소리,황제를 찬양하고 저 주하는 목소리,살려 달라고 비는 소리.
온통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하자, 병사들은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부상자들은 겁에 질려 더욱 목소 리를 높였다.
그 와중에 데이지는 멍하니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물러서는 병사들 사이에 있던 한 병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 병사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붕대를 온몸에 감았던 남자.
비록 좀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지 만,데이지는 그 남자이리라 확신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 뒤에 쏘아 지는 화살들!
남자가 화살을 공중에서 튕겨 내 면서 동시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내가 알겠어? 젠장,어쨌거나 살 확률이 높아졌다는 거겠지."
"여기서 황제 폐하를 욕한 놈들 은 전부 내가 기억하고 있을 거다! 살아남게 되면 다 가만히 안 둘 거라고!"
상황이 바뀌자,부상자들 사이에 서도 서로 말싸움을 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움직일 수 있는 일부 부상자들은 주위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마차 밖 으로 빠져나갔다.
혼자라도 도망쳐 볼 생각인 듯했
다.
하지만 무기를 들지 않은 부상자 가 싸움터에서 살아남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간 이들은 얼마 안 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마차가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데이지 역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고양이가 그녀의 앞에 슬쩍 섰다.
"설마,날 지켜주는 거야?"
하지만 고양이는 데이지의 말에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냐앙!
-나한테 빚진 거예요!
페이샤의 메시지 마법에 바쁜 가 운데에서도 제이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약속하지.
짧게 대답을 한 그는 곧 정신없 이 주문을 외웠다.
"오랑우탄 같은 힘이여,솟아라!"
"늑대처럼 날쎄어라!"
"거북이처럼 단단해져라!"
-주문이 이상해요!
파티마가 투덜거렸지만,어차피
고대 마법의 주문이란 머릿속으로 구현된 이미지를 입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물론 마법 기술자들,현대의 마 법사들은 몸속에 서클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주문마저도 짧게 고정시 켰으니 그게 가능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제이크 같은 고대 마법사 는 이미지만 연상될 수 있으면 어 떤 주문도 쓸 수 있었다.
당연히 전생에 보았던 만화영화 의 주문도 가능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제대로 된 주 문을 썼겠지만,지금은 난전에
가까운 싸움 중이었다.
마차와 어린 사제들을 지키기 위 해 실드 마법을 유지해야 하는 제이크는 용병들에게도 쉴 새 없이 보조 마법을 걸어 줘야 했다.
다행히 제이크의 보조 마법은 엄 청난 효과를 보여 줬다.
"와,몸이 가벼워!"
자신을 막아선 창을 한칼에 부숴 버리고,병사를 베어 버린 용병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팔을 휙획 돌렸다.
몸속에 활화산 같은 힘이 생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용병은 몸을 날려 화살을 피하고는 신이나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팔을 베인 용병은 얇게 그어진 데 그친 팔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병과 병사들 간의 병력 차이는 작지 않았지만,마법사의 마법이 뒤를 받쳐 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컸다.
때문에 사기를 잃은 병사들은 용 병에 밀려 하나둘씩 쓰러졌고,병 사들을 수습해야 할 두 기사는 제시카와 루이와 싸우느라 도움을 줄 수 없었다.
판금 갑옷을 걸치고 방패와 중검 을 든 루이는 중년의 기사와 이미 여러 차례 검을 나눈 뒤였다.
중년 기사는 평범한 기사들보다 한 단계 위의 원숙한 마나 사용자 였지만,그런 그의 검도 루이의 방패는 뚫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마나가 뿜어 나오지 않은 검에 밀려 꽤나 손해를 보는 중이었다.
또 한 번의 싸움 뒤,중년 기사 는 자신도 모르게 루이에게 질문 하고 말았다.
"자넨 제대로 된 기사가 아닌가?
왜 용병을 하고 있지?"
제대로 된 검술과 방패술,거기 다 몸에서 풍기는 기백까지.
기사가 보기어L 루이는 오래간만 에 보는 제대로 된 신인이었다.
"아직 충성을 맹세한 상대가 없 으니 나와 같이 가지 않겠나? 내 가 주군께 소개해 주겠네."
싸우고 있는 상대에게 하는 말치 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기사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는 루이가 용병으로 썩히기에 는 너무도 아까운 재원이라고 생
각했다.
하지만 루이는 그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저는 이미 섬기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은 이긴 뒤에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루이는 제이크 쪽을 슬쩍 보더니 다시 방패를 굳게 잡았다.
다시 중년 기사와 루이의 검이 맞부딪치는가 싶었지만, 둘의 싸 움은 이어질 수 없었다.
옆에서 제시카와 싸우고 있던 젊 은 기사 때문이었다.
그는 중년 기사와 달리,제시카
의 공격에 휘말려 정신을 못 차리 고 있었다.
"이익! 말도 안 돼! 고작 용병이, 그것도 여자가 이런 실력이라니!"
제시카와 붙게 된 기사는 마법 부츠로 가속된 제시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의 검은 제시카가 지나간 잔상 만 잘라 낼 뿐이었고,반대로 제시카의 마법 단검은 그의 갑옷을 줄줄이 베어 버렸다.
그로 인해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가 예
시카를 향해 마구잡이로 검을 휘 둘렀다.
"아직 애송이네."
나지막이 혀를 찬 그녀는 젊은 기사를 향해 마지막 검을 찔러 넣 었다.
퍽!
그녀의 검이 갑옷을 뚫고 몸속에 깊이 박혀 들었다.
그런데 젊은 기사의 비명이 아닌 중년 남자의 묵직한 신음이 들려 왔다.
"크윽!"
젊은 기사의 위기를 보고 중년
기사,아일프가 자신의 몸으로 검 을 막아선 것이다.
그의 옆구리는 이미 크게 벌어져 있는 상태였다.
막아서는 루이를 뿌리치느라 얻 은 상처였다.
"아일프 경!"
놀란 젊은 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일프는 오히려 기사에 게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도망치십시오! 가문을 지키셔야 합니다!"
옆구리의 상처와 가슴에 박힌 검
으로 인해 더는 살기 어렵다 판단 한 아일프는 마지막으로 젊은 기 사를 후임이 아닌 가문의 후계자 로 대했다.
대대로 백작 가문에 충성을 다하 는 충직한 기사의 마지막 말이었다.
프랑코 백작가의 후계자는 눈물 을 흘리며 달아났다.
제시카와 루이는 그를 쫓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뒀다.
어차피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아일프는 끝까지 팔을 벌려 두
사람을 막아섰다.
그렇게 병사들을 이끌던 두 기사 가 패하자,지켜보던 병사들은 마 지막 남은 사기마저 잃어버리고 항복하거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살아남은 용병들은 환 호성을 올렸다.
피를 철철 홀리면서도 앞을 가로 막은 기사를 보며 루이는 검을 집 어넣었고,제시카도 더는 싸울 생 각을 버렸다.
그러자 아일프는 힘이 다 빠진 듯 쓰러져 곧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를 착잡한 표정으로 보던 루이 는 옆에서 들려오는 한숨에 고개 를 들었다.
한숨은 용병들을 보던 제시카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겼는데 왜 한숨을 쉬세요?" 루이의 물음에 제시카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나는 지휘관의 자질이 없나 봐. 어차피 싸우게 될 텐데 처음에 괜히 항복한 것 같아."
싸움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죽 거나 다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 었다.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잖습 니까? 그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제이크가 있었으면 이 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잖아."
제시카의 말에 루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제이크 님과 비교를 하 는 것은 좀 너무하죠."
루이가 겨우 꺼낸 말에 제시카가 입을 삐죽 내뱉었다.
그러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이럴 때가 아니다! 콘라드
에게 가 봐야 해. 그쪽도 공격받 고 있을 거야."
"같이 가시죠."
그녀의 말에 대답한 이는 어느새 두 사람 앞에 다가온 제이크였다.
"루이는 용병분들하고 뒷정리를 부탁해요."
"맡겨 주십시오."
"포션 만들어 놓은 게 있으니 필 요하시면 쓰셔도 돼요."
"아,우선 용병분들의 포션을 확 인해 보겠습니다."
격하게 다른 포션을 찾겠다는 루 이의 모습에 울적해진 제이크였
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바로 제시카의 소꿈친구,콘라드가 향 한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법 부츠를 신은 제시카와 가속 마법을 사용한 제이크가 질풍 같 은 속도로 협곡을 내달렸다.
제시카의 예상대로,콘라드는 한 참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콘라드는 용병 중에서 제일 강해 보이는 세 사람과 함께 싸우고 있
었고,다른 병사들은 나머지 용병 들과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용병 복장을 한 자들은 특이하게도 하나같이 천으로 눈 아래를 가리고 있었다.
콘라드는 세 용병의 합격에 꽤 고전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러던 콘라드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너희들,용병 맞아? 아무리 도 적질을 하는 용병도 있다지만,정 규 제국군에게 덤비는 용병이 어 디 있어?"
그는 용병들이 감히 제국군에게
함부로 덤비는 게 불만이었다.
그때,조금 전에 제국군과 싸워 승리한 용병들이 나타났다.
"제시카 등장이요!"
그 용병 중 한 명인 제시카가 경 쾌한 목소리로 협곡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불덩어 리 몇 개가 용병들을 향해 쏘아져 내렸다.
협곡 위에서 제이크가 쏘아 보낸 화염구들이었다.
조금 전까지 격렬하게 주문을 외 워,이제는 입이 부르틀 지경이
된 제이크.
이쪽으로 달려오는 동안 마법 지 팡이로 마나는 어느 정도 채운 그 는 이번에는 공격 마법으로만 끝 장을 볼 생각이었다.
화염구들은 싸움터 곳곳에 떨어 져 오로지 용병들에게만 피해를 줬다.
그 탓에 용병들은 급하게 뒤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오,살아 있었네?"
그사이 제시카는 바닥에 도착하 자마자 검을 휘둘러,콘라드를 상 대하는 자들을 뒤로 물러서게 하
고는 콘라드를 향해 씨익 웃었다.
"세상에,제시카가 맞아?"
말을 건네고 나서 다시 신나게 마나를 뽑아내며 검을 휘두르는 제시카의 모습에,콘라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어진 지 1년도 안 지났는데 뭐가 바뀌 보지?"
제시카는 의뭉을 떨었지만,콘라 드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제시카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나를 각성했다고는 해도,제시카는 여자이기에 제대로 된 싸움 을 하는 건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조금 전 싸움으로 본 제시카의 실력은 웬만한 기사 이상 이었다.
"세상에. 정말 얼마 전하고는 딴 판이야."
"뭐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도 몰라. 제이크가 한 말이 야."
제시카의 말에 콘라드는 어리둥 절해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다음 순 간 그는 작게 속삭이는 제시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놀랐다.
"그보다 먼저 병사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해. 그리고 가지고 있는 방패 같은 것도."
"뭐?"
"서둘러! 같이 있는 마법사의 지 시였어!"
마법사라는 이야기에 콘라드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모두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무기와 방어구를 버리고 뒤로 후퇴한다!"
"네?"
"시간이 없다. 서둘러!"
반신반의하면서도 대부분의 병사 가 무기와 방패를 옆으로 던지고 는 뒤로 몸을 피했다.
그 모습에 용병들이 어찌할 줄 몰라 했고,그 순간,그들이 서 있는 곳 위쪽 하늘에서 구름이 모 여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일대에 번개가 내리 꽂혔다.
과과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