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데이지가 있는 부상자 마차는 전 보다 사람이 줄어 있었다.
다행히 싸움의 흔적은 보이지 않 았다.
아마도 전투 중에 마차에서 달아
난 부상자들이 있었던 듯했다. 실제로 달아나는 데 성공한 부상 자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데이지는 마차 제일 안쪽에 앉아 있었는데,그녀의 품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
-싫다고 한 거 아니었어?
냐옹-
제이크가 권유하기도 전에 몸을 뻤던 페이샤였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고개를 돌 리고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제이크가 마차 위로 올라서자, 부상자들이 한껏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도 마차 안에서 제이크가 일 으킨 마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가끔 마법사와 같이 일하기도 하 는 용병과 달리,일반인이나 병사 들에게는 마법사란 어렵고 두려운 존재였다.
"어디 아프신 데는 없죠?"
제이크의 질문에 데이지는 의아 해하면서도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미리 알려 주시고, 이렇게 고양이도 보내 주시고요."
이제 안정이 된 모양이었다.
확실히 페이샤 덕이 큰 것처럼
보였다.
"제가 보낸 고양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좋아 보이니 다행입니다."
"아,그랬군요……. 그런데,혹시 저를 아시는 분이신가요?"
그래서인지 그녀는 얼마 전에 제이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에 대해 질문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도 있지 만,계속해서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고,지금도 뭔가 추억에 잠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 황도에 있을 때 파티에서
스쳐 가듯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사람을 기억하는 데 남다른 소질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을 뿐, 아마 데이지 님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실 겁니다. 정말 짧은 순간이 었거든요."
물론,거짓말이었다.
결혼 후, 그녀에게서 들은 이야 기로 유추해서 대답한 것뿐이었다.
다행히 제이크의 말은 꽤나 그럴 듯 했던 것 같았다.
데이지는 안도와 아쉬움이 섞인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미인이야.'
험하게 지내느라 엉망인 얼굴이 었지만,살짝 짓는 미소는 어린 나이의 풋풋함이 추가되어 무척이 나 화사해 보였다.
'예쁜 아내를 만났다고 주위에서 부러움도 많이 사긴 했는데……
물론 데이지는 그 이상으로 파티 와 외부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 해서 제이크를 힘들게 만들었다.
"황도의 파티에서 본 귀족의 영 애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되어서 잠 깐 도와 드린겁니다."
제이크의 말에 데이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를 살펴보던 제이크의 머릿 속에 의문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내가 결혼한 데이 지와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 힘든 일을 해 본 적 없는 천방지축인 파티녀였었는데, 지금은 나이는 더 어린데 더 어른스럽게 느껴지 는군.'
미래를 보고 온 황제가 벌인 일 이 나비 효과를 일으켜,그녀의 생활도 바꾼 모양이었다.
"레타니아 왕국으로 여행을 가셨 다가 전쟁에 휩싸이신 겁니까? 다
른 분들은 어떻게 되고……
"그게 아니라…… 사실은…… 어두운 표정으로 갈등을 하던 데 이지가 결국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하지만,그 순간 제이크가 손을 들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고민에 잠겼다.
데이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제이크는 손을 내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드러난 제이크의 얼굴
을 보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제이크의 표정이 조금 전과 달라 져 있었다.
그녀에 대해 걱정을 하고,안부 를 물으며 관심을 표하던 그의 얼 굴이 지금은 뭔가 떨쳐 낸 것 같 은 편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하마터 면 제가 영애의 프라이버시를 건 드릴 뻔했군요. 어쨌거나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이신 거죠"
"네? 아,네……
"그럼,조심해서 무사히 돌아가 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난 기념
으로 작은 선물 하나를 드릴게요."
그는 품에서 브로치 하나를 꺼내 그녀의 손에 내려놓았다.
-한기를 막아 주는 마법 아이템 입니다. 품에 넣고 계시면 추위 걱정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제이크는 다른 사람들이 탐낼지 도 모른다는 생각에 메시지 마법 으로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라본 뒤에 마차에서 내려왔다.
냐옹-
데이지의 품에 있던 고양이도 슬
그머니 그녀에게서 빠져나와 마차 에서 뛰어내렸다.
미야옹-
-정말 모르는 사람 맞아요? 처 음 보는 사람한테 마법 아이템을 준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뒤따라오는 페이샤의 물음에 파 티마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저건 흔히 볼 수 있는 열을 내는 마법 아이템도 아니잖 아요. 가벼운 병마는 바로 물리치 고,건강하게 해 주는 제대로 된 마법 아이템인데.
에고와 변신 고양이가 번갈아 가
며 뭐라 했지만,제이크는 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크의 경험 안에서는 아내였 던 여성이었지만,지금 그와 그녀 는 서로 모르는 사이가 맞았다.
그리고 마지막 선물을 준 순간, 아니,데이지의 말을 듣기를 거부 한 순간,제이크는 마음속에서도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추억이 소중하기는 했지만,지금 은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황제를 저지하고 멸망을 막는 것 이 먼저였다. 과거의 기억에 걸음 을 멈출 수는 없었다.
조금 전에,수많은 생명이 죽어 나갈 내전의 불씨를 던져 놓은 그 였다.
감성에 빠져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가슴 한쪽이 조금 아린 느낌이었 지만,그런 기분은 앞에서 손을 흔드는 제시카와 루이를 보고는 점점 사라져 갔다.
얼마 뒤,제국군과 용병들은 헤 어졌다.
용병과 사제들은 레이첼 성을 향 해 출발했고,콘라드가 이끄는 수
송 부대는 황도로 향했다.
용병들 중에 사상자도 있었지만, 성으로 향하는 용병들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죽음을 항상 옆에 달고 다니는 용병들이 었다.
더구나 운 나쁘게 제국군에게 걸 린 것치고는 나름 나쁘지 않은 결 과였다.
그리고 제이크가 나서서 용병들 에게 추가 보수를 지급하겠다는 말에,용병들의 사기는 더욱 올라 갔다.
하지만,황도로 향하는 병사들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멀쩡한 병사들의 수는 삼분의 일 도 안 되었고,더 늘어난 부상자 와 반란에 참여했다가 항복한 병 사들까지.
오죽했으면 콘라드가 헤어지기 전에 용병들에게 의뢰를 하려고 했다.
물론,그의 의뢰는 바로 거절당 하고 말았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콘라드도 앞날 이 막막했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콘라드 였지만,황제의 성정이 좋지 못하
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반란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는 해도,이렇게 큰 실패를 하고 만 부하를 쉽게 용서하는 황제가 아니었다.
콘라드는 떠나는 용병들을 잠시 부러운 눈으로 보긴 했지만,꿈에 도 그리던 기사 직위를 버릴 생각 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래도 줄을 잘 서야겠네. 어 느 라인을 타야 하지?'
아쉽게도 정의로운 근위 기사가 되고 싶었던 시골 소년은 이제 더 는 존재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어느 귀족에게 줄 을 댈지 고민하는 때가 탄 기사만 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편,콘라드와는 반대로 부상자 들을 실은 마차 안에 있는 한 소 녀는 어느 마법사와의 만남으로 절망을 벗고 어른이 되었다.
원래 황도의 파티와 귀족 생활만 알고 있었던 그녀였다.
그녀는 황제 때문에 산꼭대기에 서 밀려 떨어지는 지옥 같은 경험 을 하게 되었지만,작은 친절을 베푼 마법사 덕분에 세상은 단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
다.
앞으로 어떤 삶이 있을 줄 모르 겠지만,그녀는 이대로 주저앉고 휩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데이지는 따뜻한 온기를 내뿜는 브로치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용병 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래서,범인이 너였다는 거잖아?"
두 주 뒤,레이첼 성의 지하 던 전.
그곳에서 제시카가 제이크를 보 며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용병과 어린 사제들은 제국군과 헤어진 뒤로 별다른 일 없이 레이 첼 성으로 돌아을 수 있었다.
사제들은 임시 성주인 레이첼의 환영을 받은 뒤,성안에 마련된 작은 신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나이가 어려도 사제는 사제였다. 사람들은 사제가 영지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기뻐했다.
아직 다음 겨울의 몬스터 레이드 가 문제로 남아 있었지만,처음에
마지못해 이곳으로 왔던 사람들이 조금씩 이 성과 영지를 삶의 터전 으로 여기기 시작했기에 느낀 감 정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환영을 받으며 돌 아온 뒤,제이크는 성 지하에 있 는 자신의 던전으로 내려왔다.
그의 뒤를 따라 제시카가 내려왔다.
던전에 만들어 놓은 함정을 확인 하겠다는 핑계를 댔지만,딱 봐도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 제이크를 쫓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재미있
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던전 중앙 홀로 내려온 제이크가 마법 가방에서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고풍스러운 그림,멋진 촛대,아 름다운 비단 커튼,그리고,은으로 만들어진 각종 아름다운 식기들.
딱 봐도 예술품으로 보이는 물건 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그거야,제가 병사로 변장했을 때 좋아 보이는 걸 전부 빼돌렸기 때문이죠."
그랬다.
콘라드가 난리를 쳤던 사라진 물 건들은 사실 제이크가 빼돌렸던 것이다.
쏟아져 나오는 물건들 중에는 도 대체 어떻게 가방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물건도 있 었고,마나가 슬슬 흘러나오는 유 물도 있었다.
"뭐,어차피 털릴 물건이었고,황 도로 가 봤자 황궁 보물 창고에 처박힐 테니까,차라리 여기에 두 고 제가 쓰는 게 낫잖아요?"
"정말,나보다 더 도둑 소질이 있는 것 같아."
제시카는 제이크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아랑곳하지 않 고 중앙 홀 한쪽에 늘어놓은 물건 들을 보고 배부른 표정이 되었다.
던전을 깔끔하게 다시 만들어 놨 지만,함정과 마법 도구,유물과 마법 아이템 외에는 아무것도 없 던 던전은 무척이나 휑했었다.
실제로 던전은 보물을 숨겨 놓는 장소가 아니라 마나가 모이는 핫 스팟에 만들어진 마법사의 실험실 이었다.
제대로 부활한 고대 마법사의 마
법 실험실을 버려진 다른 던전처 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때 때마침 콘라드가 운반하던 물건을 어부지리로 빼돌릴 수 있 었다.
"더구나 이 물건들은 제국이 빼 앗은 레타니아 왕국 물건들이라, 외부에 공개를 할 수도 없어요. 그러니 이렇게 던전에라도 써 줘 야죠."
"아주 노렸네, 노렸어."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는 제시카 였지만,그녀도 내심 기쁜 마음으 로 예술품들을 감상했다.
"오,이건 람세즈 그림이다! 이 건 부르는 게 값인데. 이것도 그 렇고,와! 제이크 너,물건 보는 눈 정말 좋다!"
감탄 어린 제시카의 말에도 제이크는 어깨를 한 번 으쏙이고는 말 았다.
황도의 서기관으로 평생을 보낸 제이크였다.
수많은 귀족과 황실 인물을 만나 고 황성의 물건들을 봐 온 그가 눈이 낮을 리가 없었다.
"아,맞다. 그때 혼자 주변을 살 핀다고 따로 움직였을 때 뭐 한
거야? 나중에 이야기해 주기로 했 잖아."
그에 제이크는 가방 제일 안쪽에 있던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마법 가방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주머니는 제이크의 마나에 반응해 서 다시 강렬한 마나를 뿜어냈다.
"와,이건 또 뭐야? 딱 봐도 장 난 아닌데?"
흘러나오는 마나에 제시카의 눈 이 동그래졌다.
다른 예술품들도 좋아하는 제시카였지만,기본적으로 그녀는 던 전 탐사꾼이었다.
저렇게 마나 향기가 가득한 유물 이 눈앞에 나타나면 다른 물건들 이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저도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습 니다."
제이크가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열고 안을 살폈다.
그런데 제이크는 곧 심각한 표정 이 되었다.
"아무래도 공녀님과 이야기를 해 봐야겠네요. 제가 쓸 물건이 아닌 것 같아요. 어차피 이번 일도 상 의를 해야 하니까 공녀님과 만나 뵙죠."
"아니,그래서 뭔데?"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제이크가 몸을 돌려 던전 밖으로 향하자,제시카는 뒤를 따라가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