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얼마 뒤,완연한 봄소식과 함께 프랑코 백작의 반란이 제국을 넘 어 루테리아 왕국 남부에 있는 황 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프랑코 백작의 반란은 모두의 예
상을 뛰어넘는 큰 반란이었다.
크고 작은 영지 십여 개가 그의 반란에 동참해,제국의 팔분의 일 이 순식간에 반란 진영에 속해 버 렸다.
더구나 반란의 기세는 금방 주변 의 영지도 휩쓸어서 많은 영지들 이 중립을 자처했고,반란군은 수 도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황제의 군대에서도 소란이 일어났다.
"그래서,고작 반란이 일어났다 고 나한테 떼거리로 달려와서 떠
들어 대는 건가?"
황제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기사와 귀족들을 보며 인상을 찌 푸렸다.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출정 중이 던 귀족과 기사들이 회군을 청하 러 온 것이었다.
이미 반란이 일어난 영지의 병사 와 기사들 일부는 몰래 탈영한 뒤 였다.
지금 머리를 박고 있는 이들은 반란이 일어난 주변 영지 출신의 귀족과 기사들이었다.
"저들도 영지에 있는 가족이 걱
정이 된 것뿐이겠지요."
뒤에서 조심스럽게 대마도사 아 이힌테일이 그들의 편을 들어 주 었다.
"그리고,고작이라고 불리기에는 꽤 큰 규모입니다. 프랑코 백작이 반란을 일으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대마도사는 물론,이곳에 있는 귀족과 기사들 중에 프랑코 백작 과 말을 한 번이라도 섞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발이 넓고 귀족들의 지지 를 받고 있는 이가 바로 프랑코
백작이 었다.
때문에 황제의 군대 내부에서도 불안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황제는 얼마 전 레타니아 왕국을 완전히 병탄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지배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은 채 이루어진 일이었기 에 왕국의 치안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병사들의 사기 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왕국을 병탄한 뒤에 국경 에 몰려 있는 연합군과 대치를 한 지 꽤 시간이 지나 있었다.
다들 더는 진격이 쉽지 않을 거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반역이라 는 비보가 날아온 것이었다.
황제는 다행히 아이힌테일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조언을 받 아들이지도 않았다.
"다들 물러가도록. 아직 전방에 수만의 군대가 우릴 지켜보고 있다. 바로 군사를 틀면 뒤를 공격 당하게 될 것은 당연한 바. 좀 더 기다려 주기를 바란다."
대마도사는 황제답지 않은 부드 러운 대응에 눈을 치켜떴다.
그러다 황제의 입꼬리가 슬쩍 위
로 말려 올라가 있는 걸 확인했다.
뭔가 일을 벌일 때의 미소였다.
불안함이 아이힌테일의 마음을 스칠 때,귀족들과 기사들이 황제 의 천막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황제는 옆에 서 있던 근 위 기사를 조용히 불렀다.
"지금 온 놈들,확인해서 하나씩 정찰대로 뺑행이시켜."
황제의 말에 아이힌테일의 표정 이 어두워졌다.
"알겠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때 까지 정찰대에 배속시키겠습니
다."
그동안의 지시로 황제의 말뜻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된 기 사였다.
지금같이 수만의 병력이 서로 대 치 중일 때 적진을 정찰한다는 것 은 죽음에 한 발을 걸치는 일이었다.
더구나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귀 족들은 처음 정찰에 모두 목숨을 잃을 게 분명했다
또다시 느끼게 된 포악한 황제의 성정에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 에 없었던 아이힌테일이었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반란을 놔둘 수는 없습 니다."
"제국 안에 남아 있는 놈들 있잖아. 거기다 주변 영지들 죽기 싫 으면 알아서 막아 내야지."
황제의 말에 아이힌테일은 속으 로 마음을 다스리는 주문을 한 번 더 외웠다.
"방금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반 란의 규모가 너무 큽니다."
-혹시 미래에서 보신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이어지는 말은 주변의 시선 때문
에 메시지 마법으로 전했다.
"흥,프랑코 놈은 끝까지 나한테 납작 엎드린 놈이야. 그렇지 않으 면 내가 왜 살려 뒀는데."
하지만 황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럼 다시 한번 재고하심이
아이힌테일의 말에 황제가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대마도사 당신이 참 좋아.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입바른 소리를 하고,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뭐,정 안 되면 충분히
자신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으니 그러는 거겠지만."
황제의 말에 아이힌테일은 오싹 한 기분이 들었다.
"다만,멈출 때를 슬슬 가늠해 주었으면 하는데. 아무리 내가 좋 아하는 대마도사라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
황제의 말에 아이힌테일은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황제는 다시 씩 웃어 보였다.
"내가 바로 돌아가지 않는 게 저
앞에 진을 치고 있는 병신 놈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황제의 말에 아이힌테일은 정신 이 번쩍 들었다.
황제는 성격이 포악하고 종잡을 수 없었지만,카리스마와 뛰어난 두뇌도 같이 가지고 있다 판단하 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이 자 리에 머물 리가 없었다.
"반란은 이제 시작이야. 그놈들 이 좀 더 다른 영지들하고 치고받 아야 해. 그럼 불만 있는 놈들도 더 나올 거고,말 잘 듣는 놈도
가려질 거 아냐."
사람들이 미래를 경험한 것과 똑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고 황제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대관식 후에 쳐 낸 놈들외에도 숨어 있는 반골들이 한둘이 아닐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나와 있으면 고개를 쳐 들 것 같더라니,마침 제때에 나 와 주었어."
"설마,레타니아 왕국을 점령 안 하신 것도……
"겸사겸사지. 안과 밖 다 정리할 필요가 있는 거였으니 말이야. 우
선 바깥쪽은 일차로 정리했으니, 이제 안쪽 차례인가."
황제는 슬쩍 자신의 검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불온 분자들이 좀 더 튀어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이 기회에 모두 다 쓸어버리게."
아이힌테일은 황제의 말에서 느 껴지는 피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전율했다.
그가 본 황제는 반란을 정리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죽일 수 있는 적을 최대한 늘이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황제의 검이 더 많은 피를 원하는 듯이 깊은 울음을 토 해 냈다.
얼마 뒤,마법사들을 통한 황제 의 칙령이 제국 전체에 내려졌다.
각자 영지군들을 모집해서 반란 군을 막으라는 명령이었다.
황도에서는 황도 수비군이 병력 을 충원하기 시작했고,제국 곳곳 에서 강제로 징집병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미 레타니아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징집이 있은 뒤라,새로운 징집에 제국민들의 불만이 부글부 글 끓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루테리아 영 지에도 황제의 칙령이 전달되었다.
한참 내전을 복구하고 있던 새 영주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명령이 었다.
이번 내전으로 정예 레인저들과 많은 징집병들이 죽어,내전을 복 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필요한 병력 중 일부는 용병들을
사서 채워 넣는다고 해도,전장의 칼이 될 기사급이 너무 부족했다.
때문에 조니건은 결국 제이크의 예상대로 여동생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새 영주의 요청은 바로 전령에 의해 레이첼의 성으로 보내졌고, 레이첼 대신 니콜라스 부대장이 전령을 맞이했다.
그 시각,레이첼 공녀는 지하 던 전의 중앙홀에 있었다.
그녀는 제이크가 만든 마법진 중 앙에 서서 그가 마법진을 활성화
시키는 것을 보는 중이었다.
중앙홀 벽 쪽에는 앰버가 서서 눈을 부릅뜬 채로 의식을 지켜보 고 있었다.
그때,제시카가 조심스럽게 홀 안에 들어와 앰버 옆에 섰다.
"제이크 말대로 되었어요. 방금 영지에서 전령이 왔대요. 출병 요 청서를 가지고 온 모양이에요."
제시카의 말에 앰버는 신기한 표 정으로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제이크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고대 마법사에,넓고 깊은 지혜까지 가
지고 있고."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은 앰버의 말에 제시카가 눈썹을 슬쩍 치켜 떴다.
"앰버 님은 제이크를 정말 좋아 하시나 봐요."
"그럼요. 이제 겨우 마법을 배운 지 1년밖에 안 되는데 저보다,아 니,다른 누구보다 깊은 마법적인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데요. 이건 나이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 고요."
앰버의 말에 살짝 긴장했던 제시카는 풀썩 웃고 말았다.
그녀가 말한 좋아한다는 것과 앰 버가 말하는 좋아하다는 것은 전 혀 다른 이야기였다.
마법사란 역시 어쩔 수 없는 자 들이었다.
그때,작업을 끝마친 제이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눈이 부 실 수도 있으니 선글라…… 아니, 눈을 보호해 주시고요. 공녀님은 알을 발 앞에 있는 마법진 중앙에 올려놓으세요."
레이첼은 그가 시키는 대로 안주 머니에서 마나를 풍기는 '신수'의
알을 꺼내서 발 앞에 세워 놓았다.
그동안 그녀는 신수의 알이라는 물건을 계속 품에 지니고 있었다.
알과의 친화력을 높이기 위해서 라는 제이크의 설명이 있었기 때 문이었지만,그녀도 알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단지 계속 풍겨 나오는 마나 향 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조금 난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이 신수의 알을 깨우는 날이었다.
그동안 제이크는 사제들과 친분 을 쌓는 일,지하 던전을 보강하 는 일 등 바쁜 와중에도 계속 신 수의 알을 깨우기 위한 마법진을 만들었다.
다행히 그 일들이 늦지 않게 끝 나서 영지에서 연락 올 때에 맞출 수가 있었다.
"마나가 많이 필요한 일이라서 마법이 시작되면 마나의 유동이 심할 겁니다. 모두 자신의 마나가 흔들리지 않게 유의해 주세요."
"그리고 공녀님은 알이 깨어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
아 주시고요."
모두에게 다시 한번 주의를 준 제이크는 마법진 한쪽에 서서 작 게 이름을 불렀다.
"빈크루."
그가 이름을 부르자,던전 바닥 에서 반투명한 여성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이 던전의 에고,빈크루였다.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겠지? 부 탁할게."
제이크의 말에 빈크루는 광장 중 앙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양팔을 크게 벌렸다.
"아무래도 저거,점점 여자처럼 변하는 거 맞죠?"
뭔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이 었지만,제시카는 뭔가 다른 것을 본 모양인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 었다.
"아,그렇네요. 전에는 허리 아래 가 기둥이었는데,이제는 다리 비 숫하게 변한 것 같은데요?"
"저 요물,또 뭘 하려고 변하는 거야?"
아직도 아귀 몬스터의 촉수에 대 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제시카였다.
그런 그녀가 던전 에고의 변한 모습을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에고라는 게 처음 만들어지면 주인의 취향을 따라간다던데……
제이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 지만,눈에서 불꽃을 피우는 제시카의 모습에 앰버는 그저 입을 꾹 닫았다.
제이크는 던전 안에 있을 때,던 전 에고인 빈크루와 마음속으로 꽤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제이크의 지시를 누구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빈크루는 그동안 던전에 모아 둔
모든 마나를 마법진에 쏟아부었다.
화악!
환한 빛이 던전을 가득 매웠고, 제이크의 목소리가 던전을 울렸다.
"깨어나라! 마나의 영혼이여. 일 어나라,생명의 기운이여. 마나의 이름으로 고대의 전설을 일으키나 니,너의 이름은 카라스다!"
제이크의 말이 끝나자,마법진의 빛이 세상을 멀게 할 듯이 강렬해 졌다.
동시에 마나가 성마저 흔들 정도
로 요동쳤다.
크르릉-
잠시 뒤.
빛이 사라지자 던전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알을 놔뒀던 자리를 쳐다봤다.
그런데 마법진 중앙에 있던 알이 깨져 있었다.
"신수는 어디 있어?"
앰버와 제시카는 신수를 찾아 두 리번거렸고, 레이첼과 제이크는 난감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조금 일이 꼬인 것 같
습니다만……
그런데 제이크가 입을 여는 순 간,은색의 작은 생명체가 제이크 의 머리 위로 슬쩍 올라섰다.
뮤-!
통통하고 작은 은빛 새였다.
"귀여워! 근데 저건 깃발 그림하 고 다르잖아. 오히려 맵새같이 보 이는데?"
제시카의 말에 제이크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야 새끼니까요. 이래 봬도 생명체라 성장이 필요합니다."
"그럼 문제는 없잖아요. 뭐가 꼬
인 거죠?"
앰버의 물음에 제이크는 머리에 올라선 은빛 새를 톡톡 쳤다.
미 유?
새는 작은 날개를 파드닥 움직여 서 레이첼의 머리에 올라섰다.
"원래는 공녀를 어미 새로 각인 을 시키려고 했거든요. 그거는 잘 된 것 같은데……
새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제이크 머리 위로 날아갔다.
"아무래도 제 마나까지 각인이 된 것 같네요."
"엑! 설마 신수의 아빠 엄마가
된 거야?"
제시카의 말에 공녀와 제이크는 또 다시 난감한 얼굴로 서로를 바 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