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완연한 봄으로 접어든 어느 날. 봄꽃이 출렁거리는 넓은 벌판에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병 사들이 둘로 나뉘어서 대치하고 있었다.
한쪽은 반란을 일으킨 프랑코 백 작의 세력들이었고,다른 한쪽은 프랑코 백작의 진격을 막기 위해 급하게 소집된 병력이었다.
반란이 일어난 초기에는 영지에 서 소집되자마자 개별적으로 반란 군을 상대했었다.
하지만 생각 외로 반란군의 저항 이 강력하여 하나같이 깨져 나가 고 말았고,그 틈을 타 반란군은 황도를 향해 막힘없이 질주해 나 갔다.
결국,방어군은 멀찌감치 뒤로 물러서서 방어선을 치고 병력을
끌어모아 힘을 합쳤다.
상대해야 할 수가 많아지자 반란 군도 결국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서로 공격 시기만을 엿보며 긴장 을 끌어 올리는 시기.
바로 그때.
루테리아 영지의 병력이 도착했다.
수만 명이 모여 있는 방어군의 중심에는 화려한 천막과 각양각색 의 깃발이 걸려 있는 방어군 사령 부가 있었다.
사령부에는 근위 기사들과 정예 병들을 대표한 제국에서 다섯 손 가락 안에 드는 검호인 오페우스 백작,그리고 각 지방 영지를 대 표해서 나온 귀족들이 자리를 잡 고 있었다.
"빨리 적들을 쳐야 합니다!"
"저들이 더 모이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합니다!"
"아직 안 되오. 우리도 다 모인 게 아니지 않소? 이 상태에서 달 려들었다가는 여태와 다를 게 무 엇이오? 또 깨지고 싶은 게요?"
"흥,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생각
인가?"
"무슨 망발을! 황제는 승리를 원 하시지,패배를 원하시는 게 아니다!"
"지금 공격하면 진다고 생각하는 가! 그건 패배자의 변명이다!"
"이 쪼다 같은 놈이! 누구보고 패배자라 하는가!"
주먹질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거의 싸움박질을 하는 것과 다름 없는 귀족들의 모습에 오페우스 백작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황제 페하가 계셨으면 말 한 마 디도 못할 놈들이 지금은 신나서
떠들어 대는군.'
뭣 같은 성격 때문에 별로 좋아 하지 않는 황제였지만,사람을 압 도하는 카리스마와 호쾌한 성격은 그도 인정하는 바였다.
시끄러운 소리에 마나를 실어서 호통을 한 번 치고 싶기도 했지 만,여기에 모인 귀족들은 공식적 으로 수평적인 관계라 함부로 대 하기가 쉽지 않았다.
방어군 자체가 영지들의 연합군 이었으니,대검호의 백작인 그도 이곳에서는 지휘부의 일원일 뿐이 었기 때문이었다.
'왜 황제 폐하가 지휘부를 단일 화 시키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검과 전쟁만 했던 그가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하는 것이 무리였으 니,이런 난장판을 예상하지 못한 일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이래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방문자를 알리기 위해 온 병사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백작은 작게 마나를 실어 탁자를 두들겼다.
쿵,쿵.
묵직한 소리가 주변에 퍼져 나갔다.
한바탕 떠들던 귀족들은 그가 탁 자를 두들기는 소리에 맞춰서 조 용해졌다.
어쨌거나 전장 한가운데서 마나 가 실린 대검호의 기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무슨 일인가."
백작의 말에 화색을 띤 병사가 바로 입을 열었다.
"루테리아 영지에서 병력이 도착 했습니다."
"오,루테리아에서?"
백작은 오래된 친우의 영지에서 병력이 왔다는 소리에 반가운 표 정이 되었다.
"루테리아에서 병력을 보낼 여지 가 있었나?"
"후계자 전에 휘말려 공작도 죽 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몬스터 웨이브도 제대로 못 막 아서 방벽도 부셔졌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서로 신나게 싸우던 귀족들은 루테리아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모 두 합심해서 험담을 늘어놓기 시
작했다.
하지만 응성거리는 모든 험담을 무시하고 백작은 루테리아의 병사 를 안으로 들이라 지시했다.
그런데 곧이어 등장한 기사를 본 귀족들과 백작은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로 들어온 몇몇의 사람들의 맨 앞에 갑옷을 입은 여성이 있었 던 것이다.
그것도 이곳에 있던 귀족들 모두 가 잘 아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작년에 황도에서 쫓겨나 루테리아로 돌아간 전 예비 황태
자비 였다.
쓸쓸하게 무대에서 사라진 그녀 가 번쩍이는 판금 갑옷을 입고 이 자리에 등장한 것이다.
귀족들은 갑자기 등장한 전 황태 자비를 보고 머릿속으로 정치적인 이유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설마,사람이 없다고 얼굴마담으 로 내놓은 건가?'
'정략결혼용으로 선보이는 건가? 하지만 저런 갑옷을 입혀 놓으면 말짱 황인데.'
'루테리아도 다 망했군. 악수를 썼어. 저러면 욕만 먹고 끝나지.'
조금은 비웃는 얼굴들로 정치적 인 이유를 추측하는 귀족들과 달 리,백작과 그 자리에 있던 기사 들은 다른 이유로 놀란 표정이 되 었다.
"기사로 각성했군. 역시 루테리아인가! 그 아버지에 그 딸이군."
백작은 자신의 마나 장벽을 두들 기는 공녀의 마나에 환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 친우인 루테리아 공작이 죽 었다는 소리에 상심이 컸던 그였 기에,그의 딸이 마나를 각성한 것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레이첼 루테리아 외 400명. 황 제 폐하의 칙령을 받고 반란군 제 압 부대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절도 있는 목소리로 레인저의 경 례를 올리는 그녀의 모습에 백작 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뒤에서 지켜보던 귀족들 은 좀 전보다 더 쑥덕거리기 시작 했다.
"여자가 기사로 각성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뭐,가끔 등장하긴 하잖습니까. 실제로 전장에서 쓸모가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지만."
"흠,그래도 아예 쓸모없지는 않 겠는데요?"
"기사가 된 전 황태자비라. 나름 선전 효과는 있겠습니다."
"그것보다 겨우 400명이라니. 홍,그 인원으로 뭘 하려고."
"뭐,영지가 망했으니 그냥 발만 걸친 거겠죠. 그래도 전 황태자비 의 등장 덕분에 아예 묻히지는 않 겠습니다."
기사들의 뛰어난 귀들을 다 아는 귀족들이니,이건 들으라고 한 말 에 진배없었다.
하지만,공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에 백작은 더욱더 만족한 얼굴 이 되었다.
"어서 오너라. 아니,반갑네. 우 리 연합군은 루테리아 영지의 참 여를 환영한다네."
예비 황태자비로 황도에 있을 때 도 그녀를 예뻐해서 여러 가지 도 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던 오페우 스 백작이었다.
젊었을 때 보았던 루테리아 공작 과 같은 기세를 보이는 공녀의 모 습에,그는 마치 자신의 자식이 성장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그런 기분도 잠시였다. 어쨌거나 그녀는 루테리아 영지 의 대표로 온 것이었다.
"어디 보자. 그대의 부대를 어디 에 배속해야 하려나."
나름 안전하면서도 전공을 자랑 할 만한 자리를 찾아보려고 있던 백작이 었다.
하지만,아쉽게도 이 자리는 하 이에나 같은 귀족들 수십이 도사 리고 있었다.
"우리 부대에는 빈자리가 없습니다."
"400명으로는 기존 지휘 체계에
넣기는 무리죠."
"차라리 정찰대나 유격 부대로 빼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름 전공도 올릴 수 있고. 용 병들이 많을 테니 성격도 맞을 것 같은데요?"
물론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 니었지만,위험한 곳이었다.
한쪽으로 몰아가는 귀족들의 모 습에 백작이 참았던 호통을 치려 는 순간.
공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유격 부대 로 활동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의 말대로 저희는 용병들이 주축 이라,그쪽이 편합니다."
공녀가 대답을 한 순간,일은 결 정이 되었다.
백작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공녀 를 바라봤지만,공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백작에게 보여 줬다.
"걱정 마세요. 기필코 기대에 보 응하겠습니다."
그녀의 음성은 백작만 들릴 정도 로 작았지만,그 안의 의지는 누 구도 부러뜨릴 수 없이 굳건해 보 였다.
백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 덕였고,공녀는 다음에 뵙겠다는 말로 인사를 올린 뒤에 사령부를 벗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뒤에서 그녀를 수행하던 제이크 의 말에 공녀는 그를 돌아보았다.
"잘된 거죠?"
"어차피 공적이 필요했습니다. 인원이 많지 않은 만큼 독립적인 유격 부대가 제격입니다."
"그래도 위험할 텐데. 다들 괜찮 을는지."
공녀는 역시 승리보다는 부하의
생환을 더 중요시하는 지휘관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지휘관의 모습이었지만,이런 시절,이런 시 기에는 희생도 필요한 법이었다.
'그런 역할은 내가 하면 될 거 고.'
"제가 있습니다. 최대한 이 인원 을 살려서 돌아가겠습니다."
제이크는 걱정하는 공녀에게 자 신 있게 이야기했다.
실제로 안전한 곳에 있을 때보다 희생은 있겠지만,최대한 살려 볼 생각이었다.
사령부를 벗어나기 전에 하급 귀 족과 관리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일 행이 멈췄다.
"저는 이곳에서 일을 처리하고 뒤따라가겠습니다. "
이곳은 영지들 간의 실무적인 협 상을 하는 자리였다.
각자 배급과 포상,전공에 따른 황제에 대한 상신 등.
연합 지휘 체계인 이상,이런 실 무자들의 협상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전공을 세워,
버려진 영지를 자신의 영지로 인 정받고자 하는 레이첼 일행에게는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한 자리였다.
"혼자서 괜찮겠어요?"
딱 봐도 서슬이 퍼런 현장 관료 들이었다.
허세에 절은 고급 귀족과 달리, 실무를 담당하는 이들은 독기가 가득했다.
그녀의 말에 제이크는 씩 미소를 지었다.
"여기는 제 전장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메시지 마
법으로 그녀의 머릿속으로 전달되 었다.
-저도 평생을 황도에서 버텨 낸 서기관입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제이크가 휘적휘 적 하급 귀족들에게 다가갔다.
"반갑습니다. 저는 루테리아 영 지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제이 라고 합니다."
제이크의 인사에 하급 귀족들과 관료들은 인상부터 찡그렸다.
딱 봐도 용병으로 보이는 어린 청년이 자신들 앞에 나타났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용병 따위가 전공을 협상할 생 각을 하다니."
"나이도 어리잖아. 루테리아라서 그런가. 정말 천박하군."
당연히 불만이 쏟아졌다.
하지만,제이크의 미소는 지워지 지 않았다.
"하하,저는 용병이 맞긴 합니다 만……
제이크는 손에서 불꽃을 피워 올 렸다.
"마법사이기도 하지요."
불꽃에 의해 붉게 물든 제이크의 얼굴을 보던 하급 귀족들은 조용
히 입을 닫았다.
마법사라면 어디를 가든지 단승 귀족 정도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더구나 이런 전장에서는 힘을 가 진 자가 우위에 서는 법이었다.
"자,그럼 협상을 시작해 볼까요?"
제이크는 귀족과 관리들을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 * *
루이와 제시카,그리고 루테리아
영지 용병 300명과 레이첼 성에 있던 징집병과 용병 100명.
이렇게 총 400명의 루테리아 영 지 파견 부대는 양군이 마주보고 있는 평야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 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격 부대로 단독 작전에 나서게 되었다는 레이첼 공녀의 말에,용 병들은 조금 불만스러웠지만 수긍 했다.
단지 자신들뿐이면 유격 부대라 는 말에 다 집어치웠겠지만,같이 있는 사람들이 걱정을 꽤나 덜어 주었다.
루이와 제시카,레이첼 공녀의 그동안의 활약이 용병들 사이에 꽤나 퍼져 있었고,그중에서도 마 법사 제이크의 이야기는 뭔가 어 마어마한 살이 붙어서 점점 퍼지 고 있었다.
레이첼 공녀가 오고 얼마 뒤,제이크가 지친 얼굴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차라리 마법사와 싸우는 게 편 하겠어요. 다들 입에 마법 검을 달고 있다니까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제이크
는 일행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됐든 황제에 상소를 올릴 수 있게 만들어 놨어요. 이제 전 공만 올리면 됩니다."
제이크의 말에 공녀는 굳게 머리 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뒤.
평야에서 마주 보던 두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그에 맞춰 루테리아 영지군으로 이루어진 유격 부대도 이동을 시 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