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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 서기관의 회귀-124화 (124/222)

124화

황제가 복귀한 뒤,반란과 잦았 던 전투들은 많이 잠잠해졌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분위기만 줄 어들었을 뿐,모든 반란이 수그 러든 것은 아니었다.

프랑코 백작의 반란군은 여전히 자신들의 영역에서 힘을 모으고 있었고,제국 서쪽에서 새로 일 어난 반란군들도 하나로 모여 새 로 거대한 무리가 되고 있었다.

아직 황제가 움직이지 않고 있 어 조용했지만,황제가 다시 움 직이는 순간 제국은 다시 피로 물들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제국의 동쪽 끝에 있는 영지이자 디시 부활한 영지,아 스굴론은 혼란스러운 제국 상황 에 신경을 쓸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영지를 발전시키는 데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루테리아 영지의 소속이 었기에 할 수 없었던 모든 일이, 새로운 영주의 승인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성 밖의 천막들이 나무집으로 변해 갔고,길도 보수되었으며, 무너진 수로는 다시 정비되었다.

임시로 만든 신전은 정식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용병 사무소도 정식으로 오픈되었다.

거기다 성 앞 대로 옆에 시장도 형성이 되었다.

아직 겨울에 있을 몬스터 웨이 브의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 지만,영지는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히 이 모든 일들은 돈이 필요했다.

길을 새로 깔고 성을 보수하는 등 사람들을 쓰는 데는 돈을 지 불해야 했고,자재를 구하는 데 도,하다못해 신전의 어린 사제 들을 보살피는 데도 돈이 들어갔다.

레이첼 여남작에게도 독립을 하 면서 가져온 사비가 있기는 했

다.

그러나 그 돈조차 영지에 쏟아 부어야 하는 액수에 비하면 언 발에 오줌 누기 정도일 뿐이었다.

다행히 그런 그녀를 돕기 위한 손길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영지의 수뇌들이 모 인 아침 회의에서,제시카가 뜻 밖의 말을 꺼냈다.

"합자 회사 퀸비 (Queen Bee) 에 서 영지에 투자를 하기로 했어요."

벌겋게 변한 얼굴로 꺼낸 이야 기에,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합자 회사 퀸비?"

레이첼 영주의 물음에 제시카가 더듬거리며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저희 파티원들끼리 만든 일종의 조합이에요. 그동안 모은 돈과 유물들을 놀리지 말고 영지에 투자를 하자. 뭐 이런 이 야기인 셈이죠."

"합자 회사라,신기한 방식이네요."

"아니,그러니까 함께 번 것을

지분으로 나누어 가지고…… 으 악! 나 못 해! 제이,네가 설명 하면 되잖아! 왜 날 시켜 가지 고!"

억지로 설명을 이어 가던 제시카가 제이크를 향해 벌컥 화를 냈다.

제이크는 조마조마하게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말할 상황이 아니잖아요. 투자를 하자고 말을 꺼낸 것도 제시카고."

"아니,그건 네가 영지에 돈이

필요하다고 말해서 꺼낸 이야기 잖아!"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레 이첼이 제이크를 보며 말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우리 서 기관님이 이야기해 주시죠."

그 말에 제이크가 나지막이 한 숨을 내쉬었다.

그가 말할 상황이 아니라고 한 것은 다 레이첼이 언급한,제이크의 새 직책 때문이었다.

레이첼 여남작과 제이크 일행이 영지로 복귀한 뒤에,임시 영주 는 새로 영지의 관리를 임명했다.

먼저 그녀는 니콜라스 레인저 부대장을 영지의 기사단장으로 앉혔다.

그 말고 다른 기사가 없었기에 니콜라스는 단원 없는 기사단장 이었지만,그는 기꺼이 새 직책 을 받아들였다.

루이를 첫 번째 기사로 영입하 기 위해 끊임없이 쫓아다니기는 했지만,어쨌든 그는 자신의 직

책에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레이첼은 영지의 마법사로 친우이자 첫 번째 가신 인 앰버를 임명했다.

사실 레이첼과 앰버는 제이크를 영지의 마법사로 앉히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제이크는 아직 자신이 고대 마법사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했기에 앰버가 아스굴 론 영지의 마법사가 된 것이었다.

그 뒤에 신관과 병사들에게도 각각 직책을 안겨 주어,영지의

구색이 점점 갖춰졌다.

문제는 영지의 행정을 담당할 행정관이 없었다.

위쪽의 새로운 루테리아 영주에 게는 아버지를 보필했던 앤드류 남작이 있었지만,레이첼을 따라 온 가신 중에는 따로 행정 전문 가가 없었다.

대신 그녀에게는 전 수습 서기 관이자 대륙 유일의 고대 마법사 가 있었다.

"아니,그때 저는 채 1년도 안 된 수습 서기관에다,황실 서기 관은 회의 정리나 기록물 관리

쪽 업무가 대부분이었어요!"

……라는 이유로 제이크가 거절 하려고 했지만.

"그 마나 세계에서 평생을 서기 관으로 보냈다고 했잖아요. 거기 다 나중에는 실무 담당도 엄청 하지 않았어요?"

레이첼에게 제대로 반격을 당하 고 말았다.

실제로 제이크의 생애 후반, 제 국의 혼란기 이후로는 황실 서기 관이 아니라 각종 실무 담당자로 일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거기다 영주성 지하를 무단 점

거하고 있잖아요. 정식으로 쓰시 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뒤이은 앰버 마법사의 말에,결 국 제이크는 항복을 하고 말았다.

결국 제이크는 새 영지 아스굴 론의 총 행정 담당인 서기관을 맡게 되었다.

공녀의 질문에 제이크가 대신 입을 열었다.

"웬만하면 행정관인 제가 참여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는 우선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내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영지의 전반적인 일을 처리하는 역할인 서기관이 영지에 투자를 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좋게 비춰 지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제시카의 주도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파티원들의 재산 중에는 제이크의 돈도 들어 있기 에 눈 가리고 아응하는 식에 가 까웠다.

하지만 제이크는 형식적으로나 마 자신이 청렴하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전생과는 달리 그런 문제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정말 돈 문제는 까탈스럽다니 까. 서기관으로 딱 맞는 것 같긴 한데,남자가 그러면 좀스럽다고 욕먹어."

제시카의 말에 제이크는 다시 한번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이야 기를 이어 갔다.

"그러니까 제시카의 설명 그대

로입니다. 저희 파티가 그동안 얻은 유물과 고대 금화를 합자 회사라는 형식으로 영지에 투자 할 생각입니다. 영지는 필요한 자금을 얻을 수 있고,저희는 묶 인 돈을 융통할 수 있게 되는 거 죠."

제이크의 말에 레이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담보로 뭘 잡을 건데요? 다른 영지처럼 광산 권리나 시장 독점권 같은 걸 주기도 힘든데."

레이첼의 말에 제이크는 머리를 긁적였다.

"담보가 있으면 좋긴 하지만, 영지에 담보로 잡을 만한 게 없 다는 건 제가 제일 잘 압니다. 투자는 미래에 영지가 얻을 수익 을 담보로 할 생각입니다."

"그럼 영지가 망하면 들인 돈을 다 날리게 되잖아요."

그녀의 말에 제이크가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영지를 파산시키실 생각 입니까?"

제이크의 물음에 레이첼이 정색 을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이 영지는 제가

목숨을 걸고 제대로 키울 거예요."

레이첼의 말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망하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

제이크는 계약서를 하나 꺼내 레이첼 앞에 내려놓았다.

"다 하나하나 읽어 보시고 사인 하세요. 마음에 안 드시는 내용 이 있으면 다시 이야기하시고요."

"어차피 제이가 서기관인데,제 이가 사인하면 되잖아요."

"하아……

레이첼의 말에 제이크가 이번에 는 제대로 한숨을 내쉬었다.

새 영주님은 뛰어난 기사이자 지휘관,그리고 영지민을 생각하 는 훌륭한 영주였지만,아직 돈 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젊 은 귀족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영주님이 다른 것들 을 다 잘하셔서 제가 생각이 짧 았던 것 같습니다. 우선 이 계약 서를 보는 법부터 아셔야겠네요. 그리고 제가 틈나는 대로 영지의 행정과 재정에 대해 교육을 해

드리겠습니다. 영주가 되어서 영 지의 재정도 제대로 파악 못 하 면 안 될 테니까요."

제이크는 새 영주를 제대로 가 르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 탔고,레이첼은 엄습하는 불안감 에 몸을 떨며 계약서를 들여다보 았다.

그 모습을 한쪽에서 지켜보던 새 기사단장,니콜라스가 옆자리 에 있는 앰버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영지에 투자할 정도로 돈이 있었던가요? 말하는 투로는 적은 돈이 아닌 것 같기는 한

데……

니콜라스의 물음에 앰버는 지하 던전에 옮겨 놓은 마법 아이템들 과 금화들을 떠올렸다.

"흠,제가 루테리아 영지에 있 을 때 영주성의 비고에 들어가 봤었거든요?"

영주성의 비밀 창고는 각종 마 법 아이템과 보물이 모여 있는 곳으로,꽤 유명한 곳이었다.

황궁의 보물 창고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수백 년 동안 영지 가 모아 온 대수림의 보물이 그 곳에 있었다.

"제이 일행이 가지고 있는 것들 도 그리 떨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한마디로,제국에서 손꼽히는 부자라는 거죠."

용병 생활 동안 털어 온 던전들 과 몬스터,그리고 황도로 가는 마차에서 슬쩍한 물건들.

마지막으로 제이크가 만든 마법 아이템까지.

영주성 지하 던전에 있는 창고 는 다른 영지의 보물 창고에 비 해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다들 그냥 용병들 아니었나요? 어떻게 그렇게 부자

가 된 거지? 전부 마나 사용자인 파티이긴 하지만. 아,제이 마법 사님 덕분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니콜라 스는 곧 제이크를 보며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제이크가 벌인 일 덕분 에 아스굴론 영지에서는 제이크 의 위치가 대마도사에 지지 않을 정도였다.

니콜라스의 모습에 슬며시 미소 를 짓던 앰버가 조심스럽게 주의 를 주었다.

"아시겠지만 비밀로 해 주세요.

지금도 꽤 말이 나오는 모양인 데,더 소문에 휩싸이면 안 될 것 같아요."

그 말에 기사단장이 고개를 끄 덕였다.

루이와 제시카가 아무리 활약을 했다 하더라도 그 둘은 결국 용 병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레이첼이 정식으 로 임시 영주가 된 뒤에도 둘을 계속 옆에 두는 것 때문에 큰 용 병대에서 불만이 나오고 있었다.

물론,마법사인 제이크에게는 뭐라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

고,제시카와 루이 앞에서 말하 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이 상황 에서 굳이 분란이 일어날 만한 소문을 퍼뜨릴 이유는 없었다.

니콜라스와 앰버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날,레이첼은 오랜만에 제이크에게 한소리를 들으며 계약서 에 사인을 했다.

이후 합자 회사 퀸비는 투자금 을 만들기 위해 가지고 있던 고 대 금화와 액세서리 아이템,그

리고 제이크가 만든 마법 아이템 과 포션을 시중에 풀기 시작했다.

갑자기 등장한 각종 마법 물품 에 영지에 만들어진 시장이 들썩 였고,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하 나둘씩 새로운 영지로 몰려들었다.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새로운 마법 물품과 특이한 마법사 소식 에 영지로 찾아온 마탑의 마법사 들도 있었고, 뜻밖의 소식과 도 움을 청하기 위해 먼 거리를 찾 아온 자도 있었다.

"새로운 연금술사일까요?"

"글쎄다. 탑에 있는 연금술사도 이곳에서 만들어진 포션은 처음 봤다고 하던데."

스승과 제자로 보이는 늙은 마 법사와 젊은 마법사가 한창 집들 이 세워지고 있는 영지의 대로를 걷고 있었다.

대로는 사람들과 장사꾼들이 섞 여 무척이나 혼잡해 보였지만, 다들 표정들이 나쁘지 않았다.

"이상하게 분위기가 활기차네요. 어차피 올 겨울을 버티지 못 할 텐데."

"그런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이런 외각 영지에서 하 루하루 치열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거기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겨울이 오기 전에 다들 떠나겠 지."

"아무튼 신기하네요. 다른 영지 들은 내전 소식에 모두 우울한 표정이던데,이곳만 이렇게 밝은 표정들이니."

"뭐,이번 황제가 영 아니라는

이야기가 많긴 한데,우리가 그 걸 걱정할 이유는 없고. 우선 이 포션을 만든 자를 찾는 게 먼저 야."

두 마법사는 그런 이야기를 나 누며 소란스러운 거리를 뚫고 앞 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그들의 모습이 대로에서 사라지자,남몰래 두 마법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남자가 높이 솟아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

"설마 같은 마법사인가? 그건 그렇고,페이샤 이 녀석은 제대

로 보고도 안 하고 직접 찾아오 게 만들어?"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던 남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빼죽한 귀를 모자로 가리고,소식 없는 동료 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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