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어두운 밤.
어느새 거리의 모든 집들이 굳게 닫힌 레이첼 성에 적막이 감돌았다.
낮에 이 새로운 영지를 방문한
음유 시인 베른은 영주와의 인연 으로 성의 접객실에서 머무르는 중이었다.
성의 영주인 레이첼 루테리아 남 작은 무척 바빠 보였음에도 그의 접견을 허락해 주었다.
영주는 오랜만에 만나는 음유 시 인의 노래와 이야기를 듣고 싶어 서였겠지만,그가 영주를 만나는 이유는 전혀 달랐다.
이윽고 밤이 깊어졌다.
성의 작은 접객실에서 그는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냐아옹-
방에 나 있는 창문턱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뒤,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열린 창 안으로 슬쩍 들어 왔다.
자기 방같이 편하게 움직이던 고 양이는 침대 위에 올라가 누워 버 렸다.
냐아아옹.
"아예 고양이가 된 거냐?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귀여운 고양이를 보고도 음유 시 인은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그의 말에 고양이는 새침한 표정 을 짓는 듯하더니,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휘리릭.
얼마 지나지 않아,침대 위에는 고양이가 아니라 엣된 소녀 한 명 이 누워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정말,너무 오래 고양이 상태로 있었나 봐요. 이 몸이 더 불편하 네."
고양이족 소녀 페이샤는 몸을 쭉 펴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베른의 입에서는 무심한 질책이 흘러나왔다.
"왜 그동안 소식 하나 없었던 거 냐. 위험하지 않은 것 같다고 보 고를 했으면 바로 돌아오든가. 아 니면 다시 보고를 했어야지."
"위험하지 않은 건 맞긴 한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생 각했어요."
그동안 제이크가 벌인 일을 떠올 린 페이샤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하 여튼 이번 일을 끝내고 제대로 보 고받을 거니까 도망칠 생각은 하 지 마."
페이샤는 베른의 말에 어깨를 으 쏙였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왔지만,이 제 말할 때가 온 모양이었다.
'이제 휴가가 끝난 거네.'
나름 친하게 된 인간들이었기에 자신은 괜찮았지만,부활한 고대 마법사를 종족들이 어떻게 받아들 일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외진 곳까 지 온 거예요? 나보러 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페이샤의 물음에 베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디스트로이어가 등장했어. 한 마리뿐이지만 성장형이라, 연맹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어."
"네? 디스트로이어라뇨? 그거 마 도 제국 멸망 때 나타났다는 놈들 말이에요?"
"뭐,그 뒤로 수백 년 간격으로 한두 마리 발견되고 그랬긴 했었 지. 어쨌거나 호족의 장로님들과 전사들이 나서서 추적중이다."
뜻밖의 소식에 놀란 페이샤였지 만,그녀는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이 영지에 온 것과 무슨 상관이에요?"
"문제는 장로님과 전사들에게 쫒 긴 디스트로이어가 대수림을 관통 해서 루테리아 영지와 이 영지 경 계에 있는 대수림 던전에 숨어들 어 갔어."
페이샤는 베른의 말에 경악한 표 정이 되었다.
대수림을 관통한 괴물을 쫓았다 는 것은 장로와 전사들도 대수림 을 관통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녀 자신도 대수림을 넘기 는 했지만,괴물을 추격하면서 대 수림을 넘다니.
새삼 전사의 터프함에 질릴 지경
이었다.
"아무래도 이쪽 던전은 인간들의 지원이 필요해서 말이야. 대수림 을 넘는 바람에 여러 가지 부족한 게 많으니까."
"그럼 루테리아 영지에 이야기하 는 게 좋지 않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사실.
루테리아 공작가는 아인족들과 작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페이샤의 물음에 베른은 고개를 저었다.
"루테리아 공작이 죽는 바람에
도움받을 사람이 없어졌어. 그쪽 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나서 루테리아의 새 영주에게 가 봤는데,전 혀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이더군."
루테리아 공작이 갑자기 죽어 버 리는 바람에,공작가에서 아인족 에 대해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 게 되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이곳에 온 거야. 이제 막 시작하는 영지라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네가 같이 있었으니 아는 것 좀 이야기해 봐."
"뭘 알고 싶은데요?"
"영주의 성격이나 실력,그리고 던전을 탐사하는 데 도움이 될 만 한 사람 같은 거."
"흠,그 정도야 뭐. 우선 이곳 영 주는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고양 이도 좋아해서 가끔 영주 집무실 에 놀러가기도 해요. 그리고 기사 로서도 꽤 실력이 있고. 음,음, 정말 멋진 분이에요."
뭔가 소녀 팬 같은 페이샤의 모 습에 베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잠깐 봤을 때도 꽤 사람 좋아 보이긴 했지만,너무…… 아
무튼 계속 이야기해 봐."
"그리고,실력 있는 용병들은 딱 정해져 있죠. 이곳에 마나 사용자 들로 이루어진 제국 최고의 용병 파티가 있어요. 베른 오빠도 알걸요?"
페이샤의 말에 그는 레이첼 여남 작과 같이 있던 용병들이 생각났다.
"여자 도적하고 기사 같아 보이 던 용병하고,음,마법 아이템을 가지고 있던 용병. 이렇게 파티였 지? 그 마법 아이템 가진 용병을 확인해 보라고 내가 널 보냈잖
아."
또다시 페이샤의 농땡이가 생각 나 베른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페이샤는 날름 혀를 내 밀었다.
"어차피 내일 영주님을 만난다면 서요? 영주님한테 잘 말하면 다들 도와줄 거예요."
영주와 만날 때 어차피 제이크 마법사와 같이 만날 테니,잘 하 면 그동안의 일을 따로 설명할 필 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아,맞다. 말할 때 현혹술 쓰지 마세요. 들킬 거니까."
페이샤의 말에 베른은 눈살을 찌 푸렸다.
현혹술은 오랜 세월 들킨 적이 없는 일족의 기술이었다.
물론 대단한 마법사나 기사에게 는 잘 걸리지 않았지만,그렇다고 해서 들켰던 적은 이제껏 없었기 에 페이샤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뭐,안 믿는 것 같지만 난 말했 어요. 그리고 감시하라고 한 용병 은 마법 아이템을 쓰는 용병이 아 니라 마법사예요. 내일 보시면 알 테지만 미리 말했어요,난."
거기까지 말한 페이샤는 휘리릭 다시 고양이로 변해 창문 위로 뛰 어 올라갔다.
-그럼 힘내고요,나중에 봐요.
바로 창문 밖으로 사라지는 페이 샤의 모습에 베른은 한숨을 내쉬 었다.
"도대체 모든 게 다 제 맘대로군. 고양이족은 정말 감당이 안 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여우족 음 유 시인은 좀 더 조심해서 현혹술 을 쓰기로 다짐했다.
다음 날.
영주와 만난 자리에서 그는 페이 샤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제대로 후회했다.
"처음 한 번은 봐주었지만,두 번은 안 됩니다. 더구나 공적인 자리에서 현혹술이라니. 다른 마 법사라면 즉결 처형될 일입니다."
영주와 함께 있던 마법사가 그가 펼친 현혹술을 단번에 깨 버린 것 이다.
영주와의 접견은 꽤 괜찮은 분위 기로 시작했었다.
영주인 레이첼 여남작 이외에도 마법사 복장을 한 남자가 같이 그 를 맞이했다.
페이샤의 말대로,그녀가 감시하 기로 한 용병이 마법사 로브를 입 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페이샤에게 들은 말을 떠올 린 그는 영주에게 인사를 하면서 더욱 조심스럽게 현혹술을 펼쳤다.
하지만 그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그가 펼친 현혹술이 박살이 나고
말았다.
더구나 마법사가 펼친 마법은 현 혹술뿐만 아니라 그의 원래 모습 을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게 만들 었던 환상술마저 부숴 버렸다.
원래의 여우족 모습이 들통 나 버린 베른은 그만 인사를 하던 모 습으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젠장,정말 마법사가 맞잖아? 근데 현혹술을 깨다니,이 마법사 는 도대체 뭐야! 아니,페이샤는 왜 제대로 설명도 안 한 거야!'
속으로 비명을 질러 대는 베른이 었다.
그런데 정작 영주인 레이첼 여남 작은 화를 내지도 않고 신기하다 는 표정으로 잔털이 달린 베른의 긴 귀를 바라보았다.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진짜로 본 건 처 음이에요. 잠깐 만져 보면 안 되 겠죠?"
훌륭한 기사이자 영주이긴 했지 만,그녀도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젊은 여성이었다.
귀를 향해 손을 움찔거리는 그녀 의 모습에 베른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제이에게 그대의 정체를 미리 들었었어요. 그래서 모습을 숨길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 었죠. 다만,그 현혹술이라는 건 사람 감정을 좌우할 수 있으니 웬 만하면 쓰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녀의 말에 베른은 더욱 표정이 어두워졌다.
영주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정 체가 들켰던 모양이었다.
'아니,그럼 페이샤도 들킨 건 가?'
페이샤의 변신술은 자신의 현혹 술과 차이가 나는 기술이었지만,
이렇게 한 방에 현혹술과 환상술 을 깨 버리는 마법사라면 그녀가 들키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페이샤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영주의 말이 아니더라도 베른으 로서는 지금 현혹술을 쓰고 싶어 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도망을 쳐야 할 텐
그렇게 생각한 베른이었지만,사 실 눈앞의 마법사를 피해 달아날 수 있을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찾아오
신 거죠? 상황을 보니 제가 생각 했던 음유 시인으로서 온 것은 아 닌 것 같은데요."
다행히 영주의 반응이 긍정적으 로 보이자,베른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이야기를 들은 후 처분할 지도 모르겠지만,말을 꺼내기는 오히려 쉬워졌다.
"하아,정신을 못 차리겠군요. 다 시 소개하겠습니다. 전 아인족의 일원인 여우족 베른이라고 합니다."
물론 원래 이름이 있긴 하지만,
인간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다.
"원래 루테리아 영지에서는 이 부분에서 설명이 길어졌는데,따 로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오빠에 게 다녀왔나 보네요. 그럼 영지에 도움이 필요한…… 대수림 일이겠 군요."
레이첼 영주의 말에 베른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성격이 좋고,기사로서도 훌륭하 다는 말을 들었는데,그것 말고도 머리도 좋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여자가 마나도 각성하고
임시이긴 하지만,영주 자리까지 얻었으니 보통 사람일 리가 없었다.
"휴…… 그럼 계속 말씀드리겠습 니다."
그는 페이샤에게 이야기한 내용 을 다시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나름 인간들의 수준에 맞게 설명 을 한다고 해도,두 사람은 너무 쉽게 알아듣는 듯해 베른은 속으 로 감탄했다.
더구나 영주와 달리,마법사는 그의 설명에 크게 놀란 모습이었다.
"디스트로이어? 설마 괴물이 등 장했다는 겁니까?"
"어,설마 아십니까?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내용일 텐데?"
"지금 나올 리가 없는데. 아직 시간이 있을 텐데. 왜 나온 거 지?"
뭔가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마법 사의 말을 듣던 베른은 차츰 머릿 속에서 떠오른 의문들이 하나둘씩 연결되는 걸 느꼈다.
처음 마법사를 보았을 때 느껴졌 던 공포.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페이샤의
반응과 자신의 기술을 한 방에 깨 트린 상대의 마법.
그는 공포를 느꼈을 때 처음 떠 올린 늙은 장로의 말을 다시 떠올 렸다.
'옛날,마도 제국 시절에 존재했 던 진짜 마법사들은 정말로 무시 무시한 존재였지……
베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마법사 제이크를 향해 더듬 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서. 설마,마도 시대 때의 마법
사…… 그러니까,진짜 마법사입 니까?"
그의 질문에 고민에 잠겨 있던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마도 시대의 마 법을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제이크의 대답에 베른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우족은 마법 실험용으로는 그 리 좋지 않습니다. 고양이족을 추 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