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잠시 헛소리를 하던 베른은 금 방 정신을 차렸다.
눈알이 사방으로 움직이는 게 아직도 도망갈 구멍을 찾는 것 같았지만,그래도 대화는 가능해
보였다.
제이크는 그런 베른에게 자신이 마법사가 된 과정을 이야기해 주 었다.
던전 탐사 중에 마법사용 에고 아이템을 얻은 이야기.
그리고 그 에고 아이템에게 마 법을 배워 고대 마법의 후계자가 된 것 정도였다.
마법사가 되기까지 그밖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그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모두 할 이유는 없었다.
제이크의 이야기를 들은 뒤 사
방으로 움직이던 베른의 눈이 차 분히 가라앉았다.
"그럼,과거 마도 시대의 마법 사는 아니군요."
"네,확인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마법을 익히기 전까지 저는 평범 한 용병이었습니다. 그 시절의 마법만 얻게 되었을 뿐,고대 마 법사들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 습니다."
제이크는 베른이 무엇을 걱정하 는지 파티마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기에,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 다행이긴 한데……
하지만 베른으로서는 고대 마법 사의 후예라는 자를 바로 믿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페이샤가 이 마법사 옆에서 계속 멀쩡히 돌아 다니고 있었네……
위험해 보였으면 바로 와서 알 려 줬을 테고,들켜서 당했다면 저렇게 멀쩡히 다니지도 못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눈앞의 마법사를 조금
은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 각을 한 베른이 슬쩍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베른은 이들의 옆에 붙어 있어 야 한다는 페이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페이샤 이놈을..
이런 이야기를 하나도 하지 않 고 날름 도망가 버린 페이샤에게 다시 한번 이를 간 베른이었다.
"제가 어떻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겠군요. 당신에 대한 일은 따로 윗분들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저도 언 제고 당신들과 이야기를 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고대 마법사의 후예로서,그리 고 세상의 멸망을 아는 자로서 제이크는 이들, 아인족들과는 잘 풀어 가야 했다.
페이샤라는 아군을 만들어 놓기 도 했지만,이렇게 찾아온 기회 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럼,다시 본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레이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죄송합니다. 영주님이 옆에 계신데……
"괜찮아요. 여태 제이에게 혼나 고 있었거든요. 서류 보기가 얼 마나 지겨웠다고요. 덕분에 살았 어요."
홍차를 홀짝이며 꺼낸 영주의 농담에 제이크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중학교 과외 수준인데…… 그 것도 어려웠었나?'
생각해 보니 레이첼은 기사 출 신. 즉,체육계였다. 당연히 어려
울 수밖에 없었다.
제이크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 안,레이첼과 베른이 지원에 대 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확히 원하는 지원이 어떤 거 죠?"
"식량과 포션,그리고 던전 탐 사를 도와줄 인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희들에 대해 비밀 을 지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물론,그녀가 비밀을 지키지 않 는다고 해도 아인족들이 숨기로 작정한다면 찾기는 거의 불가능 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제약을 거는 이유는 만약의 경우도 생각해서 였다.
'아,한 명은 쉽겠군.'
베른은 고민에 잠겨 있는 제이크를 힐끗 쳐다보았다.
레이첼은 베른의 이야기를 듣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저희에게는 뭘 주실 거 죠?"
"저희는 던전에 있는 유물은 필 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디스트로 이어를 제거한 뒤에 던전은 모두 레이첼 영주님의 소유가 될 겁니
다."
나름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곁다리 지원으로 던전 하나를 꿀 꺽할 수 있다는 기회였으니 말이다.
다만,레이첼은 바로 자신이 결 정하지 않고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우리 서기관님은 어떻게 생각 하세요?"
뜻밖의 호칭에 어리둥절한 베른 을 향해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저도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 각합니다. 하지만,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특히 그 디스트로이어라는 몬스 터에 대해서……
제이크의 말에 베른이 설명을 시작했다.
다행히 접견은 긍정적인 결과로 끝이 났다.
아스굴론 영지는 최대한 아인족 들을 지원하는 대신에,던전에서 나오는 유물과 던전 소유권을 가 지기로 했다.
한 해 동안 다섯 개 이상의 던 전을 찾아야 하는 영지로서는 난 데없이 굴러들어 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베른도 아스굴론 영지의 전폭적 인 지원에 만족했지만,또 다른 일 때문에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는 급하다면서도 출발을 이틀 뒤로 미루었다.
물론 여러 핑계를 댔지만,실제 로는 한 가지 문제 때문이었다.
접견이 끝난 뒤,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는 침대 위에 늘어져
있는 고양이를 보자마자 가지고 있던 만돌라를 던져 버렸다.
쾅!
냐아옹!
고양이는 사뿐하게 만돌라를 피 했고,만돌라는 침대에 부딪쳐서 망가져 버렸다.
냐옹-
-이거 아끼던 거잖아요. 이렇게 함부로 다뤄도 되나요?
"지금 만돌라가 문제야? 너 때 문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당연히 놀랄 거라고 생각했기에
고양이 페이샤는 미안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마법사라고 말도 해 주고,위 험하지 않다고도 했고,혹시나 싶어서 계속 감시도 했는데 뭐가 문제예요?
"그걸 말이라고 해! 저 마도 시 대 때 마법사인 걸 말했어야지!"
-오,정말 고대 마법사였어요? 물어본 적이 없어서 정확하게는 몰랐어요.
물론,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그 가 고대 마법사라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던 그녀
였다.
단지 마음에 드는 인간들과 같 이 지내는 것이 좋아,신경 쓰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으,내가 말을 말아야지. 아무 튼 네 문제는 나중에 처리하고, 우선 급하게 대수림에 다녀와 라."
-엑! 대수림엔 왜요!
"장로님께 연락해야 해. 편지를 줄 테니 답 받아서 와."
-대수림은 위험한데…….
"잘만 넘어온 녀석이 뭔 소리를 하는지. 그리고 안쪽 깊숙한 곳
까지 가지 않아도 돼. 변신 상태 로는 금방 다녀올 수 있잖아. 위 치 알려 줄 테니까 바로 다녀 와."
-쳇,그동안 편했는데. 투덜거리는 페이샤를 무시하고,
그가 급하게 글을 적었다.
"전처럼 목걸이 형식으로 둘러 줄까?"
쪽지를 접어 든 그의 말에 고양 이는 한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 에 걸린 작은 펜던트를 두드렸다.
슈욱-
그러자 바로 펜던트 앞에 작은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그녀가 목에 걸고 있는 펜던트 는 제이크가 만들어 준,일종의 마법 가방이었다.
펜던트 형태라 많은 물건을 넣 을 수 없었지만,변신 때 따로 물건을 가지고 다니기 어려운 페 이샤에게는 꼭 필요한 마법 아이 템이 었다.
-그런 구시대적인 방식을 쓸 생각을 하다니. 그러지 말고,여 기다 넣어요.
페이샤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베른은 쪽지를 구멍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쪽지를 삼킨 구멍이 다 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잠시 뒤,페이샤는 성을 빠져 나갔다.
[고양이가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대수림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던전 중앙 홀을 울리는 파티마
의 음성에,제이크가 하던 작업 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뭐,페이샤라면 별문제 없겠지. 근데 그녀가 대수림으로 간 건 아무래도 나 때문이겠지?"
[아인족들 입장에서는 당연합니다. 노예로 살아온 그들에게는 고대 마법사의 등장이 제일 중요 한 것이겠죠.]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 는데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군."
[뭐, 오랜 시간이 지나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군요. 본성대로
라면 수긍하고 순종하든가 숨어 버릴 텐데.]
"아니면,날 죽이기 위해 몰려 들지도……
[글쎄요. 그런 바보짓을 할 거 라고 보지는 않지만……. 게다가 이 성 안에서는 무리일 것 같은 데요.]
파티마의 말에 제이크는 홀 중 앙에 떠 있는 반투명한 여성체를 바라보았다.
이 던전의 에고인 빈 크루가 홀 중앙에 눈을 감은 채 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은 전과 또
달라져 있었다.
상체는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 았지만,하체는 이제 온전히 사 람의 두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 하체에 있었던 굵은 기둥 은 꼬리 같은 작은 줄 모양으로 가늘어져,엉덩이에서부터 바닥 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체의 형태도 반투명한 모습이 라 그런지 신비롭게 보일 뿐이었다.
제이크도 이 성 안에서는 안전 할 거라는 파티마의 말에 동의했
다.
자신과 빈 크루가 있는 한,이 던전과 레이첼 성은 난공불락에 가까웠다.
과거 저택에 만들어 놓았던 함 정과 마법진은 이미 몇 배나 강 력한 것으로 성과 던전에 구축해 놓았고,빈 크루의 던전 제어 실 력은 이미 파티마를 넘어서고 있 었다.
추가로 몬스터를 일부 제어할 수 있는 빈 크루의 능력은 성을 공격한 적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제시카나 레이첼도 모르 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다.
이 레이첼 성도 점차로 던전의 일부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빈 크루 대신에 던전을 관리하 고 있는 파티마가 페이샤의 음직 임을 알아차린 것도 바로 그 때 문이었다.
"그보다 교육은 잘 되고 있어?"
[휴우,마치 바닥없는 항아리 같은데요. 교육을 하는 게 아니 라 정보가 빨려 나가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제이크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지금 파티마가 빈 크루 대신에 던전을 관리하고 있는 것도,빈 크루가 눈을 감고 던전 중앙에 떠 있는 것도,모두 빈 크루의 속성 교육 때문이었다.
원래 에고 아이템은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여러 주인을 거치 면서 성장을 했다.
파티마가 여러 마법을 알고 제이크를 마법사로 키울 수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고,레이첼의 검이 그녀를 기사로 각성시킨 것 도 오랜 세월 동안 성장한 덕분
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던전 에고로 각성한 빈 크루도 원래라면 그런 식으로 성장할 터였다.
하지만 제이크가 그런 평범한 성장을 하게 놔둘 리가 없었다.
"공부도 속성,에고 아이템도 속성,스파르타식 교육을 하면 돼!"
제이크는 에고 아이템끼리 대화 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을 착안해 서 파티마에게 빈 크루의 교육을
지시했다.
그래서 파티마는 던전의 관리까 지 담당하느라 배로 힘을 들여야 만 했고,빈 크루는 파티마의 지 식을 게걸스럽게 빨아먹었다.
지금도 그녀는 메시지 마법으로 계속해서 빈 크루에게 교육을 해 야 했기에,제이크에게 던전 관 리 음성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파티마와 말을 하는 사 이에,제이크의 작업도 끝이 났다.
"오케이,완성!"
제이크는 작업을 끝낸 망토를 보며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끝났네요.]
"흐흐,나에게 재단사의 재능도 있는 게 아닐까?"
[그럴 리가요. 한 달 넘게 망토 하나 가지고 끙끙거렸으면 저주 받은 실력으로 보아도 될 거에요.]
"반쯤 망가진 남의 마법 아이템 을 나한테 맞게 고치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
[그 점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 하고,며칠 만에 마나를 재조정
한 것은 정말 칭찬할 만했어요.]
"암,그렇지."
[하지만,그 며칠 뒤 이후로 망 토를 가지고 한 작업은 전부 평 범한 가위질과 바느질뿐이었다는 것이 문제죠.]
파티마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결국 제이크는 말을 돌리고 말았다.
"완성되었으니 한번 입어 볼까?"
제이크는 망토를 몸에 두르고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흠,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
군."
[당연하죠. 이래 봬도 온갖 마 법 처리를 한 망토라고요. 주인 님의 허접한 마법 아이템에 비할 바가 아니에요.]
아무래도 어린 에고 아이템 교 육에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날카로운 파티마의 음성에 제이크는 머리만 긁적였다.
"뭐,어차피 다른 마법들은 부 차적인 거니까."
[체온 유지,내구성 유지,마력 활성화 등이 부차적인 마법에 불 과한 거죠.]
"그 마법들도 뛰어나지만,그래 도 그 폭발에서 마도사를 살아남 게 만든 망토야. 이정도 튼튼한 방어구는 갑옷형에도 없어."
그의 말대로 지금 제이크가 걸 친 망토는 얼마 전 그와 싸운 마 도사가 입고 있던 망토였다.
그 당시에는 마도사의 마법 덕 분인 줄 알았지만,죽은 마도사 를 뒤져보니 반쯤 불타 버린 망 토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도사의 방어 마법도 대단하기 는 했지만,대부분의 폭발은 망 토가 막아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망토도 망가지 고 말았지만,지금 제이크의 뛰 어난(?) 재단사의 능력으로 망토 가 복원이 된 것이다.
"자,그럼 이제 괴물 놈을 만나 러 가 볼까."
이제는 어떻게 지금 세상을 멸 망시켰던 괴물이 등장했는지 확 인해 볼 때였다.
그리고,이틀 뒤.
고양이 페이샤가 성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