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그날, 제이크는 탑주의 제자인 제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이크는 마법사에게 구해져서 탑에서 생활하게 된 제노의 어린 시절과 마법사들 내에서 차별화
되고 계급화된 탑의 현실을 듣게 되었고.
제노는 제이크가 포션만 만들 줄 아는 고대 마법사가 아니라, 고대 마법의 모든 것을 이은 후 계자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
제노는 그 사실을 단번에 받아 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제이크는 자신의 실력을 온전히 보여 주었다.
제이크가 그에게 사실을 털어놓 은 건 제노도 자신의 편으로 끌 어들이기 위함이었다.
대기 중의 마나를 끌어당길 수
있는 마나를 가지고 마법을 시전 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로 제한 없이 자 유롭게 마법을 사용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모두 그의 앞에서 보여 준 것이다.
제노 마법사는 제이크의 마법 시전을 넋을 놓고 관람한 뒤에 제이크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단지 천 년 만에 나타난 고대 마법사라는 것 때문이 아니라, 부조리한 마탑을 개혁하고자 하 는 제노를 제대로 이해하고 지원 하고 싶어 하는 고대 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제노와 제이크는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 뒤에 나이와 상관없이 빠 르게 친해졌다.
정신 연령이 높은 제이크였기에 중년인 제노와 말을 하기가 어렵 지 않았다.
게다가,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덕분에 과격한 제노의 사상을 받 아들이기가 더더욱 수월했다.
"아직은 같은 생각을 가진 젊은 하급 마법사들과 몰래 모임을 가 지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룹별 로 서로 떨어뜨려 놔서 모든 인
원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요."
앰버를 주기 위해 꺼낸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제노가 자랑 하듯 떠들었다.
'하위 조직 속에 몰래 점조직을 만들었고……
"거기다 후원하는 상인들에게도 따로 선을 넣어 두었습니다. 아 직은 불만을 이야기하는 정도이 지만 그래도 많은 호응이 있었습 니다."
'자금을 지원받을 세력도 만들 어 놓고 있고……
"탑에 들어오는 신입 수습 마법
사를 담당하는 마법사들도 전부 우리 쪽 마법사들로 채워 넣었지요."
'신규 인원까지 준비를 끝냈군.' 제노의 말을 듣자니,전생에 보 았던 수많은 성공한 혁명들이 떠 올랐다.
'이렇게 준비하고 있었으니 반 란을 일으켰을 때 기존 세력이 대항도 못하고 무너진 거겠지.'
마나가 있는 이 세상은 원래 전 생과 달리 신분과 계급이 더욱 단단했었다.
권력은 마나를 이용한 실재 힘
에서 나왔고,마나를 다루지 못 한 자들은 마나를 다루는 자들에 게 지배를 받아 왔었다.
하지만,시간이 지나자 이 세상 도 그런 규칙이 허물어졌다.
귀족 작위는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자식에게도 계승되었고,마 법사는 부모가 마법사인 자나 귀 족의 자식에게 우선적으로 기회 가 내려졌다.
거기다,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 는 자신의 실력을 더 높일 생각 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억압 함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굳힐 뿐
이었다.
어린 시절 마탑에 팔려 온 제노 도 탑주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자를 수발하는 처지에서 벗 어날 수가 없었다.
"특히 장로라는 자들이 문제입 니다. 마법 각인 작업을 독점해 서 자기들 마음대로 계급을 만들 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제노가 분통을 터뜨렸다.
지금의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할 때 서클에 새겨진 마법만을 사용 할 수 있었다.
서클이란 마법사가 성장할 때마 다 늘어나는 마나의 나이테 같은 것으로,새로운 서클이 만들어질 때마다 스승이나 선배 마법사들 이 서클에 상위 마법을 새겨 넣 었다.
그 작업을 마법 각인 작업이라 부르는데,마탑에서는 장로들이 그 작업을 독점한 것이다.
그렇게 비밀을 공유한 어린 친 구에게 속에 있는 말을 모두 토 해 낸 제노는 그대로 바닥에 쓰 러져 잠들고 말았다.
때문에 제이크와 앰버는 둘이
알아서 일 층의 숙소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숙소에 도착한 뒤에도 앰버는 자신의 방으로 가지 않고 제이크 의 설명을 듣기를 원했다.
"뭔가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설명해 줄래요?"
아무래도 술김에 다 털어 놓은 제노가 문제였다.
앰버가 있어,처음에는 메시지 마법으로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 이었다.
하지만 앰버와 함께 와인을 마
시다 보니,취한 제노가 그만 메 시지 마법 대신에 소리 내어 속 에 담긴 이야기를 쏟아 낸 것이다.
물론 제이크가 제지를 하지 않 아 안심하고 말을 한 것이겠지 만,앰버에게는 꽤나 충격적인 말들이었다.
제자가 스승의 자리를 빼앗고, 마탑 안에서 세력을 만들어 혁명 을 일으키고,외부 세력과 손을 잡고.
기존 체계를 뒤엎는 제노의 방 식은 신분제 속에 살아왔던 귀족
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 었다.
그리고 신분제가 없는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제이크도 제노의 방식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반란을 성공시킨 미래를 알지 못했다면 제이크도 그와 손을 잡 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렇게 그가 마탑을 차지 한 뒤에 내전에 휩싸인 제국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다 들 중립을 지키지 않은 그를 욕 했지만,그 뒤에 일어난 괴물들 의 침공 때 백색의 마탑이 중심
이 되어 안 통하는 마법을 이용 해서 끝까지 괴물들을 막아 냈지요."
허울 좋은 중립은 평화의 시절 에나 쓸모 있는 이야기였다.
단지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면 제이크도 생 각을 달리했겠지만, 지금의 제노 는 불평등한 마탑을 제대로 돌려 놓겠다는 꿈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말을 멈추고 잠시 자신의 생각 을 정리하던 제이크는 결국 허탈 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상을 가지고 움직이는 제노와 달리,자신은 단지 그를 하나의 말로 생각할 뿐이었다.
말로는 그의 이상과 혁명에 동 의하고 협력한다고 했지만,실제 로 그의 생각은 대륙 반대편에 자신의 세력을 심어 놓고자 한 일이었다.
괴물을 상대하기 위함도 아니 고,어차피 일어날 반란을 당겨 황제를 견제하기 위한 또 하나의 변수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이런 생각은 동료에게 도 말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는 거네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긴 한데. 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 은 방법이네요."
제이크의 이야기를 들은 앰버는 억지로 수긍하는 듯했다.
"그럼 할 일은 다 끝난 건가요?"
"네,포션 제조법을 넘기고 유 물도 받기로 했으니 마법진이 다 시 가동되기만 기다리면 될 겁니다."
"와,그럼 휴가인가요?"
마법진이 가동되려면 적어도 2,
3일은 필요한 모양이었다.
제이크가 나선다면 반으로 시간 을 줄일 수 있겠지만,반쪽짜리 고대 마법사는 그냥 휴식을 취하 는 게 정답이었다.
"그럼,내일은 관광을 나가 보 는 게 어때요? 기껏 대륙 반대편 에 날아왔는데 여태 탑 밖을 한 번도 보지 못했잖아요."
앰버의 말에 제이크도 바로 동 의했다.
복제 세상에서 이곳 브리티 왕 국에 온 적이 있었던 제이크였지 만,그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이미 괴물에 의해 대륙이 엉망이 된 뒤였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브리티 왕 국의 아름답다 유명한 건물들도 제이크가 왔을 때는 대부분 무너 져 있었다.
그때 멀쩡한 건물들을 볼 수 없 어 무척이나 아쉬웠는데,이렇게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두 사람은 다음 날 일찍 탑 밖 으로 나왔다.
두 사람 옆에는 제노 마법사가 붙여 준 안내자가 입을 댓 발로 내민 채로 서 있었다.
"아니,하루 만에 어떻게 제노 님을 꼬신 겁니까? 동료로 생각 하라니,전부터 제노 마법사님과 알고 있었던 겁니까?"
일행을 안내할 안내자는 제이크 와 앰버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자신들을 이곳 마탑까지 데리고 온 제자 쪽 마법사,반센 이었다.
반센이 갑작스러운 전개에 어리 둥절하는 동안 제이크도 제노 쪽
세력의 크기에 놀라고 있었다.
표본으로 하기에는 너무 작은 숫자였지만,그래도 자신들을 이 곳에 데려온 마법사가 제노의 동 료라니.
제노의 말과 다르게,그의 세력 은 작은 숫자가 아닌 듯했다.
밖에서 본 마탑의 모습은 거대 한 백색의 기둥 같았다.
그 거대한 모습에 앰버는 입이 벌어진 것도 모르고 탑을 올려다
봤지만,제이크는 좀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분필을 수천 배 수만 배 키운 것 같네.'
이 대형 분필보다 훨씬 멋진 건 물들을 전생에 지겹게 본 제이크 였다.
이 시대에 이런 거대한 건물을 올린 것이 대단하기는 해도,앰 버처럼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백탑은 브리티 왕국의 수도인 사우스 스톤 북쪽에 우뚝 서 있 었다.
왕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 리 잡고 있는 마탑은 사우스 스 톤 시민들의 자랑이자 브리티 왕 실의 두통거리였다.
마탑에서 나온 세 사람은 바로 왕궁 앞 대로에 있는 귀족 거리 로 향했다.
세 사람 모두 마법사 복장을 하 고 있어서 평민들이 머무는 곳에 가기는 무리였다.
어느 나라건 마법사는 준귀족 취급이 었다.
용병들이 바글거리는 루테리아 영지나 아스굴론은 그렇게 눈에
띄게 차별하지는 않았지만,다른 영지에서는 마법사들도 평민들이 사는 곳에 웬만해서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오늘따라 귀족 거리마 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축제 때인가요?"
"아닙니다. 봄 축제는 이미 끝 났는데……
"그럼,무슨 일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앰버의 물음에 반센은 어깨를 으쏙였다.
아무래도 반센을 안내로 붙여
준 것은 대실패인 것 같았다. 어제 같이 공간 이동으로 날아 온 반센이었다.
거기다 이곳에 도착한 뒤에 바 로 실험실로 뛰어들어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하니…….
반센이 아는 것은 앰버나 제이크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때 였다.
멀리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로에 몰려다니던 사람들도 급 하게 길의 양쪽 가장자리로 몸을 피했다.
"저기 온다!"
잠시 뒤,근처 귀족 집 저택의 지붕 위에서 한 소년이 외치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의 모습이 보 이기 시작했다.
번쩍이는 판금 갑옷을 입고 말 에는 긴 랜스를 매달아 놓은 기 사들의 모습은 멀리 떨어진 이곳 에서 봐도 무척이나 멋있게 보였다.
"와! 저12 기사단이다!"
"못된 놈들을 다 죽이고 돌아오 세요!"
"사랑해요! 레타니아 땅을 남에
게 넘겨주면 죽을 줄 알아요!" 기사들이 대로를 지나가는 동 안,지켜보는 사람들 입에서 별 의별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행진하는 기사들 중 일 부의 말고삐는 종자들이 잡고 가 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하인들이 줄지 어 따라가고 있었다.
기사들의 행진에 사용인들이 같 이 움직이니 폼이 나지는 않았지 만,그로 인해 제이크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 나라는 기사 대부분이 귀족 이거나 귀족의 자식들이었다.
그동안 일상생활을 하인들에게 맡겨 온 그들이었기에, 전쟁을 떠나면서도 행동 양식은 그리 달 라질 게 없었다.
"아,레타티아 왕국으로 향하는 병사들의 출정식이 있는 날이었 군요."
제국의 황제가 왕국을 버려두고 제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레타니아 왕국은 황제가 떠남으 로 무주공산이 되어 버렸고,맛 있는 먹잇감으로 전락한 레티니
아를 치려고 주위 나라들이 병사 들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계획대로 세상이 움직이 기 시작한 것이다.
브리티 왕국도 그런 생각에 한 숟가락을 걸칠 생각이었다.
그런 기사들을 보며 나지막히 혀를 차는 반센이었지만,제이크 는 기사들 대신 뒤따라오는 하인 들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앰버,데려갈 사람이 하나 생 각났어요."
마탑 일 때문에 까맣게 잊어버 리고 있었는데, 기사들의 행진을
보고 제이크는 복제 세상의 일을 떠올렸다.
그가 떠올린 사람은 폐허가 된 이곳 사우스 스톤에 왔을 때 만 났던 사람이었다.
폐허가 된 도시 안에 머물면서 도 많은 사람들을 도왔던 어느 귀족 집안의 늙은 집사장.
그는 제이크가 평생을 살면서 봐 왔던 집사 중에 가장 뛰어난 집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