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제국 동부의 심장.
동부 물류의 집산지인 라를란은 혼란으로 뒤덮여 있었다.
며칠 전,수만의 제국군이 도시 를 포위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숨을 죽이고 있었던 제국군이었다.
그 탓에 반란군들도 긴장이 풀려 내부 정리만 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그 순간 제국군은 전격 적으로 군대를 몰고 나와 프랑코 백작의 영지를 공격했다.
서부의 반란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프랑코 백작의 반란 군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거기다 전과 싸웠던 제국군과 황 제의 제국군은 전혀 다른 군대 같
았다.
제국군은 막아서는 반란군을 그 대로 뭉개고 반란군의 세력 안으 로 밀고 들어갔다.
엄청난 속도에 반란군의 세력은 갈가리 찢겨 나가고 말았다.
그에 프랑코 백작은 하는 수 없 이 자신의 영지와 휘하 귀족들을 데리고 영지 깊숙한 곳으로 물러 나야만 했다.
그렇게 귀족들이 버린 영지들은 차례로 제국군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고립된 일부 영지와 도 시 중에는 결사 항전을 외치는 곳
도 있었다.
제이크 일행이 도착한 라를란이 그런 도시 중 하나였다.
제이크 일행은 도시의 중심가에 있는 실버 드래곤 상단의 본점 이 층에 모여 있었다.
"선배! 무슨 생각으로 마법을 수 락한 겁니까? 탑에서 알면 금제를 당한 채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반센의 말에 뚱뚱한 마법사이자 이 지점의 지점장인 제플린은 수 건으로 목 뒤의 땀을 닦아 냈다.
"하하,설마 그 정도까지 하려 고."
그러나 말과 달리 제플린은 무척 이나 걱정이 되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가 벌을 받게 되는 것은 제이크나 앰버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우선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 나 들어 보죠."
설명을 기다리다 못해 제이크가 앞으로 나섰다.
"미안들 하이,난 마탑의 마법사 들만 넘어올 줄 알았는데……
제이크 일행들에게 사과를 한 마
법사가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라플란 시 백색 마탑 지점은 오 래전부터 상당히 큰 상단을 운영 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상단에서 일 하고 있었고,그중에서 제플린 마 법사는 꽤나 이름 있고 주변에서 존경을 받는 상단주였다.
"아,상단주가 마법사인 상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어요."
앰버의 말에 제플린은 자랑스러 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죠. 바로 이 상단이 내 두
번째 인생입니다."
마탑의 지점을 위장하기 위해 하 던 일이 오히려 마법사의 평생 직 업이 된 듯했다.
"전에도 말했지만,일을 너무 거 창하게 벌였다고요."
"그래도 수익이 쏠쏠하니까 탑에 서도 꽤나 좋아했잖아."
반센과 제플린 마법사는 상당한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포위당한 상 황이면 마탑으로 탈출했어야죠."
반센의 말에 제플린은 난처한 표 정을 지었다.
"난…… 상단 사람들이나 친우들 을 버리고 갈 수는 없었어."
그 말에 반센은 황당하다는 표정 을 지었다.
제플린은 마법사보다 상단주로서 의 삶을 택한 것이었다.
"으이구,이 사실을 알면 탑주나 장로들이 가만히 안 있을 거에요."
"뭐,지점이 불탄 뒤에는 오랫동 안 잠수하고 있으려고."
"그래서,왜 우리를 이리로 넘어 오게 한 거죠?"
제이크의 물음에 제플린은 창밖
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혼란스러운 거리의 모 습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조심스럽 게 상단을 향해 오고 있는 사람들 이 보였다.
모두 그가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제플린 상단 가족은 오늘 밤 도시를 탈출할 생각입니다. 탈 출할 때,여러분들이 도와주셨으 면 합니다."
마법사의 말에 모두 고개를 갸웃 거렸다.
"탈출은 오히려 위험하지 않나요? 그냥 싸움이 끝날 때까지 조 용히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모두가 의아해하던 부분에 대해 앰버가 대표로 질문을 던지자,제 플린이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먼저 점령당한 도시나 영지 쪽 에서 흉흉한 소문이 들려오고 있 습니다. 제국군이 학살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네? 설마 그럴 리가……. 전쟁 중에 있는 헛소문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그런
소문이 도는데 이곳에서 마냥 버 티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제플린이 굳은 표정으로 단호하 게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난폭한 황제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꽤나 높았다.
"근데 탈출에 성공했다고 하더라 도 어디로 갈 겁니까,선배? 지금 같은 때에 갈 만한 곳이 있어요?"
반센의 물음에 제플린이 바로 대 답했다.
"루테리아 영지로 갈 생각이야. 황제의 손길도 잘 닿지 않고,용
병으로 숨어 지낼 수도 있으니 까."
그런 제플린의 말에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루테리아는 안 돼요."
"무슨 소리야."
"우리가 왜 이곳으로 공간 이동 을 한 건데요."
반센은 놀란 제플린에게 오전에 벌어진 일을 설명해 주었다.
반센의 말을 들은 제플린은 얼굴 색이 창백해졌다.
"맙소사. 그럼 어쩌지?"
루테리아로 갈 수 없다면 탈출해
도 방법이 없었다.
근처 영지는 앞으로도 황제의 군 대가 계속 주둔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얼어붙은 북쪽 영지로 향할 수도 없었고,황도를 넘어 서쪽으로 향할 수도 없었다.
그때,막막한 표정이 된 제플린 의 귀로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럼,아스굴론으로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이크의 말에 제플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지었다.
"아스굴론? 아,버려진 영지를
다시 개척한다는 그곳?"
"맞습니다. 루테리아 영지 아래 에 있는 신생 영지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가려는 곳입니다."
"거기는 위험할 텐데……
제플린은 별로 내키는 표정이 아 니었다.
"아,그럼 되겠네. 거기 나름 괜 찮아요. 겨울에 몬스터 웨이브 있 기 전까지는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반센마저 아스굴론을 추 천하자,제플린이 무슨 말이냐며 반센을 쳐다봤다.
그에 반센은 얼마 전 자신이 본
아스굴론 영지의 모습을 설명해 주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들은 제플린 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상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지만,우선 아스굴론으로 가도록 해야겠군요."
그는 목적지를 아스굴론 영지로 잡은 뒤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럼,여러분은 저희들의 탈출 을 도와주시는 겁니까?"
"우선 어떻게 탈출할 건지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제이크의 말에 제플린은 잠시 고
민을 했다.
하지만,이미 탈출한다는 이야기 를 꺼내 놓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더 숨길 것도 없었다.
"밤에 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밀 수업자의 땅굴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갈 겁니다. 사람들이 많아 들키 지 않으려면 여러분의 도움이 필 요합니다."
나름 잘 준비한 제플린이었다.
제이크는 일행을 돌아본 뒤,그 의 말에 대답을 해 주었다.
"알겠습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제플린은 환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제이크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제이크는 품에서 용병패를 꺼내 들었다.
"계약서를 쓰죠. 그리고 저희 용 병대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제이크가 환하게 웃었다.
그날 밤.
상단의 창고로 모인 사람들의 숫 자는 제플린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다.
상단의 가족을 모두 모아도 백 명이 겨우 넘을 숫자였는데,이곳 에 모인 사람은 삼백 명 가까이 되어 보였다.
아이들도 백 명에 가까워서,주 위가 조용할 리 없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많이 모일 줄은 몰랐습니다."
제플린은 제이크 일행에게 사과 했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요."
제이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 꾸했다.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탈출하는 사람들이 자신들만 쏙 빠져나올 리가 없었다.
그들은 가족과 친우에게 이야기 했을 테고,그들의 말에 사람들이 따라나섰을 게 분명했다.
수많은 환난을 겪었던 제이크가 볼 때,참으로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 일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냈다.
창고 밖.
수백의 군사들이 조용히 창고를 포위하는 중이었다.
제플린 상회의 탈출은 해가 지기 전에 시에 발각된 상황이었다.
탈출을 거절했던 사람 중에,시 에 고자질을 한 사람이 있었던 것 이다.
당연히 라플란 시장은 모두 잡아 들이라고 명령했다.
제국군이 시를 포위하고 있는데 자기들끼리 탈출이라니.
내부의 단합을 위해서라도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시장의 명령으로,기사가 이끄는 병사들이 제플린 상회로 출동했 고,
지금 이렇게 제플린 상회의 창고 를 조용히 포위하고 있었다.
그때,창고 문틈으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기침 소리.
모두 억눌린 목소리들이었지만, 병사들의 귀에는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멍청한 도망자들 같으니라고."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기사
는 창고에서 흘러나는 소리에 눈 살을 찌푸렸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이 안 걸릴 거라 생각하다니."
물론 기사도 도망치려는 사람들 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그도 성을 에워싼 제국군을 보고 있으면 달아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료들과 가족들을 놔두 고 달아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눈앞에 있는 바보 같은 도망자들을 놓아 줄 수
없었다.
그는 병사들이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한 뒤에 명령을 내렸다.
"진입! 최대한 조용히 끝낸다. 웬만하면 살상을 자제해라!"
이들은 도망자들이었지만,민간 인들에 불과했다.
필요하다면 죽여야겠지만,웬만 하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먼저 기사가 소리 없이 창고 문 으로 달려가,검으로 문을 베어 버렸다.
마나가 실린 검이 문을 반으로 가르자,그는 창고 안으로 뛰어들
었다.
병사들도 그를 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창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기 맞아?" 기사는 잠깐 창고를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 만,곧 좀 전에 들은 소리를 생각 해 내고는 다급히 소리쳤다.
"함정이다. 다 나가!"
그 순간.
창고 바닥에 새겨진 거대한 마법 진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화악!
사람들이 모여 있는 창고의 창문 으로도 마법진의 빛이 은은하게 흘러들어 왔다.
그 빛을 보고 반센은 손을 내밀 었고,제플린은 우울한 얼굴로 반 센에게 은화를 건네주었다.
"역시 고발자가 나왔군요."
방금 펼쳐진 마법은 혹시 모를 고발자를 대비해 제이크가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다.
현혹 마법으로 비어 있는 옆 상 회를 제플린 상회와 바꿔 보이게
한 뒤,강력한 수면 마법진을 창 고 바닥에 새겨 놓은 것이다.
제이크의 마력으로는 낮에는 들 킬 확률이 높았지만,밤의 어둠은 현혹 마법의 낯설음을 충분히 가 려 주었다.
우울함도 잠시,제플린은 제이크 를 보며 놀람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어떤 계열의 마법사인 데 수면 마법진으로 그 많은 병사 를 재울 수 있는 거죠?"
많은 이들을 속이는 현혹 마법도 신기했지만,대단위 수면 마법은 더욱더 신기했다.
"고대 마법을 조금 익혔습니다. 그 덕에 반쪽짜리지만 몇 가지 고 대 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
제이크의 말에 제플린은 입을 딱 벌렸다.
"맙소사,어떻게 외부 마법사가 마탑의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나 했더니..
그제야 제이크가 어떻게 공간 이 동 마법진을 쓸 수 있는지 알게 된 제플린이었다.
그리고 제이크도 답답함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동안은 마법사 앞에서는 쉽게
마법을 쓰기가 곤란했던 제이크였다.
고대 마법사라는 것을 숨기기 위 해 마나 기술자와 비슷한 마법을 쓰거나,각종 핑계를 대야 했는데, 이제는 정식으로 고대 마법사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 속이 시원했다.
더구나 그 사실을 백색의 마탑에 서 인증을 받았으니,다른 마법사 들도 쉽게 딴지를 걸기가 어려웠다.
-하지만,반쪽이라고 뻥을 쳤잖 아요.
-반쪽이면 어때? 어디까지가 반 쪽인지 누가 알겠어. 쓰고 싶은 마법을 쓰고 아는 마법은 이것뿐 이라고 하면 알게 뭐야.
-와,사기꾼.
오랜만에 파티마의 핀잔을 들은 제이크였지만,발끈하지 않고 가 법게 홀려들었다.
상황이 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그럼 슬슬 움직이도록 하죠."
"사람들이 늘어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출발하자는 제이크의 말
에 제플린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늘어 준비해 놓은 물건 들이 부족해진 것이었다.
그들은 탈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그래서 제플린은 대략적인 인원 을 생각해 식량과 물품을 넉넉히 준비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더 많은 인원이 온 탓에 물건들이 모자랐다.
다행히 창고에는 물건들이 더 있
었지만,거기서 다시 물건을 챙기 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잠든 병사들을 찾기 위해 시에 서 병사들을 더 보낼 겁니다. 마 냥 지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그렇게 시간을 줄 수는 없었다.
재촉하는 제이크의 모습에 제플 린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알프렛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잠깐 지시를 해도 되겠습 니까?"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지 만,제이크는 반갑게 고개를 끄덕
였다.
"아,알프렛이 있었지! 그럼요, 부탁할게요."
제이크와 제플린의 허락이 있고 난 뒤.
창고 안에서 현란한 집사의 마술 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