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앤드류 루테리아 남작.
죽은 루테리아 공작의 사촌 동생 이자,가문의 총관 역할을 하던 남자다.
그런 그가 레이첼 영주 앞에서
울분을 토해 내고 있었다.
"새 영주가 죽을 때 여기서 무엇 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남매라면 그를 도와주었어야 했던 것 아닙 니까!"
레이첼에게 화를 내는 것 같았지 만,실제로 그의 분노는 어느 특 정인에게 있지 않았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더니 이제 는 형까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입니까!"
"공녀,나는…… 공작에 이어 첫 째 조카까지 잃었습니다. 그 꼴을 봤으면서도 죽어 가는 조카를 버
려두고 숨어 다녔단 말입니다
그는 이슈비 공자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실망 등이 마구 섞 여,횡설수설하며 화를 표출하고 있었다.
중구난방인 말 가운데에서도 레 이첼은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곧 바로 파악해 냈다.
얼마 전,루테리아 영지를 공격 한 이슈비가 형을 죽이고 영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남작은 겨우 이슈비 공자의 손을 피해,피난민들과 함께 아스굴론
영지로 도망쳤던 것이다.
레이첼은 남작이 울분을 토해 내 는 동안,조용히 앉아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무표정한 채였지만,그녀가 받은 충격도 작지 않은 듯 얼굴은 새하 얗게 질려 있었다.
"이제 레이첼,네가 마지막 남은 루테리아 영지의 후계자다. 반역 자 이슈비를 죽이고 영지를 되찾 아야 한다."
그렇게 한동안 속에 있던 분노를 모두 토해 놓은 남작은 이제는 집
안 어른의 입장으로 레이첼에게 말했다.
"공작도 죽고 새 영주도 죽었으 니 나도 더는 가문에 묶여 있을 생각이 없다."
말로는 후계자라고 이야기했지 만,남작은 끝까지 레이첼을 인정 하지 않았다.
그는 가문에 대가 끊어진 것으로 여기고 가문을 떠날 생각을 한 것 이었다.
"여기에는 보물 창고의 위치가 숨겨져 있다. 대를 이어 일종의 보물찾기용으로 써먹던 건데 네가
가져가라."
그는 레이첼에게 지도가 담긴 작 은 수첩을 건네주었다.
그는 창고의 위치를 제대로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레이첼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마 음과 그래도 알려 줘야 한다는 생 각이 충돌해,이 결과가 나온 모 양이었다.
그렇게 수첩을 건네준 그는 앰버 를 슬쩍 보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레이첼은 회의실을 떠나는 그를 잡지 않았다.
대신,앰버가 레이첼에게 달려갔다.
"레이첼!"
앰버는 레이첼 영주의 손을 꼭 잡고 안쓰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오랜 친구의 위로가 느껴지자, 레이첼의 굳은 얼굴이 조금씩 풀 렸다.
"다들 무사히 다녀왔군요."
잠시 슬픈 얼굴이 되었던 레이첼 이었지만,곧 그녀는 평상시의 얼 굴을 되찾았다.
"그래도 이제는 많이 괜찮아졌어요. 고마워요."
레이첼은 앰버의 손을 두드리며 안심시켰다.
영주가 되어 성장해서인지,아니 면 슬픔을 감추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굳건한 모습에 제이크는 안쓰러우면서도 뿌듯한 감정을 느꼈다.
한편,정신을 차린 레이첼은 앰 버와 제이크 이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뵙는 분이군요."
"알프렛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만남에도 알프렛은 정중히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의 침착하고 세련된 모습에 레 이첼이 조금 놀란 얼굴로 제이크 를 바라보았다.
"이분은 또 어떻게 같이 오게 되 셨나요?"
제이크는 그동안의 일을 최대한 간추려 설명했다.
"다행히 필요한 물건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만……
"루테리아에서 벌어진 일이 여러 분에게도 피해를 주었군요."
제플린 상단이 아스굴론으로 오 게 된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 이 된 것이었지만,그 말을 레이 첼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반가워요. 제이크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이니,저도 잘 부탁드릴 게요."
어딘가 오해를 살 만한 말에도 알프렛은 긴장한 기색 없이 무난 하게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여 남작 각하. 계속 업무를 보셔야 할 테니 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 겠습니다."
역시 물러날 때를 정확하게 파악 하는 알프렛이었다.
그의 말에 앰버가 몸을 일으켰다.
"제가 안내할게요."
두 사람이 같이 빠져나가자,회 의실에는 제이크와 레이첼만 남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신임 영주와 서기관 겸 참모의 회의 시간이었다.
"루테리아에서 벌어진 일을 자세 히 듣지는 못했죠?"
"네, 바로 이곳으로 오는 바람 에.."
레이첼은 긴 한숨과 함께 제이크 에게 루테리아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해 줬다.
물론 영주가 직접 설명할 일은 아니었지만,두 사람 사이에 그런 예절은 무의미했다.
일의 시작은 마법 상점의 여마법 사에게 들었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몰래 루테리아 시에 잠입했던 이 슈비 공자의 사병들은 새벽,사람 들이 막 잠에서 쩔 때 공격을 시 작했다.
그들은 성문을 장악해서 밖에서 기다리던 병력을 불러들였고,레 인저의 숙소와 대장벽을 지키는 병사들을 공격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병을 다 시 모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레이첼과 제이크는 이슈 비가 어디서 병력을 다시 모았는 지 알고 있었다.
히베루니아 왕국.
이슈비는 남쪽의 히베루니아 왕 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얼마 전 루테리아 성
을 잠입했을 때,왕국의 마법사를 고문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전투에 시는 엉망이 되어 버렸고,귀족 거리도 휩쓸리 는 바람에 루테리아 백색 마탑의 공간 이동 마법진을 담당하던 여 마법사가 탈출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제이크 일행은 많은 일을 겪고 겨우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편,한순간에 벌어진 일에 영 주의 병력은 대항도 못 하고 대부 분 죽거나 포로로 잡혀 버렸다.
이때 이슈비 공자의 사병은 바로
영주성으로 치고 들어갔다.
영주성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 어졌다.
하지만,성을 지키는 병력으로는 이슈비의 사병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얼마 뒤 영주성은 함락되어 버렸고,새 영주는 동생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설명이 끝난 뒤,잠시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설명을 끝낸 레이첼이 고민에 잠 겨 있는 동안,제이크는 조용히 기다려 줬다.
이윽고,레이첼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제이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다른 사람 앞에서는 결단력 있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레이첼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몇 달 동안 낙오되었을 때 생긴 유대감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제이크에게만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다.
"남작이 말한 것처럼 동생을 저 렇게 놔둘 수는 없어요. 이번에는 정당한 계승전도 아니었으니 그저
반란일 뿐이에요."
그녀 말대로였다.
이슈비 공자가 벌인 일은 제국 안에서는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 는 일이었다.
"하지만,그렇다고 우리가 공격 하기도 어려워요. 저희 영지도 이 제 막 개발되고 있고,제국은 내 전 중이라서……
물론 영주의 말도 맞긴 했지만, 제이크는 그녀 마음속의 갈등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미 가족 둘을 잃은 그녀였다.
동생에게 연을 끊었다고는 했지
만,마지막 남은 핏줄인 동생을 치기는 선량한 그녀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던 제이크가 입을 열 었다.
"영주님 말씀대로 우리 영지 문 제도 있고,이미 방비를 하는 영 지를 공격하기도 쉽지 않은 일입 니다."
제이크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다 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우리로서는 루테리아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단정적인 제이크의 말에 레이첼 은 의아해했다.
"내부를 안정시킨 뒤에 루테리아 가 우리를 그냥 놔둘 리도 없겠지 만,문제는 히베루니아 왕국입니다."
벌써 한 번 레이첼의 병력에 골 탕을 먹었던 히베루니아였다.
"루테리아가 안정되면 아스굴론 을 향해 위아래에서 동시에 공격 이 들어올 겁니다. 루테리아를 욕 심내고 있는 히베루니아가 우리 영지를 그냥 둘 리가 없습니다."
이슈비가 루테리아를 정리한 뒤
에는,아스굴론 영지는 루테리아 와 히베루니아 사이를 막는 장애 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없 는 반란이라는 방식으로 영지를 강탈한 것도 그 때문이겠죠."
"이슈비는 반란군이 될 생각인 걸까요?"
"반란군도 제국 안에서 이야기입 니다. 이슈비 공자는 아마도 히베 루니아 왕국의 귀족이 되고 싶은 듯합니다."
과연 황제가 루테리아 영지를 잃 은 채로 두고 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제이크의 말에 레이첼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제이크는 생각에 잠긴 레이첼에 게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바로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는 않 으리라.
하지만 다른 결정을 내리기도 힘 들었다.
그녀가 얼마나 영지민을 사랑하 는지,그리고 이 영지를 소중하게 여기는지 제이크는 잘 알고 있었다.
'레이첼 영주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루테리아 영지를 먹을 기회였다. 이 영지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 지만,황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 영지 하나로 만족할 수 없었다.
거기다 레이첼에게 한 말은 거짓 이 아니었다.
두 영지의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회의실을 나가서 창밖을 내다보 자,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보 였다.
루테리아에서 온 피난민들이었다.
계속된 내전으로 더는 버티지 못 한 피난민들이 이곳으로 몰려온 것이다.
덕분에 벌려 놓은 공사들이 빠르 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성 바깥쪽 거리를 감싸는 외성 벽이 벌써 반쯤 올라가고 있었고, 거리에는 제대로 된 집들이 점점 늘어나는 중이었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을 수 있다는 홍보가 점점 먹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미 반쯤 포기한 것인
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 영지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상당히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인 제국임에도 영지민들이 다른 영지 로 이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영지민은 영주의 소유물에 가까 웠고,그나마 이동이 가능한 사람 들은 상인이나 용병밖에는 없었다.
힘들어서 영지를 떠나는 사람들 도 있었지만,그들은 유민이 되어 산속에 숨어들거나,도적이 될 수
밖에는 없었다.
더구나 이 대수림 옆의 영지에서 는 더욱이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다음 날,바로 루테리아에서 전령이 찾아왔다.
"아스굴론 영주는 당장 영지민을 내놓아라. 이는 영지 간의 규약을 위반한 것이다. 일주일 안에 결과 를 내놓지 않으면 정당한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처음 보는 얼굴의 병사가 읽는 낭독문에 접견실에 모인 사람들은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폭도가 한 말은 그게 전부인 가?"
상석에 앉아 레이첼 영주가 담담 히 질문을 던졌다.
"폭도라니! 감히 임시 영주가 정 당한 영주님께 할 수 있는 소리인 가!"
아무래도 전령을 간이 제일 부은 사람으로 고른 모양이었다.
"죽이는 게 어떨까요."
"죽이는 건 심한 듯합니다. 손가 락이나 전부 잘라 버리는 게 어떨 지."
하지만,뒤에서 쑥덕거리는 사람
들의 말에 전령은 점점 말소리가 작아졌다.
"영,영주님이 대답을 받아 오라 고 하셨…… 하셨습니다."
전령의 말에 레이첼은 피식 웃으 며 대답을 들려주었다.
"너는 대답을 받아 갈 필요 없다. 나는 이미 결론을 내렸으니까. 이자를 가두어라!"
"넴!"
전령이 병사들에게 끌려가 사라 지자,레이첼 영주는 자리에서 일 어나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병사를 소집하고 용병을 모아
라! 우리는 반역도를 처리한다!" 아스굴론 영지가 영지전을 선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