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비밀 창고를 털린 이슈비의 분노 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 성 문을 닫아 놨으니 아직 빠져나가 지 못했을 거야. 양이 많아서 감
추지도 못할 테니 우선 집집마다 전부 뒤져!"
그로 인해 사람들이 시를 드나드 는 일은 전혀 불가능해졌고, 병사 들의 행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하지만,비밀 창고를 털어 간 범 인의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이틀이 지난 뒤,영지 입구를 지키는 전령이 급하게 달려왔다.
"영지 남쪽에서 군대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숫자는 팔백에서 천 정
도,반은 용병이고 반은 영지군으 로 보입니다."
전령의 말은 이슈비의 고함으로 소란스럽던 집무실 안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남쪽? 아스굴론인가?"
기사의 말에 이슈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누나가 먼저 칼을 뽑은 거 란 말이지?"
남쪽에서 올라오는 군대라면 새 로 만들어진 아스굴론 영지군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제 겨우 인정을
받은 신생 영지가 토벌군을 보낼 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에 모두 이해할 수 없 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다른 영지하고 합공하겠 다는 걸까요?"
"하지만,동쪽 방면은 조용합니다."
기사 한 명이 의견을 냈지만,그 의 말은 소식을 가져온 전령에 의 해 바로 부정됐다.
그때 였다.
"그쪽은 내전으로 몰려온 피난민 때문에 정신이 없을 겁니다. 이곳
을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마법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평상시에는 말이 없었던 흑마법 사였는데,따로 마탑을 통해 소식 을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단독으로 토벌을 보냈다 는 건가요?"
"그렇다면 우리가 너무 얕잡아 보인 모양이군요. 선전 포고도 하 지 않다니,그냥 폭도로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사의 말에 이슈비를 제외한 모 두가 피식 웃었다.
거기다,젊은 기사 로럴드가 새
로운 영주에 대해 험담을 늘어놨다.
"아스굴론 영주가 수완이 대단하 네요. 쫓겨난 황태자비라더니,아 직도 황제에게 청탁할 수 있는가 보군요. 여남작이란 작위에,영지 까지 받아 내다니."
하지만 그의 말은 이슈비를 건드 리고 말았다.
"흥,땅을 잃고 다른 나라로 도 망친 기사가 누굴 욕하고 있는 건 지. 어쩌다 보니 내가 누나와 싸 우게 되었지만,우리 가문은 네놈 한테 그런 욕을 들을 가문이 아니
다!"
이슈비의 말은 이번에는 로럴드 의 표정을 굳게 했다.
아버지와 형을 죽인 패륜아에게 나라를 버린 기사라는 소리를 듣 다니.
아직도 자신을 백작가의 후계자 라고 생각하는 로럴드에게는 충분 히 모욕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분을 참아 냈다.
제국에서 도망친 뒤,그는 온갖 수난을 겪었다.
처음 머물던 레타니아 왕국은 얼
마 지나지 않아 제국의 침공으로 엉망이 되고 말았고,그 탓에 레 타니아 왕국의 귀족들에게 상납했 던 돈들은 전부 의미를 잃어버렸다.
때문에 그는 가족을 이끌고 다시 히베루니아 왕국으로 이주를 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그를 따르던 사람들 은 모두 떠나 버렸다.
그에게 충성하던 기사들도,어머 니와 여동생을 보필하던 하녀들도 모두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났다.
히베루니아에 도착한 그에게는
그에게 손을 벌리고 있는 가족밖 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결국 앞날이 보이지 않게 된 그 는 가족을 내팽개치고,히베루니 아 왕국군에 투신했다.
성공한 뒤에 다시 찾겠다고 말을 했지만,그 약속이 지켜질 수 있 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실력 하나만은 자 신 있었다.
예상대로 로럴드는 왕국의 군벌 에 주목을 받게 되었고,이처럼 루테리아에 파견을 보내지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이곳 루테리아는 로럴드가 다시 날개를 펴게 될 곳 이자,마지막 기회의 땅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로럴드는 참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로럴드는 눈앞에 있는 귀족답지 않은 자를 단칼에 베어 버리고 싶 었지만,귀족답게 끝까지 참아 냈다.
이슈비는 허울뿐인 영주였지만, 이 작전을 끝낼 때까지 목숨을 붙 여 두어야 하는 자였다.
"그럼,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영 지로 더 들어오기 전에 막아설까
요? 아니면 계획대로 시에 방어선 을 칠까요?"
분위기가 험악해지자,중년의 기 사가 나서서 대화를 진행했다.
명목상으로 파견군의 대표는 로 럴드였지만, 실질적인 지휘권은 중년의 기사에게 있었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얼마 전에 귀순한 기사에게 실질적인 지휘권을 주는 나라는 없었다.
어차피 영주로 이슈비를 이용하 는 것처럼,로럴드도 백작의 후계 자라는 것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 할지도 몰랐다.
"계획대로 해. 어차피 싸움은 루테리아 시에서 결판이 날 게 뻔 해. 괜히 좋은 성을 놔두고 허허 벌판에서 상대할 이유가 없잖아."
"그럼,영지에 피해가 상당할 텐 데요."
기사의 말에 이슈비는 메마른 웃 음을 지었다.
"하하,날 놀리는 건가? 지금 이 영지에 남은 게 뭐가 있다고. 전 부 개판이 된 거 보면 몰라? 그 리고 우리는 어차피 시간만 벌면 되는 거잖아."
이슈비의 말을 듣고,로럴드는
속으로 다시 한번 그를 비웃었다. 분명 이슈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영주란 자가 할 소리 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기사는 담담한 얼굴로 이 슈비의 지시를 따랐다.
"알겠습니다. 그럼,방어 준비를 하겠습니다."
기사들은 차례로 이슈비에게 인 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로럴드도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 하고는 방을 나섰다.
"젠장! 이놈이나 저놈이나 날 가 짜 취급이나 하고!"
쾅!
모두가 나간 뒤,이슈비는 문을 향해 의자를 집어 던졌다.
히베루니아 왕국의 도움을 받아 영지를 차지하는 데에는 성공했지 만,여태껏 그는 제대로 영주 노 릇을 할 수 없었다.
부하의 반은 히베루니아 왕국의 병사들이었고,나머지 반은 그가 데리고 있던 용병들과 새로 모은 떨거지들이었다.
왕국의 병사들은 원래부터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용병과 부랑자 들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제멋
대로 날뛰었다.
거기다 그를 보호해 준답시고 붙 여 놓은 기사와 마법사는 사사건 건 그의 행동에 딴지를 걸었다.
그중에 제일 짜증 나는 놈이 방 금 나간 로럴드라는 놈이었다.
"제기랄! 반역자 놈이 어디서 귀 족행세야! 쓰레기라면 쓰레기답게 굴라고."
자리에 없는 사람에게 분노를 토 해 내던 그는 결국 지친 얼굴로 책상에 걸터앉았다.
"젠장,가문의 보물이나 챙겨 두 고,답이 안 나오면 몰래 잠적할
생각이었는데……
그도 이런 식으로 영지를 빼앗으 면 문제가 생길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황제가 이 영지를 계속 그냥 놔둘 리도 없었고,히베루니아 왕 국 놈들도 그가 잘되는 꼴을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망한 인생,한탕 하고 떠 나려고 했는데,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마지막 기회였는데……. 결국, 지옥 끝까지 가야 하는 건가."
그는 책상 너머의 집무실 의자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평생을 앉아 있던,그 리고 형이 앉아서 그의 검을 받아 냈던 의자.
아직도 피 묻은 흔적이 남아 있 는 의자는 마치 지옥으로 그를 부 르는 것 같았다.
"뭐,아버지를 죽인 뒤에 내 인 생은 다른 길은 없었던 거겠지."
그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책상 위에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래,어차피 갈 지옥이라면 모 두 같이 가는 거야. 마침 누나도 왔으니 모두 사이좋게 손잡고 멸
망하면 되겠지."
음침한 그의 웃음이 집무실 안을 계속 울렸다.
아스굴론의 영지병과 용병들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루테리아 영지를 가로질렀다.
영지를 엉망으로 만들던 반란군 들도 모두 루테리아 시로 철수하 자,영지군은 편하게 루테리아 시 로 향할 수 있었다.
"그래도 환대하는 분위기는 아니
군요."
니콜라스 부대장,아니 아스굴론 의 신임 기사단장은 우울한 얼굴 로 지나온 마을을 바라보았다.
이곳까지 지나온 마을은 모두 문 을 꼭꼭 닫고 병사들이 지나가기 만 바랐었다.
가끔 레이첼을 보고 반가운 얼굴 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그들도 곧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숨어들 뿐이었다.
"어쨌거나 우리 가족들 간의 싸 움으로 영지가 쑥밭이 된 것이니 까요. 영지를 지켜야 할 영주 가
족이 영지를 엉망으로 만들었으 니,저들이 저를 미워해도 어쩔 수 없죠."
"영주님의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루테리아 가문의 잘못이지요." 레이첼의 말에 다시 반박하려던
니콜라스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춰야 했다.
말과 달리 그녀의 표정은 무척이 나 담담해 보였다.
그녀의 모습에서 언제나 당당한 공작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니콜라스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루테리아 시도 영 엉망이었어요.
반은 제대로 된 병사였지만,반은 건달에 가까워서,치안을 잡는 게 아니라 더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 다니까요."
그러다 이어지는 제시카의 말에 니콜라스는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제시카는 니콜라스에게 씩 웃어 주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곳처럼 환영받지 못하 지는 않을 거예요. 어쩌면 꽤 성 대한 환영식이 될지도 몰라요."
제시카의 말에 니콜라스가 다시 질문했지만, 그녀는 무슨 이야기 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행 군하는 사이에,레이첼 영주가 슬 쩍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제이크 서기관이 너무 늦네요."
제시카가 돌아온 지도 꽤 지났는 데,제이크는 여태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영주의 말에 제시카가 고개를 갸 웃거렸다.
"영주님이 따로 시키신 것이 있 다던데요?"
"오래 걸리는 일이었으면,그냥
돌아와도 되었을 텐데. 괜히 지금 같은 때에 그런 부탁을 했나 모르 겠네요."
레이첼의 말에 제시카가 어깨를 으쏙했다.
"괜찮을 거예요. 제이크라면 시 키신 일 다 끝내 놓고 어디서 농 땡이 치고 있을지도 몰라요."
제시카의 말은 틀렸다.
제이크는 병사 옷을 걸친 채로 검을 질질 끌며 거리를 걷고 있는
중이었다.
며칠 동안 빨지 않아서 꾀죄죄한 옷은 마치 누더기처럼 보여,투구 와 검이 아니었으면 거지로 보일 지경이었다.
-거지 그 자체일지도 몰라요.
- 시끄러워.
-거리를 돌아다닌 게 벌써 3일 째잖아요. 잠은 빈집에 숨어들어 잤다지만 매일같이 이렇게 거리를 쏘다니니,거지라 불러도 할 말이 없다고요.
파티마의 푸념이 이어졌지만,제이크는 그저 뚜벅뚜벅 걸음을 이
어 갈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그는 한 골 목에서 걸음을 멈췄다.
평범하고 다른 골목과 전혀 차이 가 없는 골목이었다.
그곳에서 질질 끌고 다니던 검을 번쩍 치켜든 제이크의 표정은 무 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하아…… 다 그렸다!"
-에고,수고하셨어요.
파티마가 투덜거림을 멈추고 제이크를 축하했다.
그도 그럴 것이,3일 동안 그린 마법진을 결국 완성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병사로 위장 하고,지팡이 대신 병사의 검으로 마법진을 그리는 작업이 드디어 끝났다.
"힘들었다. 거의 모든 골목과 거 리를 다 잇느라 생고생이었어."
-대단하긴 대단한데,정말 이게 도움이 될까요?
"도움이 될 거야. 아니,도움이 되어야 해. 그동안 고생이 억울해 서도 도움이 되게 만들 거야."
-아,네……. 그러시군요. 뭐,다 행히 시간은 맞은 것 같네요.
땡, 땡,땡-
때마침,성 전체에 적을 알리는 타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레이첼의 영지군이 루테리아 시 에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