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던전 공략이 끝나고 두 달 뒤.
루테리아 영지보다 남쪽이라 그 런지,이곳 아스굴론 영지는 눈 대신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날짜로는 이미 겨울에 들
어서고 있는 시기.
나무들이 잎을 모두 떨어뜨리기 시작했고, 동물들도 모두 겨울잠 을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대수림의 몬스터들 은 대수림 밖으로 먹이를 찾아 움 직이기 시작했다.
아스굴론 영지의 동쪽 끝이자, 대수림이 시작되는 벌판에는 반쯤 만들어진 긴 성벽이 서 있었다.
모습은 꼭 루테리아의 대장벽을 따라 만든 것 같았지만,대장벽보 다는 높이도 낮고,튼튼해 보이지
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이 성벽은 원래 의 파괴된 장벽을 기초로 여름부 터 다시 만들기 시작한 장벽이었다.
하지만 대장벽처럼 만들기에는 시간과 사람이 부족해,겨울이 될 때까지 반도 만들지 못했다.
길이가 수천 걸음 이상이었음에 도,몬스터 웨이브가 밀려오는 영 역 전체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겨울이 시작되어 공사가 중단되자,하는 수 없이 병사들이 앞으로 나와 몬스터 웨
이브를 대비해야 했다.
그런 어수선한 성벽 위에서 앰버 와 니콜라스가 숲을 바라보며 이 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루테리아 쪽은 무사히 막을 수 있었나 봅니다."
니콜라스의 말에 앰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후가 달라서인지,다행스럽게 도 두 영지의 몬스터 웨이브는 동 시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아스굴론의 핵심 맴버 가 루테리아의 몬스터 웨이브 방
어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공간 이동 마법진 덕 분이었다.
"동시에 일어났으면 한쪽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정말 다행이에요."
앰버는 얼마 전 있었던 루테리아 의 방어전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 들었다.
루테리아에서 일어난 몬스터 웨 이브는 다행히 작년과 달리 평범 했다.
하지만 수많은 내전과 영지전으 로 엉망이 된 루테리아였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기 위한 병력 도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영지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용병들을 최대한 끌어모았지만, 작년 병력의 반도 되지 않았다.
루테리아로 넘어간 아스굴론의 핵심 맴버,제이크 파티와 앰버, 레이첼이 아니었으면 작년에 이어 대장벽이 또 무너졌을 게 분명했다.
어쨌든 루테리아의 몬스터 웨이 브는 무사히 넘어갔다.
그리고 이제는 아스굴론 차례였다.
성벽 위에 서서 걱정스럽게 대수 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모 두 이곳,아스굴론의 영지민들이 었다.
대부분이 용병들과 영지군,징집 병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들은 모 두 루테리아에서 온 사람들이었지 만,개중에는 다른 영지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반센과 제플린 상회의 사람 들이었다.
물론,그들의 가족들은 다른 영 지민들처럼 영주성 안으로 대피했
다.
하지만 상회의 건장한 청년들은 창과 쇠뇌를 들고 웨이브 방어에 참여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성 벽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막을 수 있을까요?"
니콜라스가 조금 걱정되는 표정 으로 성벽을 둘러보았다.
성벽은 몬스터가 쏟아져 나올 협 곡을 반도 막지 못한 상태였다. 몬스터들이 장벽을 피해 돌아가기 만 해도 영지가 쑥밭이 될 게 분 명했다.
그렇게 되면 1년 동안 일궈 놓 은 밀밭과 각종 목초지,영주성 밖에 있던 건물들은 멀쩡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남은 영지민들이 모두 영주성으로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영지민들은 영주성을 요정이 지 켜 준다고 믿고 있었다.
덕분에 가족을 영주성에 두고 온 병사들도 모두 가족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서기관님이 준비 중 이세요."
어느새 다가온 레이첼이 앰버 대 신에 니콜라스의 말에 대답했다.
그녀는 방금까지 병사들을 한 명 씩 살펴보고 오는 길이었다.
무척이나 귀찮고 힘든 일이었고, 영주의 품위와도 맞지 않는 일이 었다.
하지만 다른 영주들과 다른 그녀 의 행동에 영지병의 충성도는 하 늘을 찌르고 있었다.
레이첼의 말에 두 사람은 성벽 뒤쪽을 내려다보았다.
성벽 옆에서는 제이크가 한창 마 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전혀 알 수 없는 방 식으로 만들어진 데다 현대의 마 법사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마법진 이었다.
반센과 제플린은 마법진 옆에 딱 붙어서 마법진을 뜯어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앰버는 성벽 위 에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의 마법진만 보면 난리더니, 이제는 별로 관심이 없어졌나 봐?"
레이첼의 말에 앰버는 고개를 저 었다.
"관심이야 아직 많죠. 문제는 그 림의 떡이라."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앰버는 이제 제이크가 만든 마법진을 조 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아쉬움 은 더욱 커졌다.
제이크가 쓰는 마법이나 그가 만 드는 마법진은 서클에 새겨진 마 법을 사용하는 현대의 마법사는 절대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유물로 남겨진 마법진들 처럼 다른 마나 사용자들도 사용 할 수 있게 추가 작업을 해 놓는
다면 그녀도 사용할 수 있기야 하 겠지만,그녀 스스로가 마법진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저런 걸 만드려면 서클을 깨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어느 마법사가 자신의 서클을 쩔 수 있 겠어요."
앰버는 더욱 안타까운 얼굴로 마 법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마법사의 슬픔을 이해 못 한 두 기사는 그냥 제이크만 가능 한 마법진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대수림의 소란이 더욱 커졌다.
마지막 남은 활엽수의 이파리가 우수수 떨어졌고,나무들마저 휘 청거 렸다.
몬스터 웨이브가 다가오고 있다 는 징조였다.
레이첼은 마무리되고 있는 마법 진을 확인하고 성벽 옆 난간에 뛰 어 올라갔다.
한 마리 새가 어깨에 올려진 채 난간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전해 내려오는 초대 루테리아 공
작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앰버,부탁해."
레이첼의 말에,앰버가 확성 마 법을 펼쳤다.
동시에 마나가 성벽 위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레이첼이 입을 열자,모 두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영주 레이첼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이곳에서 우리는 아스굴 론 영지의 첫 몬스터 웨이브를 막
습니다."
그녀의 말에 긴장으로 병사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은 핍박을 피해,고난을 피해,전쟁을 피해, 여러 영지에서 이곳으로 왔을 겁 니다."
레이첼은 성벽 위에 병사들을 한 명씩 쳐다보았다.
"그런 이들을 오늘 다시 싸움에 휘말리게 했습니다. 아스굴론의 영주로서 모두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말과 함께 레이첼이 모두에게 고
개를 숙였고,병사들은 허겁지겁 그녀에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모두에게 사과한 그녀는 다시 목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 싸움은 과거의 싸움 과 다릅니다. 우리가 밟고 선 이 영지는 우리의 새로운 집이자,삶 의 터전이 될 곳입니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여기 서 있는 것입니다."
가슴을 찌르는 그녀의 말은 사람 들의 눈에 불이 들어오게 했다.
"여러분은 힘을 다해 몬스터와 적에게서 가족을 지키고,마을을
지키고,영지를 지켜 주십시오. 나 레이첼도 영주로서 목숨을 다해 여러분을 지킬 것입니다."
"이것이 영주 레이첼이 여러분에 게 드릴 수 있는 약속입니다!"
그녀의 말이 멈추자,성벽 위는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 듣는 영주의 사과 와 약속에 놀랐고,감격했다.
그들의 눈은 붉어져 있었고,심 장은 마구 뛰고 있었다.
레이첼은 마지막으로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녀의 마법검이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전원,전투 준비!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몬스터를 막고 아스굴론 영지의 깃발을 세운다!"
와아아아!
함성이 성벽을 넘어 대수림과 영 지 전체로 퍼져 나갔다.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 높이 치솟 아 오르는 것과 동시에 성벽이 열 기로 가득 찼다.
성벽 아래에서 그녀의 연설을 듣 고 있던 제이크도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정말 대단해. 천부적인 연설가 네."
-대단하네요. 영주 정도가 아니 라 왕이 하는 연설 같은데요. 그 런데 영주가 저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요?
제이크는 파티마의 말에 목을 긁 적였다.
"아무래도 나 때문이었나……
사실 그녀가 연설했던 내용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조금 위험한 말일 수도 있었다.
이 세상의 영지는 영주의 것이었 고,영지민은 영주의 소유물이었
다.
신분제가 확실하게 자리 잡은 이 곳에서 영지민을 가족이라고 부르 고 영주가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 하는 것은 이곳의 가치관과 상반 되는 발언이었다.
원래부터 영주민을 위하고 사랑 했던 레이첼이었다.
그녀는 영지민을 어떻게 다스리 겠다는 정확한 비전은 가지고 있 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여러 차례 제이크에 게 조언을 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이크는 복
제 세상의 일과 전생의 여러 정치 이야기를 포장해서 그녀에게 들려 줬었다.
물론,이런 세상에서 위험할 게 뻔한 현대적인 사상은 돌려 말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안에서 자신 의 맘에 드는 내용을 찾았던 모양 이었다.
"너무 진보적인데……
난감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던 제이크는 결국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누가 물어보면 영지민 사기를
올리기 위해 선동한 것으로 하 자."
레이첼은 당연히 진심이겠지만, 너무 앞서 나간 사상은 탄압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스굴론의 서기관으로서 조심해 야 하는 부분이었다.
제이크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털 어 버리고,바로 마법진을 가동했다.
그를 보고 있던 두 마법사는 마 법진이 어떻게 구동되는지 몰라 호기심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마 법사가 자신의 비밀을 쉽게 말할
리가 없었다.
-앰버에게는 죄다 알려 줬는데요.
또다시 파티마의 딴지가 들어왔 지만,늘 그래 왔듯이 제이크는 무시하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나여,거대한 관으로 내 집과 이곳을 연결해 그녀의 힘을 이곳 에 불러들여라. 던전 링크!"
제이크의 주문과 함께 마법진이 빛을 발했고,거대한 마나가 마법 진에 빨려 들어가 영주성 쪽으로 뻗어 가기 시작했다.
-그녀와 연결되었어요. 던전에서 도 시작합니다.
파티마의 말과 함께 영주성 방향 에서 강력한 마나가 느껴졌다.
마나는 제이크가 있는 성벽 쪽으 로 밀려왔고,두 마나가 중간에서 만나,하나로 묶어졌다.
그리고.
제이크 앞에 있는 마법진에서 반 투명한 요정이 뛰쳐나왔다.
[저 왔어요!]
이제 사람처럼 말을 하는 던전 에고,빈크루였다.
제이크가 마법을 시전하는 동안, 대수림 밖으로 몬스터들이 모습 을 보이기 시작했다.
영지에서 밀려났던 몬스터들과 대수림에 살고 있던 몬스터들이 모두 모습을 보였다.
몬스터들은 서로 싸우지도 않고 협곡 밖으로 내달렸다.
성벽 쪽으로 달려오는 몬스터들 도 많았지만,아직 성벽이 만들어 지지 않은 방향으로도 몬스터들이 달려갔다.
"제이! 서둘러요!"
성벽 위에서 앰버가 크게 소리쳤
고,제이크는 빈크루에게 명령했다.
"지금 시작해."
"네!"
반투명한 요정이 성벽 위로 치솟 아 올랐다.
갑자기 등장한 성의 요정에 병사 들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는 약과였다.
그 뒤에 벌어진 일에 그들의 얼 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요정은 성벽 위 허공에서 소리 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영 지를 향해 퍼져 달려가던 몬스터
들이 빈크루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이다.
그렇게 몬스터들이 전부 성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