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의 황도는 새로운 황제가 들어서고 두 번째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예년처럼 새해맞이 축제를 벌이 고는 있었지만,분위기는 암울했
다.
유랑 극단 앞에도 사람들은 모이 지 않았고,가판대 앞에도 썰렁했다.
새로운 황제가 들어선 뒤,황도 의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어두워 졌다.
계속되는 전쟁과 내전으로 사람 들이 지쳐 갔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몰 라 몸을 사렸고,일반 백성들은 궁핍해진 생활로 인해 축제를 즐 길 수 없었다.
더구나 유언비어들이 황도에 널 리 퍼져서,황제에 대한 불만은 조금씩 더 커져만 갔다.
황궁.
임페리얼 캐슬 안쪽 깊숙이 자리 한 황제의 집무실에서도 그 유언 비어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황제 폐하가 밤마다 여자를 바꿔 가며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게 황제 페 하께서 일부러 전쟁을 방조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전 황태자비를 내친 이유도 황 제폐하의 전횡을 반대하다가 그랬 다는..
젊은 황제 앞에서 소문을 늘어놓 던 신하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뒤로 갈수록 점점 심해지는 내용 때문이었다.
'왜 제대로 소문을 적어 온 거 야! 대충 포장해서 가져오면 안 돼? 그리고,왜 이걸 나한테 시킨 거야? 담당 관리는 어쩌고!'
얼마 전,소문을 대충 알아 온
일로 관리들 목이 다 날아가 버린 것을 알지 못하는 신하였다.
그는 식은땀을 가득 흘리며 황제 를 흠쳐봤지만,황제의 표정은 변 함이 없었다.
"악마가 변신해서 황제 흉내를 내고 있다,황제는 제국을 멸망시 킬 생각이다……
신하가 보고하는 내용은 지금 황 제가 보고 있는 보고서에 다 적혀 있었다.
차마 신하가 고하지 못한 부분은 과연 그럴 만한 내용이었다.
하지만,황제는 그리 틀린 내용
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복제 세상의 미래에서 벌어졌던 내용도 있었고,과장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의외로 정확했다.
"이번에는 꽤 내용이 충실하군. 수고했다. 물러가도 좋아."
신하는 죽었다가 살아난 표정으 로 급히 인사를 올리고 집무실에 서 물러났다.
방을 벗어나면서도 자신이 멀쩡 하게 집무실을 나올 수 있었던 이 유를 알 수가 없는 신하였다.
그가 빠져나가자,집무실에는 황 제와 대마도사만이 남게 되었다.
"황도의 분위기가 많이 안 좋습 니다."
"뭐,이 정도면 무난한 편이잖아. 전쟁에다가 내전까지 벌어진 상황 이니. 유언비어치고는 귀엽군."
복제 세상의 미래에서는 더한 욕 도 들은 황제였다.
물론 욕한 놈들은 모두 목을 날 려 버렸지만.
대마도사 아이힌테일은 황제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을 좋아하고 포악하고 자기 중심적인 황제였지만,이렇게 대 범할 때도 많이 있었다.
덕분에 아직도 장군이나 기사, 병사들은 황제를 열렬히 추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소문을 핑계로 황제를 자제시키는 것은 어려운 듯했다.
지난 여름 이후.
황제는 결국 프랑코 백작의 반란 을 모두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황제군은 기습으로 적 병력을 도 시와 성에 고립시켰고,그 뒤에 하나씩 점령해 갔다.
그 과정에서 평범한 영지전과 달
리,황제는 성과 도시에 사는 민 간인까지 모두 쓸어버렸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반란을 정리 할 수 있었지만,황제에 대한 공 포와 분노는 귀족과 제국인들 사 이에 점점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황제 폐하는 오히려 즐 기는 것 같으니……. 정말 이대로 제국이 망하는 것을 원하는 게 아 닐까?,
잠시 헛된 생각을 했던 아이힌테 일은 곧 그 생각을 털어 버렸다.
미래까지 보고 온 황제가 제국을 망가뜨릴 이유가 없었다.
4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
전대 황제와의 약속과 스스로 내 린 금제 탓에 그는 황제를 거역하 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힌테일은 애써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흠,한동안 쉬었으니,이제 슬슬 서쪽도 정리해 볼까."
마치 찌뿌둥한 몸을 풀 때가 되 었다는 듯한 황제의 말에 아이힌 테일이 깜짝 놀랐다.
"아직 반란군의 영지에 대한 정 리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군을 움
직이는 것은 날이 따뜻해진 다음 에 하는 것이.
하지만 그의 만류에도 황제는 들 은 척도 하지 않고,종을 흔들어 기사들을 부르려 했다.
마음이 급해진 아이힌테일은 때 마침 아침에 보고받았던 내용을 떠올리고는 다급히 외쳤다.
"아,폐하! 전에 말씀하신 디스 트로어인가…… 하는 검은 몬스터 가 히베루니아 왕국에 나타난 모 양입니다."
"뭐라고?"
그 말에 황제는 고개를 확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게 정말인가?"
예상보다 과격한 반응에 아이힌 테일은 얼떨떨했지만,좋은 기회 라 여기고 계속 설명했다.
"네,아침에 검은 마탑에서 패밀 리어가 날아왔습니다. 마탑이 있 는 도시에서 마법과 마나검이 잘 안 먹히는 검은 몬스터가 나타났 답니다."
패밀리어가 전해 준 내용에는 자 신들이 벌인 일은 쏙 빠져 있었다.
"그 뒤에 도시를 쏙대밭으로 만 들어 놔서,우선 탑을 버리고 대
피를 했다는데…… 아무래도 검은 마탑 놈들이 몬스터를 잘못 건드 린 모양입니다."
검은 마탑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보낸 정보였음에도 아이힌 테일은 사실을 정확히 짚어 냈다.
"대수림과 꽤 떨어진 곳이라 몬 스터가 몰려올 이유가 없지요. 한 데 이해가 안 가는 것은,검은 탑 놈들이 몬스터를 다루는 데 실패 했다는 겁니다. 실력이 떨어지는 녀석들은 아닌데 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이힌테 일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그동안은 눈엣가시였으니…… 흐
탑을 버리고 도망치는 마탑의 탑 주를 상상하니,대마도사도 나이 와 지위에 맞지 않게 기뻤던 것이다.
"정말 디스트로이어가 맞나 보 군. 그 괴물을 지금의 마법사들이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지. 근데 지 금 나올 리가 없는데. 역시 미래 와 완전히 달라진 건가……
하지만 황제는 심각한 표정이 되 었다.
복제 세상에서는 죽을 때까지 검
은 괴물,디스트로이어를 본 적이 없었던 황제였다.
그런 게 지금 나왔다니,정말 예 상치 못한 일이었다.
황제는 그동안의 계획을 완전히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표정을 굳히고 아이힌테일을 다그 쳤다.
"어떻게 생긴 놈인지 들었나? 한 종인가? 아니면 여러 종인가?"
그런 황제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 설었지만, 아이힌테일은 최대한 자신이 아는 내용을 황제에게 이 야기했다.
"한 종류이고,거대한 지네 형태 의 괴물이라고 합니다. 보고에 의 하면,몬스터가 알을 낳고,그 알 이 순식간에 부화해서 몬스터 수 가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합니다."
대마도사의 말에 황제는 몸을 뒤 로 젖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놈이 아니군. 그렇다면 주변 놈 이 흘러나온 건가."
"무슨 이야기이신지……
아이힌테일이 조심스럽게 물어봤 지만,황제는 자신의 말만 할 뿐 이었다.
"아쉽네. 내가 원하는 놈은 아냐.
그래도 살아 있는 놈이 나타났는 데 그냥 놔둘 수는 없지."
황제의 말에 아이힌테일의 얼굴 에 화색이 돌았다. 황제의 신경을 돌리는 데 성공한 것 같았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 았다.
"실물이 나왔는데,일을 질질 끌 수는 없지. 바로 나머지 반란군 놈들도 정리해야겠어. 그리고 마 탑에서 표본을 좀 가져와. 날아가 면 금방 갔다가 오겠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쉬운 표정이 된 아이힌테일이 입을 열었다.
"그럼,제가 직접 가야 할 듯합 니다. 검은 마탑의 탑주가 물러날 정도면,제 제자 녀석들로도 힘들 테니까요."
"그러려나? 흠,그래도 호위는 필요할 텐데……. 아! 그렇지. 호 위는 내 '전' 황태자비에게 부탁하 면 될 거야."
황제의 말에 대마도사는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지금쯤이면 몬스터 웨이브 결과 도 나왔겠지? 뭐,실패했으면 벌
로 호위를 하게 하고,성공했으면 루테리아 영지까지 인정해 주면서 호위를 하게 만들면 돼."
영지 인정 하나로 뿌리까지 우려 먹으려는 황제였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귀족들이 말이 많을 겁니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지 못했다면 영지를 내놓으라고 귀족들이 떠들 게 분명했고,막아 냈다면 루테리아 영지의 합병을 막기 위해 난리 칠 귀족들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호위를 핑계로 특
혜로 보이는 명을 내리면 더더욱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왜,황태자비는 훌륭하고 착하 다고 이미 소문이 나 있지 않나! 황제가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면 좋은 일이잖아."
이죽대는 황제의 말에 아이힌테 일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의 말대로라면,레이첼 여남 작에게는 엄청난 추문이 될 것이 었다.
지금도 그녀에 대해 말이 많은 데,이렇게 특혜가 계속되면 그녀 는 제국 어디에서도 얼굴도 들지
못할 게 분명했다.
물론 아이힌테일이 레이첼을 아 직까지도 일반 영애와 같게 생각 했기 때문이었다.
"던전 다섯 개를 일 년도 되지 않아서 찾아내고,거기다 내전으 로 망가진 루테리아까지 차지한 실력이니. 이 정도면 십중팔구 몬 스터 웨이브도 막아 내겠지?"
황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 나 즐거워 보였다.
"뭐,귀족 놈들이 뭐라 해도 그 녀가 루테리아를 다스리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
아. 그럼 일 하나 시키고 냉큼 주 는 게 좋지."
황제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욕도 겸사겸사 먹고." 역시,예상대로 좋은 뜻이 아니 었다.
"거기다 디스트로이어라면 호위 로 파견한 놈들이 몸 성하게 돌아 올 수 있을까 모르겠어. 흠,최정 예로 사람을 붙이라고 해야겠다."
황제의 말은 호위가 위기에 빠져 도 그냥 놔두라는 말과 같았다.
이어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
다.
"이번 생애는 역시 재미있어. 예 상치 못한 일이 자꾸 벌어지니까 심심하지를 않아. 이번에는 또 무 슨 일이 벌어지려나 모르겠군."
황제는 기사들을 불러 서쪽 반란 군을 향한 출진을 명령했다.
그사이 대마도사는 제자들과 함 께 비행 마법으로 제국 동부를 가 로질렀다.
중간에 거의 쉬지도 못하고 계속 비행 마법을 쓰는 바람에,제자들 은 아스굴론에 도착하자 거의 죽 기 직전까지 몰렸다.
덕분에 세 마법사는 역사상 가장 빠르게 제국 동부를 주파한 마법 사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물론,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었지만…….
아스굴론에 도착한 아이힌테일은 바로 영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두 제자들은 모두 객실에서 기절 해 버렸지만,그는 조금 지쳤을 뿐이 었다.
"황제 폐하의 말대로 무사히 막 아 낸 모양이군."
하늘에서 본 아스굴론 영지는 무
척이나 활기찬 모습이었다.
거기다,영주성 전체에 특이한 마나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신기하군. 이곳도 고대 유적 위 에 지어진 성인가? 아직 가동되고 있으려나? 좀 알아볼까?"
마법사로서 호기심이 불쑥 떠올 탔지만,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때 가 아니었다.
그는 젊은 집사의 안내를 따라 성의 회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회의실 앞에서 어디 선가 본 듯한 젊은 마법사와 마주 쳤다.
"흠. 우리가 어디서 봤던가?"
"네? 누구신지……. 높으신 마법 사님 같은데,저를 아시려고요."
천연덕스러운 그의 말에 아이힌 테일은 낮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나이가 든 모양이었다. 사람을 착각하다니,이런 추태가 없었다.
"미안하군. 어린 나이에 정식 마 법사인 것 같은데,앞으로가 기대 되는구먼. 나중에 제국 마탑으로 나를 한번 찾아오게나."
아이힌테일의 말에 젊은 마법사 는 머리를 깊게 숙이고는 복도로
물러섰다.
아이힌테일은 몰랐지만,물러서 는 마법사의 뒷머리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한편,대마도사는 집사가 열어 준 문 안으로 들어갔다.
"하하,오랜만이군요! 레이첼 여 남작!"
얼마 전 죽이기 위해 마법까지 날렸던 그가,지금은 레이첼과 반 갑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