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성벽 위로 올라가요!"
성문 가운데에서 포위를 당한 아 이힌테일 일행은 제시카의 말에 따라 우선 성벽 위로 피하기로 했다.
다행히 이 성은 성벽 위로 올라 가는 길이 성문과 가까웠다.
일행은 성벽을 등지고 몬스터와 싸우며 계속 움직였다.
확실히 대마도사의 마법은 대단 했다.
아이힌테일의 실드는 검은 지네 의 공격에도 굳건히 버텨주었다.
덕분에 일행은 주변 걱정을 할 필요 없이 앞으로 나아갈 길만 신 경 쓰면 됐다.
하지만 다른 마법사들의 공격 마 법은 검은 지네들에게 그리 효과 가 없었다.
화염 마법은 껍질에 검댕만 묻혔 고,마나 볼이나 다른 마법들도 작은 상처만 남길 뿐이었다.
그나마 이네트 신관의 축복을 받 은 검만이 지네의 껍질을 제대로 베어 낼 수 있었다.
아이힌테일 일행은 그렇게 치열 한 전투를 치르면서 겨우 성벽 위 로 올라설 수 있었다.
레이가 마지막에 서서 방패로 검 은 지네들을 밀어낸 덕분에,일행 은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아이힌테일은 일행이 모두 성벽 위로 올라서자 계단을 무너뜨렸
다.
지팡이로 바닥을 치자 움푹 꺼지 는 계단의 모습에 아스굴론 사람 들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대마도사님이라 가능한 겁니다. 이런 수준의 높은 마법은 서클에 새겨 넣기가 어려워서요."
사람들의 표정에 제자 한 명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일행이 놀란 이유는 계단 을 무너뜨린 마법 때문이 아니라, 아이힌테일이 주문도 하지 않고 마법을 쓰는 모습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마법사들도 한마디 이
상 주문을 외우지 않았지만,제이크는 전혀 달랐었다.
메모리 스펠로 저장해 놓은 마법 은 그도 주문 단어 하나로 시전이 가능했지만,평상시 사용하는 마 법은 주문이 무척이나 길었던 것 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짧으면 한 문장,길면 기도문 수 준이 되는 주문이었다.
그런 마법사만 옆에서 보다가, 주문도 말하지 않고 마법을 시전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다른 길도 모두 막아."
대마도사는 두 제자에게 성벽 위
로 올라오는 다른 층계도 막으라 고 지시했다.
다행히 성벽 위에는 지네들이 보 이지 않았다.
모두 성벽 아래에 버글거리는 모 양이었다.
'이곳을 본부로 삼고 상황을 살 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
몬스터가 와글거리는 도시에 머 무는 것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대로 물러나는 것도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쯧,마나를 걸고 약속하지만 않 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면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 후퇴하라고 지시를 내린 뒤,자신 은 날아서 마탑을 확인해 보면 그 만이었다.
괜한 제약 때문에 실드도 일행 전체를 감싸는 크기로 만들었어야 했던 대마도사는 무척이나 짜증이 나 있었다.
한편,스승의 지시에,두 마법사 는 하늘로 떠올라 성벽 위를 날기 시작했다.
두 사람 다 비행 마법 중에 화염 마법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는 실력이었다.
그리고 싸움터에 온 이후로는 실 드 마법도 항상 펼쳐 놓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갑작스러운 공 격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퍼퍼퍽!
실드 위로 무엇인가 충돌하는 소 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확 느껴지는 시큼한 냄 새.
"산성 액인가?"
실험실에서 항상 다루던 약품 냄 새에 고개를 돌린 마법사는 자신 을 향해 날아오는 액체 덩어리들
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비가 쏘아지는 듯 누군가 수십 개의 침을 동시에 뱉은 듯한 모습이었다.
"설마 이 높이까지 침을 쏠 수 있는 건가?"
미리 실드를 펼치지 않았다면 막 아 낼 수 없는 공격이었다.
거기다,문제는 공격이 끝이 없 다는 것이었다.
퍼퍼퍼퍽
"어,어어어? 설마 실드가 녹는 거야?"
마법사는 자신이 보는 광경을 믿
을 수가 없었다.
마나가 떨어져 실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강한 공격에 실드가 깨지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산성액에 실드가 녹고 있었다.
마법사는 급하게 위로 올라가려 고 했지만,실드가 깨지는 시간이 훨씬 빨랐다.
"크아아악!"
실드가 녹아 버린 마법사는 날아 오는 산성 침에 무방비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공격을 당한 마법사는 비행 마법
도 유지하지 못한 채 아래로 추락 했다.
안타깝게도 성벽 위쪽이 아니라 바닥 쪽으로 추락한 탓에 즉사하 고 말았다.
어찌 보면 다행인 일이었다.
산 채로 지네들에게 먹히는 경험 은 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다른 제자도 같은 공격을 당하고 아래로 추락했지만,그는 다행히 성벽 위로 추락했다.
떠 있던 높이가 그리 높지는 않 아서 다리 하나만 부러지는 정도 로 끝났지만,그는 그 사실도 알
지 못했다.
팔과 가슴에 맞은 산성 침이 옷 을 녹이는 것도 모자라,피부까지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쩔뚝이며 성벽 위를 달려갔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면 신 관과 포션이 있었다.
그곳까지만 가면 고통을 멈출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부러진 다리 로 열심히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일행이 있는 곳까지 가지 못했다.
성벽을 기어오른 검은 지네들이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이미 대마도사 일행은 지네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결국 구조 요청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지네들에게 뒤덮여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실드가 녹는 산성액이라니,나 도 처음 보는군. 아니지,이건 산 이 아니라 일종의 마법 액체인 가?"
제자의 실드가 뚫린 모습을 보고 몇 겹으로 실드를 친 아이힌테일 덕분에 일행은 산성 침 공격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실드 하나가 녹으면 곧바로 다시 실드를 쳐 버리는 아이힌테일의 마나양과 그 실력은 누가 봐도 대 단했다.
하지만 일행은 그에게 감사 인사 를 건넬 시간이 없었다.
성벽 위로 올라오는 검은 지네를 베어 내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대마도사 아이힌테일도 실드를 치는 와중에 틈틈이 마나탄을 쏘 아,검은 지네를 성벽 아래로 떨 궜다.
마법으로 죽이기는 어렵지만,밀 어내는 것은 별문제가 없었기 때
문이었다.
"뭐,일정 이상의 마력이면 저항 력을 뚫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천하의 대마도사라 도 금방 마력이 부족해질 게 분명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싸우던 이들은 어느 순간 주변에 살아 있는 지네 괴물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다 죽인 건가?"
"그럴 리가요."
니콜라스의 말에 고개를 저은 제시카가 성벽 난간에 붙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물러가는데요? 아니,다른 데로 몰려가는 건가?"
과연 그녀의 말대로 일행을 공격 하던 검은 지네들이 마탑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예 몸을 돌리고 달려가는 모습 이,싸움을 멈추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싸움터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한시름 놓았네요." 루이가 지친 얼굴로 말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방패를 들고 직접 검은 지네들과 몸싸움을 한
루이 였다.
수십 마리의 지네들을 한 번에 성벽 너머로 밀어 버리기도 한 그 였기에 체력 소모도 심했다.
당연하게도,알리바 사제도 자신 의 몫을 충분히 해냈다.
그는 이네트 앞에서 검은 지네의 공격을 전부 몸으로 막아 낸 것이다.
덕분에 이네트는 모두에게 계속 축복을 걸어 줄 수 있었고,일행 은 지속적으로 검은 지네들을 상 대할 수 있었다.
일행은 지친 얼굴로 대마도사를
바라봤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아이힌 테일은 어두운 얼굴로 마탑을 바 라봤다.
몬스터는 그의 예상보다 더 쓸 만했고,더 위험했다.
살아 있는 샘플로 연구해 보고 싶다는 마법사의 호기심이 더 꿈 틀거렸지만,두 제자가 한순간에 죽은 모습에 그는 호기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마나로 건 약속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 위험한 몬스터라면 흑마 법사가 아닌 이상 둥지까지 들어
갈 이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죽은 몬스터 하 나만 챙겨서 돌아가지."
그의 말에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크와 함께였다면 그를 믿고 말도 안 되는 짓을 해 볼 수 있겠 지만,아무리 대마도사라도 완전 히 믿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행이 안심하고 성벽 밖으로 뛰 어내릴 준비를 하는 동안,아이힌 테일은 마탑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내가 구하지 못하더라도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
까."
대마도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듯 마지막 말을 남기고 다른 일행과 함께 성벽을 뛰어내렸다.
성벽 밖에도 검은 지네들이 돌아 다니고 있었지만,따로 돌아다니 는 놈들은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마도사 일행은 따로 작 은 검은 지네 한 마리를 챙긴 뒤 도시에서 멀어졌다.
* * *
같은 시각.
제이크와 아인족들은 격전을 벌 이고 있었다.
호쾌하게 거리를 달리던 일행이 마탑에 거의 다다랐을 때,마탑에 서 쏟아져 나온 검은 지네들이 그 들의 앞을 막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사방에서 지네 괴 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와…… 검은 마탑이라고 해서 마탑이 원래 검은색인 줄 알았는 데,지네가 온통 덮고 있었던 거 네요.
마탑에서 쏟아져 나온 지네 괴물 의 대부분은 마탑 벽에 붙어 있던
놈들이었다.
-뭐,지금도 검은 색이긴 하네.
-그래도 이 색은 꽤 이쁜데요?
돼지를 닮은 얼굴을 한 건장한 아인족들과 지네 괴물들이 이차전 을 벌이는 사이,제이크는 아인족 중앙에서 파티마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물론,그렇게 하면서도 제이크의 손은 무척이나 바빴다.
그는 지금 급하게 마법진을 그리 고 있는 중이었다.
"으하하,리파! 리파!"
사람이 없어서인지 아인족들은
신나게 떠들면서 검과 도끼를 휘 두르고 있었다.
이곳의 지네 괴물들도 멀리서 침 뱉는 공격을 해 왔지만, 그것들은 곧 바람에 밀려 다른 쪽으로 날아 가 버리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주술사의 주술 덕 분이었다.
덕분에 지네 괴물들과 호족들은 몸으로 맞부딪치는 중이었다.
-무슨 대사가 죽어,죽어밖에 없 나 봐요. 멍청해 보이는 게,기사 들보다 더 머리가 빈 것 같지 않 아요?
파티마가 그를 보며 이죽거렸다.
그에 제이크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다들 '리파!'라는 말을 계속하는 바람에 제이크가 주술사에게 뜻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제이크는 곧 그것을 후회 했다.
방금 파티마가 한 말대로 '죽어. 죽어.'라는 말이었다.
-들킬까 봐 말을 안 하는 게 아 니라,할 줄 아는 말이 없어서 입 을 닫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제이크도 파티마의 말에 어느 정
도 동의했지만,겉으로 할 수 있 는 말은 아니었다.
때마침 마법진이 다 그려졌다. 제이크는 곧바로 주문을 외웠다.
"대기는 말이 없고,소리는 들리 지만,공기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흔들려라,대기여. 외쳐 라. 들리지 않는 소리를!"
-이번에는 좀 알아듣는 이름이 겠죠?
"쇼크 웨이브!"
-또,못 알아듣는 주문이잖아! 제이크의 말과 함께 마법진이 환 하게 빛이 났다.
그와 함께 마법진이 새겨진 땅이 움찔 흔들렸다.
그리고 흔들림이 점점 커졌다.
캬아아악!
동시에 주변에 몰려 있던 지네 괴물들이 자리에서 난동을 부려 댔다.
이리저리 꼬고 몸을 뒤집고 사방 으로 굴러다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쿤가니?"
"어떻게 된 것인가?"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 러보는 사이,주술사가 대표로 제
이크에게 물어봤다.
제이크는 인상을 쓰며 그의 말에 대답을 해 줬다.
"가청대 이상의 소리로 세반고리 를 흔든 겁니다."
"뭐?"
-네?
제이크의 말에 주술사와 파티마 가 동시에 다시 물었다.
"아,안 들리는 소리로 술 취한 것처럼 만든 겁니다. 얼마 가지 않을 겁니다. 잡지 말고 빨리 탑 안으로 들어가죠."
"아,그런 마법이군."
이번에도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 지만,주술사는 군말 없이 호족들 을 이끌고 탑으로 향했다.
-크,역시 터프한 종족이네. 귀 족까지 돌덩어리들인가? 나도 어 지러워 죽겠는데.
-흠,뭔가 어려운 마법이네요.
호족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탑을 향해 달려갔고,제이크는 비틀거 리면서도 그 뒤를 따랐다.
잠시 뒤,지네 괴물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두가 들어간 탑의 문이 굳게 닫힌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