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화
황제는 레이첼을 보고는 즐거운 얼굴이 됐다.
미래에 황비였을 때도 똑바로 자 신을 쳐다보며 할 말을 했던 그녀 였다.
그런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 고 있으니, 이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그대의 이런 모습이 나에게 이 렇게 희열을 줄 수가……
이 기회에 이리저리 장난을 치고 싶긴 했지만,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군대가 출발하기 위해 병사들을 다 모은 상태인 데다가,자신도 피를 보고 싶은 마음에 몸이 달아 있었다.
더구나 아이힌테일이 어이없게 죽은 것은 기가 차는 일이었지만,
자신이 아는 디스트로이어라면 불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책에서 봤던 내용이 사실 이라는 것에 황제는 만족함이 더 클지도 몰랐다.
'저 귀족 놈들은 한심하기 짝이 없군. 언제까지 저렇게 떠들고만 있을 건지……
황제는 웅성대는 귀족들을 귀찮 다는 듯 쳐다보다,레이첼에 대한 고민을 했다.
'흠…… 영지의 권리를 좀 빼앗 을까? 아니면 이번 전쟁에 맨몸으 로 참여시켜 볼까?'
레이첼을 보며 황제가 고민을 하 는 사이에,다시금 귀족들 사이에 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제가 한 말씀 올려 도 되겠습니까?"
적막하기까지 한 실내에서 홀로 말을 꺼낸 용감한 귀족이 누군지 모두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은 말을 꺼낸 사람을 확인하고 나름 수긍했다.
그는 제국의 대검호이자 수도 방 위 부대를 담당하고 있는 오페우 스 백작이었다.
선황제의 측근이자,현재는 어느
정파에도 참여하지 않은 골수 무 인.
그는 황제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몇 안 남은 제국의 귀족 이었다.
황제는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백 작을 바라봤다.
'죽은 루테리아 공작과 친했으니, 아스글론 영주의 변호를 할 게 분 명하겠지. 뭐라 변명하는지 한번 들어나 봐야겠어.'
물론,그의 성격상으로 나름의 중립을 지킬 테지만,그 점이 황 제를 더 재미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페우스 백작은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존경하는 인물.
싸우러 가려는 지금,그의 청을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고,백작은 감사 인사를 하고 입을 열었다.
"우선,대마도사의 호위를 제대 로 하지 못해 그를 죽게 만든 자 들과 아스글론의 영주는 제국에 죄를 진 것이 맞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의 잘 못을 먼저 꺼냈다.
"하지만,지금 떠드는 분들처럼 영주에게 과한 벌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그의 말 에 모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 되었다.
"호위라고 했지만,대마도사께서 호위를 받으실 분이 아니라는 것 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습니다. 호위라고 데리고 간 사람들은 그 새로운 몬스터를 데려오기 위한 일꾼에 불과합니다."
그의 말에,많은 귀족들이 자기 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대마도사를 호위하다니, 일당 천 인 기사를 병사가 지킨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이야기였다.
백작의 이야기에 오히려 화가 난 것은 레이첼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 초를 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계속 그의 말을 들었다.
"그렇기에 책임을 호위한 자들에 게 모두 돌리는 것은 아니라 생각 됩니다. 지금 우리는 호위한 그들 에게 책임을 물리는 데 시간을 낭
비하는 대신에 대마도사님을 직접 죽인 몬스터에 대해 신경을 쓸 때 입니다."
황제는 백작의 말에 표정이 바뀌 었다. 지루했던 이야기가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어디서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흑 마탑이 키웠고,도시 하나를 끝장 낸 몬스터입니다. 거기다 대마도 사님까지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이런 몬스터를 버려둔다면 앞으로 제국에 재난이 될 것입니다."
백작도 레이첼 일행이 죽은 대마 도사와 함께 가져온 몬스터를 봤
었다.
죽은 몬스터였지만,검은색 일색 인 몬스터는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하던 몬스터였다.
더구나 같이 봤던 마법사도,학 자들도 모두 처음 보는 몬스터라 고 했다.
거기다 마나에 저항력을 가지고 있기까지 했다.
백작의 말에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대마도사가 죽었다는 이야기에 묻혔었지만,그런 몬스터가 존재 한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
다.
또한 흑마탑이 관련된 이야기였다.
"흑마탑이 개조한 몬스터일까요?"
"키메라 말이죠?"
"그런데,도시가 반파되면서 다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시 전부를 장악했다고 했으 니,그런 몬스터를 다 죽일 수 있 을 수는 없었겠죠."
"세상에! 그런 몬스터가 영지에 풀리면 영지가 쑥대밭이 되는 건 시간 문제겠군요."
웅성거리는 귀족들을 뒤로하고 백
작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 몬스터가 어디서 왔 고,얼마나 살아남아 있는지 확인 하는 데 중요합니다. 만약 대수림 으로 도망가서 세력을 키운다면 제국의 안위가 위험합니다."
백작의 말에 황제가 무척이나 재 미있다는 표정이 되었다.
자신과 달리,몬스터의 정체를 모르는 백작이 저런 제대로 된 말 을 꺼내다니.
역시 대검호 정도 되는 인물은 뭔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었다.
"그럼,차라리 그 조사를 여기
아스글론 영주에게 맡기는 게 어 떻겠습니까? 제일 옆에서 봐 왔 고,대수림 옆 영지를 가지고 있 으니 제일 적합할 것 같습니다만." 대검호에 이어 다른 중견 귀족이 나서서 의견을 냈다.
이 귀족도 중립 위치에서 꽤 인 정을 받는 귀족이라 다른 귀족들 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역적을 토벌하러 떠나야 해서 따 로 조사대를 만들 여력이 없습니다."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면 그 뒤
에 죄를 물으면 될 겁니다."
"흠,너무 약한 벌 같은데……
"뭐,다른 대안이 없잖습니까? 결과를 보고 다시 이야기하면 되 지 않겠습니까?"
이렇듯 가끔 반대 의견을 내는 귀족들도 있었지만,그 의견은 바 로 묻혀 버렸다.
황제는 귀족들이 떠드는 것을 보 고는 피식 웃었다.
"벌써 세력을 구축한 걸까? 아니 면,백작이 호의로 사람을 모은 걸까?"
딱 봐도 죄를 줄이려는 백작과
다른 귀족들의 술수였다.
뜻밖인 점은,예상외로 많은 사 람이 레이첼 편을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백작의 말이 꽤 마음에 들었다.
황제가 손을 들어 올리자,떠들 고 있던 귀족들이 모두 말을 멈췄다.
"백작의 이야기는 본인의 마음에 도 꽤 좋게 들렸소. 내 백작의 의 견을 참고하리다."
황제의 말에 백작의 표정이 밝아 졌다.
황제는 레이첼을 내려다보며 말 을 이었다.
"그럼,이번 일에 대한 명령을 내리겠다."
처음 내린 명령은 모두의 예상대 로였다.
"본 황제는 새로 나타난 몬스터 가 제국에 위험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런 이유로 아스 글론 영주에게 몬스터의 조사를 명한다. 기한은 1년. 서쪽의 반역 자들은 그 시간이면 모두 갈아 버 릴 수 있겠지."
하지만,곧 황제의 입꼬리가 슬
쩍 위로 올라갔다.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난 이 몬스터에 대해 알고 있다. 초기 황제 때부터 주의를 기울이 던 괴물들이지. 그리고 이 몬스터 들이 어디서 생겨났는지도 알고 있다. 바로 대수림 너머의 노예 종족들이 사는 그곳이다."
사람들은 황제의 말에 어리둥절 한 표정이 되었다.
갑자기 등장한 초기 황제와 이야 기 속에만 등장하는 대수림 너머 의 유사 인류.
사람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
를 바라봤지만,황제는 전혀 개의 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러므로,아스굴론 영주는 대 수림 너머에 있는 이 몬스터의 본 거지에 대해 제. 대. 로 조사해 와라. 기한 내에 해 오면 죄를 사 하여 주는 것은 물론,커다란 포 상을 내리겠다."
황제는 이제 만면에 활짝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다 면…… 그 이상의 죄를 물겠다."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레 이첼.. 흐흐,
황제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줄 리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대수림으로 통하는 길을 뚫고,아 인족 나라에 대한 정보를 얻기로 했다.
물론 실패할 가능성이 대부분이 었지만,자신 앞에서 수작을 떠는 귀족들을 좌절하게 만들 수 있다 는 것에서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황제는 이번 내전을 끝내면 슬슬 대수림 너머로 공격을 갈 생각이 었다.
마법 세상에서 중년이 되어야 벌 였던 일이었지만,다시 사는 인생 에서 그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남부 놈들하고도 투덕거려 봤고, 나대는 영주 놈들의 목도 날려 봤 으니,이제는 이종족 놈들을 손볼 차례였다.
만약 실패한다면,그걸 빌미로 대수림을 뚫는 일에 영주를 앞장 세우는 것도 무척 재미있는 일이 될 게 분명했다.
황제의 말이 끝나는 순간,홀 안
은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고,그 뒤에는 엄청난 소란이 몰려왔다.
"폐. 폐하,대수림을 넘는 것은 그 누구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대수림 너머에 이종족이 있다는 것은 증명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대수림을 넘는다는 것 으..,,
"역대 황제께서도 벌써 여러 번 실패하신 일입니다. 일개 영주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레이첼에게 벌을 주자던 귀족도, 봐주자고 했던 귀족도 모두 황제
의 말에 반대했다.
황제의 말이 황당한 것은 둘째 치고,과거에 있었던 대수림 정벌 이 떠오른 것이다.
역대 황제들이 대수림에 처박은 병력이 얼마였는지.
지금 황제가 꺼낸 말로 그 이유 를 알게 됐지만,그 이유라는 것 도 영 못 믿을 내용이었다.
몇몇 귀족들은 그동안 비밀로 해 오던 이야기를 황제가 꺼낸 것에 도 의문을 느꼈다.
하지만 소수였기에 곧 소란에 묻 혀 사라지고 말았다.
황제는 떠드는 귀족들을 보며 씩 웃었다.
오페우스 백작은 황제의 말에 말 도 못 꺼내고 놀란 눈으로 쳐다보 기만 했고,몇몇 귀족들은 벌써 실패를 가정하고 다른 귀족과 손 익을 계산하고 있었다.
황제는 손을 들어 모두를 조용히 시키고 결론을 내렸다.
"더는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것 은 황제의 칙령이다. 지금부터는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온 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아스굴론 영주 느..w
황제는 레이첼을 보고 씩 웃었다.
"목숨을 걸고 책임을 완수해라." 황제의 말에 레이첼은 고개를 들 었다.
황제에게는 아쉽게도,그녀의 표 정은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담담히 말하는 레이첼의 모습에 황제가 표정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자신의 예상과 달리 멀쩡한 모습 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황제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고
박차고 나가자,홀은 완전히 시장 통으로 변해 버렸다.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이거,황 제한테 뒤통수를 맞아 버렸습니다."
오페우스 백작에게 좀 전에 도움 을 줬던 귀족이 다가와 위로를 했다.
백작의 요청에 손을 내밀었는데, 오히려 최악의 상황에 걸려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놀란 것은 맞긴 하는데……. 이
유가 좀 다릅니다."
"네? 무슨 말씀인지."
백작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 로 반문하는 귀족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그의 물음에 대답 할 여유가 없었다.
백작은 머릿속으로 어젯밤 들었 던 말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백작님이 조사하자고 말하면, 황제 폐하께서는 분명 대수림 너 머로 보내자고 할 겁니다. 그럼, 따로 반대하지 마시고 두고 봐 주 십시오."
한밤중에 자신의 침실로 찾아온 마법사가 꺼낸 말이었다.
정예병이 지키고,기사가 버글거 리는 자신의 저택을 들키지 않고 침입한 마법사였다.
더구나 그의 기척은 대검호인 자 신도 알아채지 못했다.
적어도 마도사급 이상.
아스굴론에서 온 젊은 마법사는 말도 안 되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 고,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그의 말은 방금 황제에
의해 진실임이 증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