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동화의 나라가 무너진 뒤에 등장 한 세상은 왠지 낯설지 않았다.
돌로 만들어진 요새와 나무로 지 어진 여러 집.
뿌우우우웅!
변한 세상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요새의 성벽 위에선 활을 든 병 사들이 시위를 걸고 일행을 겨눴다.
그리고 요새의 정문에서 병사들 이 쏟아져 나왔다.
병사들 가운데에는 호족도 있었 고,난쟁이처럼 보이는 자들,다른 동물의 얼굴을 한 자들도 섞여 있 었다.
그들이 삽시간에 일행을 포위했다.
"이쪽이 진심인가 봐?"
아니타의 목 뒤에서 험한 인상이 된 제시카가 비웃음을 흘렸다.
제시카는 그녀의 등 뒤에 서서 단검을 아니타의 목에 들이대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쇠뇌를 들어 베른을 가리키고 있었다.
졸지에 표적이 된 베른은 그를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담담한 표정으 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아직도 그의 어깨에는 고양이 페 이샤가 앉아 있었다. 심지어 마법 을 펼친 이후,그는 자세도 바꾸
지 않은 채로 가만히 상황을 주시 하고만 있었다.
목에 단검이 드리워져 있는데도 아니타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제이크를 빤히 바라보다 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모두 물러가세요. 경보는 그만 하셔도 됩니다."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모든 사 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아니타의 말이 끝나자,일행을 포위했던 아인족들이 빠르게 물러 서서 요새로 들어갔다.
요새 위에서 활을 겨누던 병사들 도 병사들 또한 다시 요새 안으로 사라졌다.
"사과드리겠습니다. 환상 마법이 깨지면 자동으로 경보가 울리게 되어 있어서 반사적으로 병사들이 나온 겁니다. 그리고 환상 마법은 대수림을 넘어 인간이 찾아왔을 때 왕국을 숨기기 위해 만든 마법 입니다. 손님들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목에 검이 드리워져 있는데도 그 녀는 제이크를 향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에 제시카가 급하게 검을 뻤지 만,아니타의 목에는 어느새 붉은 선이 그어졌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제이크 는 마나를 거두어들였다.
지면 위로 커다란 마법진이 모습 을 드러냈다가 흩어졌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줄 알았 던 제이크는,실은 보이지 않는 마법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되돌아가야겠군요. 그동안 꽤 도움을 주고 믿음도 줬다고 생각 했는데. 이런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제이크는 몸을 돌려 방벽을 향해 걸어가자,제시카도 그 뒤를 따랐다.
"잠시만요!"
베른이 어찌할 줄 몰라 했지만, 두 사람은 계속해서 걸어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둘은 방벽 앞에서 멈춰 서 야만 했다.
나무와 넝쿨로 만들어진 방벽.
그들이 들어왔던 통로는 이미 사 라져 있었다.
제이크는 방벽 앞에 서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서 베른이 난감한 표정으 로 발을 구르고 있었지만,아니타 는 담담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통로를 만들어 줄 생 각은 없는 모양인 것 같은데요?"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가 방벽 위 를 올려다봤다.
"제이크,넘어갈 수 있겠어? 이 런 방벽은 본 적이 없어서 가능할 지 모르겠네."
비행 마법을 사용하면 충분히 넘 을 수 있어 보였지만, 그에 따른 대비가 있을 수도 있었다.
더구나 도망치는 것처럼 방벽을 타 넘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돌아 갈 생각도 아니었다.
"이런 식의 방벽이라면 밖에서 공격해도 다시 자라나서 메꿔지겠 죠."
방금 전 넝쿨이 순식간에 자라나 서 나무 사이를 뒤덮는 걸 목격했 기에 든 생각이었다.
제이크는 뒤를 힐끗 바라보며 제시카에게 말했다.
"방벽을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해 서 지켜보는 거겠죠?"
"그렇겠지? 자신들은 사과했으니 할 일은 다 했다는 느낌인데."
"그럼,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것 을 알려 줘야겠군요."
제이크는 마법을 시전하는 대신 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터널을 지나오면서 뿌려 놨던 마 석 하나가 폭발을 일으켰다.
쿠아앙!
방벽 반대편에서 큰 폭발이 일어 났다.
콰지직!
불길이 치솟고,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이크가 씨익 웃으며 뒤를 돌아 보니,베른은 입을 딱 벌리고 치 솟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목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변하지 않던 아니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강력한 마법 저항이 걸려 있는 데 어떻게 폭발이……
큰 소란이 일어나자,요새 안으 로 들어갔던 병사들이 다시 모습 을 드러냈다.
제이크는 그 모습들을 지켜보며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쿠웅!
이번에는 묵직한 진동과 함께 방 벽이 출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방벽 중앙에 있던 마석을 터트린 것이었다.
조금 전처럼 화염이 치솟지는 않 았지만,방벽의 피해는 더 커 보 였다.
넝쿨이 끊어져 나가고 있었고, 다른 나무마저 휘청거렸다.
제이크는 손을 들어 올려 다시 손가락을 튕길 준비를 했다.
"아직 부족하다는 이야기인가?" 그런데 제이크의 중얼거림이 끝
나기 전에 병사들 사이에서 한 아 인족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만 멈춰야 한다. 우리가 사죄 하겠다."
그는 얼마 전 헤어졌던 호족의 주술사이자,장로였다.
황도에 다녀오기 전,미리 대수 림으로 향했던 호족들이었다.
모두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 을 것으로 생각했는데,아직 이 대수림 근처에 남아 있었던 모양 이었다.
"아무래도 아인족을 믿기가 어려
워서요. 돌아갈 생각입니다."
"하아……. 돌아갈 생각 없다는 것 안다. 두 사람의 신변은 호족 의 명예를 걸고 지켜 주겠다."
그 말에 제이크는 들었던 손을 내렸다.
아예 관계를 틀어 버릴 생각은 아니었으니,이 정도로 끝내는 편 이 좋았다.
두 사람은 다시 방벽 앞을 떠났다.
그러자 병사들 일부가 방벽을 향 해 달려갔다.
"저게 무너지다니."
"로코 옥벤제킬레 에시호그베 니?"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우 선 보강부터 해야지. 터널 열어!"
대륙인들과 다르게 아인족들 중 에는 표준어를 쓰는 자도 있고, 다른 말을 쓰는 자도 있었다.
-성대가 표준어를 쓰기에 불편 한 종족은 어쩔 수 없죠. 모두 메 시지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 니고.
페이샤의 말에 제이크는 감탄한 눈으로 주술사를 바라봤다.
페이샤의 말에 의하면 주술사는 불편한 성대 구조로도 표준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뭘,그런 눈으로 보는 것인가?" 주술사는 제이크의 표정에 의아 한 얼굴이 되었지만,제이크는 그 의 궁금증을 풀어 주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제이크의 물음에 주술사는 아니 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도 인간들과 별다를 바가 없기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끼리 서로 믿지 못하고 다투고 있다는
거지."
주술사의 말에 의하면,제이크를 초청하자는 이야기에 반대가 많았 던 모양이었다.
반대하는 쪽은 제이크의 실력과 인성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던 이들은 결 국,제이크를 다시 한번 시험해 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결정된 거다. 한번 결정된 이야기는 되돌릴 수도 없고……. 때문에 나도 돌아 가지 못하고 여기서 널 기다린 거다."
자신이 있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 날 리가 없다며 투덜거리던 주술 사였다.
그의 설명을 듣고서 제이크는 대 충 이쪽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아인족도 인간과 다를 바가 없 군.'
모습은 인간과 많이 달랐지만, 어차피 그들도 인간에서 파생되어 나온 존재일 뿐이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기사분도 깨우도록 하겠습니다."
시몬 기사는 아예 잠재운 모양이 었다.
제이크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 었다.
"깨울 필요 없습니다. 돌아갈 때 깨워서 같이 돌아가도록 하죠."
"우와,그래도 오래 여행한 사이 인데 가차 없네."
제시카의 말에 제이크는 어깨를 으쏙였다.
"어차피 감시자잖습니까. 떼어 놓을 기회가 생겼는데,달고 다닐 이유가 없죠."
그렇게 기사 시몬의 처우는 그가 모르는 사이에 결정되어 버렸다.
일행은 주술사와 함께 다시 아인 족들의 성소이자 수도로 향했다.
아인족들의 수도는 옛날 아인족 들이 대수림을 넘어 처음 정착한 땅이었다.
성소 바빌로니아.
그곳을 중심으로 아인족들은 사 방으로 뻗어 나가 아인족의 세상 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반목도 있었고,갈등 으로 나라가 갈리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 도착한 바빌로니아 는 아인족 전체의 성지이자,그들 의 두 번째 고향으로 모두 신성시
하고 있었다.
늑대를 닮은 짐승에 탄 일행이 방벽을 뒤로하고 초원을 내달렸다.
제이크가 방벽을 넘어 아인족의 세상에 도착한 날.
오랜 시간 히베루니아 왕국을 헤 맸던 루이는 자신이 찾던 여성을 드디어 찾았다.
왕국의 한 영지.
영주성 근처의 작은 여관에서 백
작의 딸이 음식을 나르고 있는 모 습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기사님은 무엇을 드실 건가요?" 멍하니 입구에 서 있는 그를 향 해 소녀가 소리쳤다.
그제야 루이는 정신을 차리고 여 관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투구를 벗지 않아 백작의 딸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제일 잘하는 거로."
그는 은화를 꺼내 건네주고는 제 일 안쪽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정식 1인분요!"
백작의 딸,아니,이제 식당의
여급일 뿐인 소녀는 주방에 크게 소리를 쳤다.
그러고는 또다시 정신없이 음식 을 날랐다.
"아델,이제 그만 나르고 여기 와서 앉아서 이야기나 하자. 내가 한턱낼게."
"웃기지 말아요. 유부남이 어린 소녀에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하하,아델이 이쁘니까 그러는 거지. 내가 돈만 많았으면 후처로 들이고 싶다니까."
수위를 넘는 말에도 소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흥,웃기지도 않네요. 아저씨한 테는 갈 생각이 없으니까 꿈도 꾸 지 말아요."
"하하하,그럼 나는 어때?"
"나는,나는?"
손님 하나가 그녀에게 격침을 당 하자,다른 자리에서 지원자가 속 출했다.
"난 여기서 일하고 있을 테니까, 모두 와서 매상이나 올려 줘요. 그럼 혹시 알아요?"
그녀의 말에 사람들 사이에 웃음 이 터져 나왔다.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
고 활기찬 여관의 모습이었다.
루이는 소녀,아델리안을 투구 안에서 지긋이 바라봤다.
낡은 옷을 입고,머리도 질끈 묶 고 있었지만,귀족 특유의 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물론 그가 기억하고 있던 조용하 고 내성적인 과거의 모습은 사라 졌지만,대신 활기가 도는 그녀의 모습은 생각보다 나빠 보이지 않 았다.
"잘된 건가……
예상보다 잘살고 있는 그녀의 모 습에 루이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은 나름 잘 적응하고 열심히 사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조금 실 망을 한 것이다.
"아마도 난 백마 탄 왕자 역할을 하고 싶었던 거였군."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그는 허탈 한 기분이 되었다.
이래서야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도 어려웠다.
잘 적응한 지금의 삶이 그의 도 움으로 오히려 망가질 수도 있었다.
"우선 부인께서 잘 계신지 확인 하고…… 그 뒤에 몰래 도움을 주
고 떠나는 편이 좋겠어."
그렇게 우선 결정을 내리는 순 간,여관 문 안으로 한 사람이 들 어섰다.
"아델! 내가 왔다."
그는 가죽 갑옷을 걸치고 검을 찬 젊은 남자였다.
"이번에는 네 대답을 들어야겠 어!"
그의 말에 주방으로 들어가던 소 녀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루이는 이 상황이 이상하 게도 반갑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