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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 서기관의 회귀-175화 (175/222)

175 화

"한가하다."

제시카가 광장 구석에 앉아 멍하 니 중얼거렸다.

"심심해."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고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그녀와는 관련 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도 없어,그녀는 마법사들이 하는 일 을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 사이에는 제이크도 있 었다.

"확실히 제이크는 대단하단 말이 야. 천 년도 넘게 산 마법사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라니."

마법 기술자와 고대 마법사 사이 에는 차이가 있었지만,잘 모르는 그녀의 눈에는 제이크가 굉장해 보이기만 했다.

지금도 실제로 마법진에 뭔가 하 는 것은 제이크밖에 없었고,다른 두 마법사는 제이크가 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예쁘게 생긴 마법사는 늙은 마법사를 좋아하면서도 불쌍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고…… 저 겉 보기만 젊은 늙은 마법사는 뭔가 반쯤 포기한 느낌이 들고……. 이 건 좀 기분 나쁘다. 사람한테서 썩은 건초 냄새가 나는 것 같아."

할 일이 없고 심심했던 제시카는 사람들을 보며 이리저리 생각의 나래를 펼쳐 가고 있었다.

"그런데,천 년이 넘게 사는 것 은 무슨 느낌일까? 거기다 그동안 이 던전을 벗어나지도 않은 모양 인데."

천 년 동안 이런 동굴을 지키면 서 산다고 생각하니,제시카는 저 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듯했다.

"그렇게는 못 살지. 암,암." 나지막이 혀를 차던 제시카는 몸 을 일으키는 제이크의 모습에 눈 을 반짝였다.

일이 끝난 듯했다.

허리를 두드린 제이크는 지친 얼

굴로 마법진을 둘러보았다.

"끙,이 정도면 대충 마법진은 다 복구한 것 같습니다."

이틀 동안 마법진을 붙잡고 씨름 한 끝에 망가졌던 마법진을 원래 모습으로 돌릴 수 있었다.

"대단하군요. 마도 제국 때도 이 렇게 빨리 마법진을 복구하지 못 했는데……

쿠사라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천 년 만에 보게 된 정통 마법사 는 과거 자신이 봐 온 그 어떤 마 도 제국의 마법사들보다 뛰어난

것 같았다.

옆에서 같이 구경하던 아니타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원리로 마법진을 고쳤는지 는 알 수 없었지만,마나를 다루 는 실력은 자신들 서포터들과 현 대 마법사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두 마법사에게 칭찬을 받 은 제이크는 의외로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쿠사라를 빤히 쳐다보며 말 했다.

"솔직히 괴물에게 망가진 마법진 은 어제 다 복구했습니다. 오늘

고친 곳은 괴물에게 망가진 곳이 아닙니다."

제이크의 말에 아니타가 놀란 얼 굴이 되었다.

하지만 쿠사라의 표정은 미동조 차 없이 고요했다.

"적어도 수백 년, 혹은 천 년 이 상을 망가진 채로 지내 온 것 같 더군요."

제이크는 광장의 중앙,마법진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전부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이 마법진은 미로만 만드는 것이 아 니더군요. 저 위쪽에 있는 마법진

과 연계를 해서 추가로 다른 마법 을 가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 지 않습니까?"

아쉽게도 미로로 들어오기 전에 봤던 마법진들은 시간이 부족해 분석하지 못했다.

그 탓에 제이크는 정확히 어떤 마법이 발동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만 봐도 천 년 전에는 미로 이상의 마법이 추가로 괴물이 나오는 걸 막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하긴,거대한 균열 전체를 마법

진으로 틀어막았던 마법사들인데. 이곳에 미로 마법진만 새겨 놓을 리가 없죠."

제이크는 중앙에 떠 있는 커다란 마석을 바라봤다.

표면에 수많은 마법진이 가득 새 겨진 수박만 한 마석이 빛을 뿌리 고 있었다.

제이크의 시선을 따라 쿠사라가 바라본 끝에는 마석이 있었다.

그의 눈에 옅은 회한이 스쳐 지 나갔다.

"다시 한번 칭찬해야겠군요. 당 신은 정말 대단한 마법사입니다.

맞습니다."

말을 하면서 그는 뭔가 편해 보 였다.

"원래 이곳은 두 가지 방식으로 디스트로이어를 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 년 전,마법진이 고장 나서 마법 하나가 막혀 버렸지요."

잠시 그가 말을 멈춘 사이에 제이크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온 뒤로 계속 의문을 느 끼고 있었습니다. 왜 이곳에 도시 가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왜 아인 족들은 괴물들을 추적하고 있는

지."

제이크는 다시 쿠사라를 바라보 았다.

"그 의문은 천 년을 산 당신을 보게 되고,망가진 던전을 보게 된 후 풀렸죠."

"재미있군요. 계속 말씀해 보시 겠습니까? 어디까지 알게 되었는 지 알고 싶군요."

쿠사라는 전과 다르게 무척이나 흥미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서포터라기보 다는 인간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제이크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이곳은 괴물들이 지상으로 나오 지 못하게 막는 마도 제국의 봉인 시설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천 년 동안 이 시설을 지켜 온 서포터라 는 게 제 추측입니다. 그렇다고 가정하면 당신은 천 년 이상 이곳 에 소속되었던 서포터라고 유추됩 니다."

제이크의 말에도 쿠사라의 표정 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 옆에 있던 아니타가 조 금 움찔했다. 제이크의 말이 맞았 기 때문이었다.

"마도 제국이 망한 뒤에도 천 년

동안 반쯤 망가진 봉인을 지킨다 라……. 보기에는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겠죠."

제이크의 말에 쿠사라는 쓴웃음 을 지었다.

"하지만,평범한 미담으로 보기 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제이크는 하나씩 손가락을 뽑았다.

"첫째로,당신을 포함한 아인족 들은 마도 제국의 노예들이자,제 국을 탈출한 자들이라는 것."

"둘째로,당신만이 아닌 모든 아 인족들이 괴물들을 막아 내기 위

해 힘을 합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문제가,이 던전에서 괴물들이 쏟 아져 나와 마도 제국을 멸망시켰 다는 점입니다!"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가 눈을 크 게 떴다.

이제 제시카도 제이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천 년을 산 마법사,쿠사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제이크는 손을 들어 쿠사 라를 가리켰다.

제이크는 '범인은 바로 너!'라고 외치는 전생의 어느 탐정이 생각 났지만,지금은 그런 말을 할 기 분이 아니었다.

"천 년 전,아인족들을 이끌어 탈출한 것도,이 시설의 마법을 멈춰 괴물을 쏟아 낸 것도,결국 마도 제국을 멸망시킨 것도 바로 쿠사라 당신이죠."

담담히 꺼내 놓은 제이크의 말에 아니타는 놀란 눈이 되었고,쿠사 라는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군요. 정확하게 맞췄어요."

그는 고개를 돌려,아니타를 향 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내가 천 년 전부터 이 시설을 지켜 왔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알 고 있었지만,내가 모든 사건을 일으킨 원흉이라는 것은 이제 아 는 사람들이 거의 남지 않았지요."

쿠사라의 머릿속에서 죽어 간 동 료,자식들과 후인들이 스쳐 지나 갔다.

"하지만 어떻게 제국에 괴물들을 보낼 수 있었던 거죠? 마법을 멈 춰 괴물들을 풀어놓았다면 이 시 설이 이렇게 멀쩡할 리도,그리고

탈출한 아인족도 피해가 클 수밖 에 없었을 텐데. 그게 아직도 이 해가 안 갑니다."

제이크의 말에 쿠사라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천 년 전…… 뭐,그보다 조금 더 오래되었지만,그런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넘어가도록 하죠. 그때 나는 이 마도 제국 디스트로 이어 저11 방어 시설의 서포터였지요."

그것도 시설의 최고 감독관의 고 정 서포터.

감독관은 계속 바뀌었지만,그는

바뀐 감독관 아래에서도 계속 서 포터를 하고 있었다.

그게 가능한 것은 개조된 그의 육체 때문이었다.

수명이 없는 재생되는 육체.

"마법사들은 축복이라고 말했지 만,저에게는 저주였지요. 그리고 그렇게 계속되는 고통 속에 결국, 막아 놓았던 마법이 풀려 버렸고요."

쿠사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 리 한쪽을 눌렀다.

"마법사와 인간에게 봉사해야만 하는 주문. 유전자 레벨로 머릿속

에 새겨진 마법은 계속된 고통으 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면 재생 마법 때문에 지워졌 을 가능성도 있기는 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마법이 지워진 이상, 그는 노예가 아니었다.

"그 뒤에는 노예 생활을 하던 종 족들을 몰래 풀어 주고,그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죠. 마 도 제국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대 수림 너머로요."

그 당시에도 이 대수림 너머는

사람 손이 닿지 않는 황무지에 가 까웠다. 이 봉인 시설만 황무지에 달랑 있다시피 한 것이다.

하지만 그 탈출은 오래 지나지 않아 꼬리가 밟히고 말았다.

대수림 너머로 추격대가 편성이 되었고,결국 쿠사라는 결정을 내 려야 했다.

"그래서 일족들과 함께 이 봉인 시설을 장악하고 마법을 틀어 버 렸죠. 수많은 괴물이 쏟아져 나왔 고. 제국은 우리를 쫓을 여력이 없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마도 제국과 괴물들이

공멸해 버렸지만,덕분에 아인족 들은 제국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쿠사라는 마석이 있는 방향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허공에 작은 마법진들이 떠올랐다.

일종의 계기판처럼 보이는 마법 진들이 었다.

"그게 이 핵을 조종하는 마법입 니까?"

제이크는 침중한 얼굴로 그에게 물어보았다.

"맞아요. 거의 천 년 만에 다시

가동되는군요. 이게 제대로 가동 되면 아인족들은 다시는 디스트로 어에게 고통받지 않아도 될 겁니다."

쿠사라는 미소를 지으며 마법진 위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그 상태에서 움직이 질 못했다.

"멈추시죠. 그 마법을 지금 가동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요."

제이크의 손이 그를 가리키고 있 었다.

어느새 쿠사라 주변에 뿌려진 여 러 개의 마석이 빛을 발하고 있었

다.

제이크가 미리 뿌려 놓은 시한폭 탄들이었다. 모두 방벽을 박살 낸 마석과 같은 종류의 것들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갑작스러운 대치에 아니타가 소 리쳤지만,제이크도 쿠사라도 당 연하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옛날 일이잖아요! 쿠사라 님도 일이 그렇게 될지는 몰랐을 거예요!"

영웅의 어두운 비밀에 아니타는 비통한 표정이 되었지만,그녀는 최선을 다해 그를 변호했다.

하지만 제이크는 꿈쩍도 안 했다.

"그때 수천만,수억이 죽은 것은 솔직히 저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근데 왜?"

"문제는 지금이죠. 마도 제국 때 를 경험한 노예가 마도 제국의 마 법을 이은 마법사를 보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리고 그가 새로운 마 법사를 용서했다면 망가진 옛 마 법을 비밀로 했을까요? 거기다 마 법진을 고치면,과연 마법진을 고 칠 수 있는 마법사를 그가 놓아준

다 생각할 거라고 여기셨습니까?" 제이크의 말에 쿠사라는 다시 미 소를 지었다.

"정말,칭찬밖에는 할 말이 없군요. 근데 겨우 그런 정도로 알아 차렸다는 건가요?"

그에 제이크는 표정을 굳힘과 동 시에 존댓말도 버렸다.

"다른 것보다,당신의 죽음을 각 오한 분위기 때문이지. 억지로 사 는 듯한 당신의 분위기가 지금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편안함으로 바뀌었어."

제이크의 말에 쿠사라는 놀란 얼

굴이 되었다.

"과연,얼굴에 드러난 거군요. 그 럼 할 말이 없네요."

"움직이지 마. 당신이 죽을 것을 각오했다고 하지만,바닥에 깔린 마석들은 이 시설 전체를 충분히 날려 버릴 수 있어. 난 필요하다 면 이 시설을 박살 낼 거야. 당신 처럼!"

농담이 아니었다.

제이크는 남에게 휘말려 죽을 생 각은 추호도 없었다.

최악의 경우 시설이 박살 나 괴 물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해도,차

라리 쏟아져 나온 괴물들을 막는 게 나았다.

실력에서는 밀릴지 몰라도,바닥 에 깔린 마석들이라면 해볼 만하 다는 생각이었다.

저것들을 막아 내는 건 죽은 대 마도사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쿠사라는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까 물어봤었죠? 어떻게 피해 없이 제국에 디스트로이어들을 보 냈는지."

대신 그는 뜬금없이 제이크의 질 문에 대답했다.

"그것은 망가진 두 번째 마법이 공간 이동 마법이었기 때문입니 다! 미로 마법으로 디스트로이어 들을 흔들고,빠져나온 놈들은 공 간 이동 마법으로 원래 세상으로 날려 보내는 거죠. 저는 그 마법 을 틀어서 목적지를 제국으로 바 귓습니다. 덕분에 디스트로이어들 은 제국으로 날아갔고,우리는 안 전할 수 있었죠. 너무 무리를 하 는 바람에 오래지 않아 마법진이 망가지고 말았지만요."

그렇게 말하면서 쿠사라는 공중 에 떠 있는 마법진을 손으로 쓸었

다.

그러자 마법진이 움직였고,환한 빛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가동된 것이다!

"이런!"

제이크가 바로 마석에 마나를 불 어넣었지만.

슈슈슈숙!

마석들은 터지기 전에 하나둘씩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이제 마법진이 복구되었 으니,핵에 있는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디스트로이어의 세계로 날려 보내지게 됩니다."

그는 미안한 얼굴로 아니타를 바 라봤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도."

그의 말과 함께 광장에 있던 모 든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법을 쏘아 내려던 제이크의 모 습도,단검을 들고 달려가던 제시카의 모습도.

그리고.

천 년을 넘어 마도 제국의 봉인 시설은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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