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다행히 일행이 공간 이동된 곳은 황량한 바위산 중턱이었다.
바위산 아래쪽 숲에는 나무보다 더 커 보이는 검은 괴물들이 지나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이곳은 괴물은커 녕 나무 한 그루,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제시카 가 결국,얼굴을 험하게 일그러뜨 렸다.
"이 미친 새끼가!"
그녀는 분노한 얼굴로 여유 있게 주변을 살피는 쿠사라에게 달려들 었다.
공간 이동 전에 뽑아 들었던 그 녀의 단검이 마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쿠사라는 자신을 향해 달
려오는 제시카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피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모습에 제시카는 더욱 분노했다.
"죽어!"
"실드!"
그녀의 공격은 반투명한 막에 의 해 막히고 말았다.
아니타가 실드로 그녀의 검을 막 았던 것이다.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아니타는 울 듯한 얼굴로 제시카
에게 애원을 했다.
"젠장! 비켜! 도와주러 온 사람 들 뒤통수를 쳐?"
제시카는 그녀의 애원을 듣지 않 고 검을 휘둘렀지만,실드는 쉽게 깨지지 않았다.
"제이크,뭐 해! 안 도와주고!"
제시카가 실드를 내려치면서 제이크에게 소리를 쳤지만,그는 그 녀에게 엉뚱한 소리를 했다.
"괜히 힘 빼지 말고 그냥 놔두세요."
"무슨 소리야!"
"실드를 깨고,검으로 마구 베어
도,마법사는 쉽게 죽지 않을 거 예요. 천 년을 살아남게 만든 재 생 마법입니다. 머리만 남아도 아 마 살아날 겁니다."
"흥,그럼,머리도 조각조각 내서 사방으로 흩어버리면 되겠네."
아무래도 제시카의 분노가 장난 이 아닌듯했다.
하지만 제이크는 평안한 목소리 로 말을 이었다.
"거기다,그 마법사는 오히려 죽 기를 바라고 있어요. 제시카가 하 는 일은 오히려 그를 위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 말에 제시카는 실드 뒤에 있 는 쿠사라를 노려보았다.
제이크의 말대로,쿠사라의 표정 은 모든 것을 이룬,평안함 그 자 체였다.
"……젠장."
그 얼굴을 본 제시카는 허탈한 표정으로 검을 든 손에서 힘을 했다.
이대로 그를 죽여 봤자,쿠사라 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일 뿐이라 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크아악! 젠장! 도대체 여긴 어 디야."
그녀는 결국 제이크에게 성질을 부리고 말았다.
"대충 짐작은 가는데,쿠사라 가 제대로 알 겁니다."
바닥에 흩어진 마석을 주우며 제이크는 쿠사라를 가리켰다.
쿠사라는 담담한 제이크의 모습 에 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우리가 사는 대륙의 땅 속 깊숙한 곳입니다."
"지하 던전 같은 거?"
"아뇨. 그보다 훨씬,더 훨씬 아 래쪽에. 바다 밑보다 더 아래에 있는 또 다른 세상입니다."
"그럼,지옥 같은 건가?"
제시카의 말에 쿠사라는 피식 웃 었다.
"그건 또 재미있는 발상이네요. 하긴 디스트로이어가 사는 세상이 라는 점에서는 그 말도 맞을 것 같군요."
쿠사라의 말에 제이크가 고민하 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행성 공동설인가. 과학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뭐,마나가 있는 동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하지만,그 말을 들은 제시카는
이번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에잇,모르겠다. 그것보다. 어떻 게 하면 돌아갈 수 있어?"
제시카가 다시 제이크에게 물어 봤다.
저 죽을 생각이 가득한 재수 없 는 마법사는 알려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오히려 쿠사라 를 가리켰다.
"그에게 물어보세요. 아는 내용 은 다 말해 줄 겁니다."
그는 제이크를 고대 마법사의 후
예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제이크 앞에서 비밀이 필요 한 마법을 쓸 리가 없었다.
그랬다간 들킬 게 뻔했으니까.
쿠사라는 제이크를 신기하게 바 라보았다.
"당신은 정말 이상하군요. 내가 아는 어떤 마법사하고도 달라요."
"하지만,이리로 날려 보낸 것은 후회하지 않겠지?"
적이라고 생각한 이상,제이크 입에서는 더는 존댓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하,그렇죠. 고대 마법은 사라
져야 해요. 아무리 사람이 좋고, 다른 마법사와 다르다고 해도 그 것은 변하지 않아요."
"홍,그럼 직접 죽이지 그랬어?"
제시카가 비꼬았지만,그의 표정 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저희를 도와준 사람인데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그리고,여 기로 오게 된 이상 죽은 거하고 다를 바가 없으니 상관없습니다."
"그것보다 시설이 망가질까 봐 공격을 안 한 거겠지."
"하하,그것도 정답입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아니타는 예시
카가 공격을 하지 않을 것 같자, 실드를 거둬들였다.
그사이 쿠사라는 편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던전에 설치된 공간 이동 마법 은 목적지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디스트로이어의 세상으로 던전에 있는 놈들을 날려 보낼 뿐,그들 세상 어디에 나타나게 될지는 아 무도 모르죠."
"하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찾을 수 있을 텐데."
던전에서 출구를 찾았던 것을 떠 올린 제시카가 반론을 내 보았지
만.
"모르셨겠지만,이 지하 세상은 대륙보다 훨씬 큽니다. 디스트로 이어들이 가득 찬 거대한 세상을 돌아다니며 출구를 찾기란 불가능 하죠."
말은 안 했지만,출구를 찾은 뒤 에도 빠져나오기는 어려웠다.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던전 입구 를 뚫고 들어가야 했고,던전을 들어간다고 해도,공간 이동 마법 으로 이 세상으로 돌려보내질 뿐 이었다.
그가 말을 안 해도 제이크는 알
고 있는 눈치였고,거기까지 알지 못한 제시카도 빠져나가는 게 힘 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시카는 다시 한번 쿠사라를 향 해 이를 부득 갈았지만,이번에는 그에게 검을 날리지 않았다.
쿠사라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여기가 우리의 무덤입니다. 그 래도 디스트로이어의 세상이 무덤 이라는 점은 꽤나 낭만적이지 않 습니까?"
아무래도 너무 오래 살았던 것일 까?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모습에 아니타마저 슬쩍 옆으로 피하고 말았다.
한편,제이크는 그의 생각에 동 의하지도 않았고,관심도 없었다.
"그럼 약속대로 이 목걸이를 어 떻게 쓰는지 알려 줘."
손에 들린 목걸이를 그에게 보여 주며 제이크가 말했다.
"하하,역시 당신은 특이하군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제이크를 바라보던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 해 목걸이의 사용법을 설명해주었다.
"그 시절의 도난 방지 마법 중 하나입니다. 다른 마법 아이템들 은 시간이 흘러 도난 방지 마법이 힘을 잃었지만,그 목걸이는 아직 마법이 남아 있었던 거죠. 원래 고유한 마나 패턴을 입력해야 하 지만,다행히 제가 그 패턴을 알 고 있습니다."
쿠사라는 목걸이를 건네받고자 손을 들어 올렸지만,제이크는 그 에게 건네주지 않았다.
"역시,마나 패턴이었어. 망가질 까 봐 건드리지를 못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야."
제이크는 목걸이를 건네는 대신 에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파파파팍!
목걸이에서 스파크가 마구 튀어 올랐다.
"패턴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 무렇게나 주입한다고 되는 게 아 니에요."
쿠사라가 제이크를 말렸지만,제이크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목걸이에서 환하게 빛이 뿜어져 나왔다.
"허…… 풀렸군요."
쿠사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목걸이를 바라봤다.
-그냥 도전해 볼 걸 그랬네요.
-무시무시하게 스파크를 토해 내는데 계속하기는 시험해 보기는 무리였지.
그래도 오랫동안 마법 목걸이를 주무른 덕분에,제이크는 목걸이 에 남아 있는 마나 패턴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그 마나 패턴이 제대로 된 열쇠인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 은 격렬한 스파크 덕분에 더 진행 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확답을 받아 시험을 강행
할 수 있었다.
목걸이가 안전해진 것을 확인한 제이크는 만족한 표정으로 목걸이 를 목에 걸었다.
그 순간,목에서부터 시작된 묵 직한 기운이 온몸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마나를 끌어모아 야 겨우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우와,대단한데……
제이크는 가득 느껴지는 마나에 절로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마나를 느끼던
그는 만족한 얼굴로 제시카에게 말았다.
"그럼 가볼까요?"
제이크의 말에 제시카가 크게 기 지개를 켰다.
"으싸,이제 출발하는 거야?"
"네,볼일은 다 봤으니까요."
"좋았어."
쿠사라는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 을 바라봤다.
제이크와 제시카의 모습은 마치 뒷산에 나왔다가 집에 돌아가는 사람 같았다.
"어딜 간다는 거죠?"
제이크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 켰다.
그에 쿠사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여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여기는 디스트로이어의 세계입니다.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바로 죽 을 겁니다."
쿠사라의 말에 제이크가 피식 웃 었다.
"그거야 댁이 상관할 문제가 아 니잖아."
확실히 제이크의 말이 맞았다.
이곳으로 일행을 날려 보낸 쿠사
라가 할 말이 아니었다.
쿠사라는 입을 딱 벌린 채로 제이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걸음을 옮기려던 제이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니타를 바라봤다.
아직 아니타는 어떻게 할지 결정 을 내리지 못한 것 같았다.
다른 사람과 달리 그녀는 그냥 상황에 휘말려 이곳으로 온 사람 이었다.
하지만, 좀 전에 쿠사라 편을 든 이후로는 제이크에게는 제삼자보 다 더 먼 사람일 뿐이었다.
잠깐 멈칫했던 제이크는 그녀를
무시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도적 출신의 마나 사용자와 고대 마법사에게는 험한 바위산도 평지 와 다를 바가 없었다.
두 사람은 무사히 바위산 아래로 내려왔고,마법으로 소리마저 줄 인 뒤,조용히 숲으로 진입했다.
숲에 들어서고 얼마 뒤.
제시카가 바위산을 돌아봤다.
산 중턱에 서 있는 쿠사라의 모 습이 이곳에서도 흐릿하게 보였다.
"껍,기분이 좋지 않아. 뒤통수를
맞고도 그냥 떠나는 기분이야."
마음 같았으면 죽기 직전까지 휘 둘러 패고 싶었지만,이제 와서는 그리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그렇다고 짜증 나는 것 이 풀리는 것도 아니었다.
"제이크,넌 의외로 얌전한데? 이렇게 당하기만 하는 타입은 아 니었잖아."
물론,동료나 친구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한껏 퍼주기도 했지 만,적으로 생각하는 자를 쉽게 용서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습니다."
제이크는 바위산을 보며 손을 들 어 올렸다.
"목걸이 덕분에 꽤 멀리서도 가 능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다음 순간,그는 손가락 을 튕겼다.
콰앙!
바위산 중턱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산 옆구리가 날아갈 만한 큰 폭 발이었다.
화염과 연기가 쿠사라를 뒤덮었다.
"설마……
"마석을 좀 뿌려 두고 왔습니다."
"역시,그냥 둘 남자가 아니 지……
제이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제시카였다.
"그런데 아니타는 괜찮으려 나..
같이 있다가 휘말렸을 아니타가 걱정되는 제시카였다.
조금 전까지 투덜거리고 있었지 만,결국 그녀는 정을 버리지 못 하는 인물이었다.
잠시 뒤,화염과 연기가 사라지
고,그 자리에 반투명한 실드가 모습을 보였다.
"이럴 줄 알았어. 자살은 무슨." 폭발을 막아 내기 위해 쿠사라가 만든 실드였다.
보아하니 아쉽게도 폭발은 실드 를 뚫지 못한 것 같았다.
"껍,결국 작별 인사 정도인가. 저렇게 멀쩡한 걸 보니 마석 값이 좀 아까운데."
좀 전과 반대로 제시카가 아쉬움 에 혀를 끌끌 찼지만,제이크는 아직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위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응? 아직 터지지 않은 마석이 남아 있어?"
"아뇨. 깔아놓은 마석은 그게 다 였습니다."
"근데 뭐가 안 끝났단 거야?" 제시카의 말에 제이크는 씩 미소 를 지었다.
"자,이차전 시작입니다."
쿠아아아아아!
뿌우!
크앙!
제이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 방에서 괴물들의 괴성이 들려왔
다.
그리고 뒤이어 괴물들의 발소리 가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모두 바위산을 향해 달리는 괴물 들의 발소리였다.
"이 정도 폭발에 놈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더구나 폭발 지 점도 빤히 보이니,찾아가기도 쉽 고요."
평범한 짐승이나 작은 몬스터라 면 도망갈 수도 있겠지만,검은 괴물들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할 뿐 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바위산 중턱
에 보였던 실드가 보이지 않게 되 었고,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산 쪽에서 괴물들의 괴성과 폭발 소 리가 들려왔다.
그사이 제이크와 제시카는 숲을 빠르게 지나갔다.
앞장서서 움직이는 제이크의 손 에는 전에 제시카와 루이에게 들 려준 추적 아이템이 있었다.
다른 추적 아이템의 방향과 거리 를 알려 주는 아이템.
그 덕분에 쿠사라의 생각과 달 리, 제이크는 적어도 이곳의 어디 인지는 알 수 있었다.
제이크와 제시카는 동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