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제국이 버려두고 떠난 레타니아 왕국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실권자들은 모두 제국의 황제에 의해 목숨을 잃어,뒤에서 웅크리
고 있던 고만고만한 귀족들이 왕 을 자처하고 나섰다.
거기다,제국과 싸우기 위해 모 여들었던 각국의 군대들은 본국으 로 돌아가지 않고 내전에 뛰어들 었다.
그 탓에 중계 무역으로 대륙의 부를 끌어모았던 레타니아는 이제 단 하루도 싸움이 멈추지 않는 피 폐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여기 고대 숲에 있는 균열 옆을 걷고 있는 군인들도 내전에 뛰어 든 브리티 왕국의 병사들이었다.
"속도를 더 내라!"
"병사들이 겁에 질려 있어서 무 리입니다."
"무슨 소리야? 여기는 상인들도 지나다니는 길이잖아!"
"하지만 바닥없는 균열 옆을 걷 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
"그럼 저 숲을 관통하겠나? 그러 다 숲 안에서 도적 떼라도 만나면 자네가 책임질 건가?"
기사의 말에 결국 병사는 입을 닫고 말았다.
기사의 말이 옳았다. 지금 고대 숲은 몬스터보다 도적과 강도들이 더 많은 실정이었다.
도망친 농노와 탈영한 병사들, 거기다 기회를 엿보는 몰락 귀족 들까지.
수많은 사람이 고대 숲에 들어와 있었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이렇게 좋은 길이 있는데 그깟 미 신 때문에 쓰지 않는다니.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갈 수 있지만."
"허허,미신치고는 꽤 큰일이 일 어났지 않은가. 이 나라가 망한 게 바로 이곳에서 벌어진 일 때문 이니까."
옆에서 들리는 마법사의 음성에
기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긍을 했다.
병사들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호 통을 쳤겠지만,상대는 백탑의 마 법사였다.
지긋한 나이에 걸맞은 3서클의 마법사라,기사인 그도 함부로 하 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죽었다던 전 황태자 비는 살아서 돌아갔잖습니까. 그 래서 다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제국이 벌인 수작이라는 이야기가 돌던데……
"뭐,핑계든 아니든 결국 이 균
열에 대한 미신은 이제 미신을 넘 어선 게지."
기사는 마법사의 말에 얼굴을 찌 푸렸다.
기껏 병사들을 다독이고 있는데, 옆에서 한껏 초를 치고 있었다.
"뭐,어쨌거나 미신은 미신이니 까요. 우리야 편하게 이동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지 않겠습 니까."
그렇게 말을 맺은 기사는 병사들 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벽 쪽으로 안 붙어도 된다! 더 붙으면 내가 낭떠러지로 밀어 버
릴 테니 알아서들 해라!"
마법사의 말 때문인지 이제 병사 들은 넓은 길을 놔두고 벽에 딱 붙어 있었다.
거기다 선두는 움직일 생각도 하 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기사는 화가 하늘까지 치솟았다.
"너희들,다 죽고 싶어!"
기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병사들은 창백한 얼굴로 반대편 절벽을 가리킬 뿐이었다.
"기,기사님,저거……
짜증이 난 기사가 고개를 돌려
병사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커다란 검은 지네 한 마리가 반 대편 절벽을 내려가고 있었다.
딱 봐도 마차 몇 대는 되어 보이 는 거대한 몬스터였다.
지네 몬스터의 등에는 커다란 날 개까지 달려 있었는데,몬스터는 날개를 쓰지 않고 수많은 다리로 절벽을 내려가고 있었다.
검은색 일색의 몬스터에 기사도 서늘한 공포를 느꼈지만,그는 억 지로 외면하려 했다.
다행히 몬스터는 이쪽을 전혀 신 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검은 지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그냥 몬스터잖아! 웬 소란이 야!"
그제야 기사는 병사들에게 호통 을 쳤다.
모두가 너무 늦은 호통이라는 것 을 알고 있었지만,어쨌든 그 덕 분에 병사들은 다시 움직일 수 있 었다.
"신기한 몬스터군. 검은색 일색 의 다족 몬스터라. 근데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기사는 얼른 균열을 빠져나가고 싶었기에 걸음을 서둘렀다.
그는 미신은 믿지 않았지만,몬 스터의 무서움은 잘 알고 있었다.
저 정도 크기의 몬스터라면 부대 에 엄청난 피해를 줄 게 분명했다.
지금이야 신경도 쓰지 않고 내려 갔지만,다음에도 그러리란 보장 은 없었다.
"서둘러! 해가 지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간다!"
이번에는 기사의 호통에 병사들 도 잘 따라 주었다.
거의 속보에 가까운 속도로 병사 들이 이동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걷던 그 들은 다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쿠우우웅.
발밑에서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 기 때문이었다.
쿠웅.
진동은 더욱 커졌고,병사들은 다시금 벽에 착 달라붙었다.
이번에는 기사도 병사들에게 뭐 라 하지 못했다.
그도 겁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벽에 붙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마법사만이 반대편 낭떠러 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진이 아니라 마법적인 진동 같은데."
기사와 병사들은 이럴 때도 호기 심을 접지 못하는 마법사를 질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그때.
푸악!
강력한 빛이 균열 아래에서 터져 나왔다.
"으악! 내 눈!"
"눈감아!"
엄청난 빛이었다.
균열을 가득 메울 정도로 엄청난 빛이 고대 숲 전체를 환하게 비췄다.
마치 균열 아래에 해가 하나 더 떠오른 것 같았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던 마법사 는 빛에 직격당해서 그대로 눈이 멀고 말았고,병사들도 눈물을 줄 줄 흘리며 쉽게 눈을 뜨지 못했다.
그나마 기사만이 마나로 눈을 보 호한 덕분에 금방 시력이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균열을 보
며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저게 뭐야……?"
온몸이 검은색 일색인 하늘을 나 는 몬스터들이 균열 아래에서 솟 구쳤다.
작은 것은 사람 크기 정도였지 만,큰 몬스터는 좀 전의 지네 몬 스터보다 훨씬 컸다.
거대한 저택만 한 몬스터가 날개 를 펴고 균열을 빠져나가는 모습 은 공포스러우면서도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박쥐 떼가 날아오르는 것처
럼,균열을 가득 메웠던 몬스터들 은 어느새 그곳을 빠져나와 사방 으로 흩어졌다.
사방을 압도하는 몬스터의 수에 기사는 다른 부대를 걱정했지만, 이내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검은 몬스터 한 마리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캬아아악!
까마귀처럼 보이는 부리에,박쥐 날개처럼 보이는 피막을 단 몬스 터였다.
"무슨 일이야!"
그 소리를 듣고 절벽 옆에 주저 앉아 있던 마법사가 괴성이 들리 는 곳으로 마법을 쏘아 냈다.
퍼엉!
그가 쓴 마나볼이 몬스터에 적중 했지만,몬스터는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푸악!
몬스터는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 로 몸을 틀더니,길옆에 내려앉아 부리로 마법사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살려 줘! 살려……
잠시 비명을 지르던 마법사는 곧
조용해졌다.
기사는 그 잔인한 모습을 보면서 도 마법사를 도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곧이어 다른 몬스터들도 몰려들 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뜨지도 못한 병사들은 그대 로 몬스터들에게 먹혀 버렸다.
그 와중에 기사가 미친 듯이 검 을 휘둘렀지만,그의 마나는 검은 몬스터의 피부에 작은 상처만 남 길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기사도 몬스터 에 먹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병사들을 모두 먹어 치운 몬스터들은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며칠 뒤,레타니아 왕국의 내전 은 끝이 났다.
딱히 평화 협정을 한 것도 아니 고,누군가 이긴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제 인간들끼리의 싸움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직,고대 숲에서 쏟아져 나오 는 검은 몬스터를 막기 위한 싸움
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지상 상황을 알지 못하는 제이크와 제시카는 열심히 괴물들 의 대지를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숲을 지나 이제 간간 이 나무가 보이는 벌판을 걷고 있 었다.
그 옆으로 토끼처럼 보이는 동물 이 지나갔고,나비와 나방을 닮은 곤충이 주변을 노닐었다.
"도대체 여긴 어떻게 된 동네야. 왜 땅속인데 환한 거고,나무와 숲은 멀쩡한데 왜 저런 검은 놈들
만 가득한 거야?"
제시카의 투덜거림처럼 의외로 이 지하 세계는 지상과 다르지 않 았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구 름 위의 높은 천장은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고,그 빛으로 나무와 풀이 잘 자라고 있었다.
더구나 토끼나 족제비 같은 작은 동물마저 보이는 것이,검은 괴물 들만 없으면 이곳도 꽤나 살기 괜 찮아 보였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광경은 군 데군데 보이는 검은 그림자에 의
해 망가져 있었다.
대수림의 몬스터처럼,이곳에서 는 검은 괴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 하고 있던 것이다.
"근데,여기서 보면 평범한 몬스 터 같은데."
제시카는 나뭇잎을 먹고 있는 괴 물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한가롭게 높은 나무에 달린 잎을 씹고 있는 목이 긴 괴물이었다.
"저건 초식 동물에 가깝잖아. 저 런 게 달려든다는 게 잘 이해가 안 가네."
제이크는 그녀의 말에 주위를 살
폈다.
다행히 주변에는 저 거대한 괴물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 시험해 보도록 하죠."
"뭘?"
"우리를 발견하면 놈이 어떻게 하는지."
"응?"
어리둥절한 제시카를 두고,제이크는 두 사람에게 걸려 있는 은신 마법을 풀어 버렸다.
모습과 마나까지 감춰 주는 강력 한 은신 마법이 사라지자,두 사 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쳤어!?"
놀란 제시카가 급하게 엎드렸지 만,이미 두 사람의 존재를 알아 첸 듯 들판은 바로 조용해졌다.
옆에서 뛰어가던 작은 동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주변에서 노 닐던 나비와 곤충도 바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뭇잎을 먹던 괴물도 코를 킁킁 거리기 시작했다.
"왜,그런 거야! 들킬 거 같잖 아!"
"강한 녀석들을 만나기 전에 연
습을 해 봐야죠. 제 은신 마법과 투명 마법도 무적은아닙니다. 강 한 놈한테는 들킬 가능성이 커요."
마나에 강하다는 것은,공격 마 법을 막는 것뿐 아니라 다른 보조 마법도 파훼할 수 있다는 이야기 였다.
제이크는 미래에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기습을 했던 기사와 마법 사들이 오히려 역공을 당한 것을 여러 차례 봤었다.
그들이 자신처럼 고대 마법을 알 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자신
의 마법도 언젠가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뭐,출구에 가까이 가면 백 프 로 들키겠죠."
제이크의 혼잣말은 파티마 이외 에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크아아아앙!
목이 긴 괴물이 그 순간,하늘을 향해 괴성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괴성을 지른 괴물은 둘을 똑바로 바라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평화로운 모습은 존재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괴물은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너,나중에 봐."
제시카는 제이크에게 눈을 흘기 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빛나는 단 검이 들려 있었고,그녀의 부츠는 마나를 머금어 은은하게 빛이 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앞으 로 뛰쳐나갔다.
적이 마법사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는 것이 싸움의 기본이었다.
이왕이면 자신이 끝장을 내 버리 고 싶었지만,얼핏 봐도 단검으로
어떻게 할 크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는 있을 거라 생각한 제시카는 막 상 괴물에게 다가갔다가,예상보 다 튼튼한 괴물의 몸에 난감한 표 정을 지었다.
카앙!
"이게 뭐야! 검이 안 먹히잖아!" 마나를 실은 그녀의 검이 괴물의 피부에만 상처를 입히고 튕겨 나 온 것이다.
다리와 발,다리를 밟고 허리에 도 한 방을 먹여 봤지만,겨우 미 미한 상처만 날 뿐이었다.
"좀 더 집중해요! 그냥 마나를 입히는 것으로는 먹히지 않을 겁 니다. 마나로 잘라 낸다는 기분으 로,톱날을 만드는 기분으로 마나 를 끌어모아요."
뒤쪽에서 제이크가 큰 소리로 조 언을 했다.
미래에 괴물들과 싸웠던 기사에 게 들었던 말들이었다.
"아니,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빨리 피해!"
자신의 검으로는 괴물이 움직이 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제시카가 소리를 질렀지만,곧
그녀는 지금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괴물은 전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 고 있었다.
다리는 땅을 박차고 손과 머리는 사방으로 내둘리고 있었지만,괴 물은 그 자리에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전진하지 못하는 괴물의 몸 주변 에는 반투명한 연기가 뭉쳐 있었다.
"으악,이건 또 뭐야?"
그런 제시카의 반응에 제이크가 뿌듯한 표정으로 크게 소리쳤다.
"새로 만든 마법입니다. 내 걱정 은 말고,몬스터를 쓰러뜨리는 데 나 신경 써요!"
연기는 제이크 손에서 뿜어져 나 와 괴물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제시카는 알지 못했지만,제이크 의 마법은 얼마 전 대마도사가 사 용했던 마나 올가미와 무척 비슷 했다.
"오래 할 수는 없습니다! 자,힘 내요! 제가 힘 빠지기 전에 몬스 터를 잡지 못하면 우리는 다 죽습 니다!"
"무슨 소리야!"
제이크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제시카는 다시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제시카의 검에서 조금씩 빛 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간 지나자,괴물은 피투성이 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