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거대한 식당으로 변한 성의 일 층에 있는 홀에서는 축하연이 벌 어지고 있었다.
성을 공격하던 몬스터들을 일소 한 것을 축하하는 연회였다.
하지만,정작 축하를 받아야 할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홀에 보이는 사람들은 귀족과 유 지,상인들뿐이었다.
그나마 싸음에 참여한 사람 중에 는 기사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홀의 중앙.
레이첼 여남작과 앰버는 영주와 함께 상석에 앉아 있었고,두 사 제와 제이크는 따로 아래쪽에 자 리를 잡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세 사람 주 위에는 사람들이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두 어린 사제들에게는 사 람들의 관심이 모아졌지만,그 옆 에 있는 마법사로 인해 차마 접근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갑자기 나타나 서 위험한 상황을 한 번에 해결한 마법사였다.
나이는 어려 보였지만,마법사란 족속은 겉으로 보이는 대로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강력한 마법사일수록 괴 상한 성격들을 가진 것으로 유명 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마법사가 어떤
성격인지 알 때까지 거리를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제이크와 두 사제에게 있어서는 만족스러웠다.
"영주님도 엄청 귀찮아하는 것 같은데요? 자꾸 이쪽을 보시는 것 같아요."
"이 바보야. 귀찮아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야."
"응? 그게 뭔데?"
"아직 어린 넌 몰라도 돼."
이네트의 말에 제이크는 슬쩍 웃 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알리바의 말 이 맞는 것 같은데?"
제이크의 어깨에 앉아 있는 신조 가 지루해하는 레이첼의 기분을 제이크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그때,상석 중앙에 앉아 있던 귀 족이 잔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자 홀 전체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가 이 영지의 주인이었기 때문 이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 은 오늘 있었던 대승을 축하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잔을 위로 높이 들어 올렸 고,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 를 따라 했다.
"뭔 짓인지 모르겠어요. 싸움이 끝났으면 가서 쉬게나 해 줄 것이 지. 아니면 고생한 사람들에게 술 이나 내리든가."
이네트가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말을 들은 제이크는 조금 놀 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래 여자아이들에 비해 요조숙 녀 같던 소녀가,지금은 전장을
한참 구른 노숙한 병사가 할 법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를 눈치챘는지,알리바가 얼른 설명을 해 줬다.
"그동안 병사들과 계속 같이 지 냈거든요. 이네트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많 았고."
"홍,다친 것만 치면 네가 제일 많았거든!"
알리바도 전과 달리 무척이나 어 른스러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자기들끼리 이 야기할 때는 아직은 어린 모습이
남아 있었다.
두 사제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에 영주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열심 히 싸워 준 병사들의 도움으로 우 리는 오늘 승리를 했습니다. 그리 고 또,우리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동부 연합의 대표로 오신 레이첼 여남작이십니다."
우아아아아!
접대용 연설에 불과했지만,사람 들 사이에 큰 환호성이 일었다.
모두 그녀의 일행이 준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희의 요청에 이 자리에 오셔 서 우리를 도와 몬스터들을 처리 해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앞으로 영지를 모두 탈환할 때까 지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영주는 레이첼을 향해 고개를 숙 였다.
그리고 그의 말에 귀족과 상인들 은 손뻑을 쳤다.
"얼렁뚱땅 우리를 붙잡아 둘 작 정인가 보군."
제이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었다.
이야기 듣기로는,레이첼은 사람 들이 영지에서 빠져나올 때까지만 도와주기로 했었다.
하지만,성을 공격하는 몬스터들 을 모두 쓰러뜨리자 영주가 욕심 이 생긴 모양이었다.
영주의 말이 끝나자 레이첼이 자 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영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시 려나."
제이크는 1년 만에 보는 레이첼 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눈을 반짝 이며 지켜봤다.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첼은 영주 에게 먼저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드립니다. 오늘 적을 물리 칠 수 있었던 것은 영주님 말씀대 로 성에 사는 모든 영지민 덕분이 었습니다."
레이첼의 말에 다시 환호성이 일 었지만,아직 레이첼의 말은 끝나 지 않았다.
"하지만,안타깝게도 오늘의 승 리로 영지의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 영지 곳곳에 날아 드는 몬스터들이 있고,몬스터들 에게 점령당한 남쪽 영지들에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북쪽으로 날아 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몬스터들을 모두 쓰러뜨리 기는 했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몰려올 겁니다. 영지민 여러 분들께서는 적들이 몰려오기 전에 빨리 물러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레이첼은 영주의 말과 상관없이 해야 할 이야기를 다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영주의 요청을 둘러서 거 절한 덕분에 홀의 분위기가 차갑 게 가라앉았다.
-전보다 훨씬 패기가 있는데요.
-그러네. 강해지셨어.
자애로운 영주란 분위기가 강했 던 레이첼이 이제는 강단 있고 패 기가 넘치는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영주와 다른 귀족들은 레이첼의 말에 어찌할 줄 몰랐지만,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제이크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루 이와 연맹군은 다른 영지에 있다 고 했지?"
"네,원래 우리도 같이 진격할
생각이었는데,급한 요청이 오는 바람에 몇 사람만 도와주러 온 거 예요. 탈출로를 열 생각이었는데. 저 사람들이 머뭇거리는 바람에 시간만 버렸죠."
이네트가 상석에 앉은 귀족들을 향해 입을 삐죽였다.
"하긴 벌레 놈들까지 나왔는데 모두 쓰러뜨려 버렸으니……
"뭐,실제로 죽인 것은 제시카가 한 거니까."
"정말,제시카 누님 대단했어요. 기사들도 잘라 내지 못한 껍질인 데. 막 잘라 내더라고요."
알리바가 신이 나서 떠들었지만, 곧 이네트에게 한 소리를 듣고 말 았다.
"그러는 너는 전보다 더 잘려 나 가더라."
알리바는 치유력이 올라간 덕분 에 더욱 담대하게 싸우게 되어, 상처도 더 많이 입게 되었다.
치유가 된다고 해도 알리바가 상 처를 입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 던 이네트였다.
그녀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제국군 대신에 제국의 남부를
횡단하는 방어선을 만든다라…… 동부 연맹.
원래 동부 연맹은 제국의 동부 영지들이 검은 몬스터들의 습격에 서 살아남기 위해 모인 세력이었다.
연맹에 속한 대부분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들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했지만,레이첼은 생각이 달 탔다.
어차피 제국의 다른 지역이 검은 몬스터에게 점령당하면 동부 연맹 은 홀로 몬스터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제국군 대신에 연 맹의 군대가 제국 남부를 가로지 르는 방어선을 치자고 영주들을 설득했다.
영주 중에는 과감한 그녀의 말에 반대하는 자도 있었지만,그녀가 연맹의 대표로 황도에 다녀온 이 상 힘의 저울추는 기울어 있었다.
더구나 연맹의 설립 이유가 음직 이지 않는 제국군 대신에 제국을 지킨다는 것이었으니,명분도 그 녀에게 있었다.
뿐만 아니라 레이첼과 함께 연맹 에 파견된 사령관이 대검호 오페
우스 백작이었기에 영주들은 결국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제이크는 영주의 옆에 있는 레이 첼을 바라보았다.
전보다 훨씬 강해졌지만,그녀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다가왔다.
"그런데,이 지경이 되었는데 제 국군은 왜 안 움직이지?"
황제가 아무리 버티고 있다고 하 지만,상황이 이렇게까지 어려워 졌다면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 가 없었다.
"황도에 황제가 없대요. 기사단 을 데리고 북쪽으로 달려갔다고 황도에서 온 사람들이 말하더라고요."
제이크의 물음에 알리바가 대답 을 했다.
"황제가 북쪽으로? 왜?"
알리바가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알리바는 어깨를 으쏙했다.
얼어붙은 산맥.
그건 1년 내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제국 북쪽에 있는 산맥 이 름이 었다.
사람도 짐승도 살기 어려워하는 추운 곳이었기에,이름마저 성의 없이 지어졌다.
이곳에는 추운 곳을 기반으로 하 는 몬스터들이 있었지만,사람들 은 그런 몬스터들이 있는지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춥고 외로운 산맥 중턱에 인간이 만든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탑이었다.
수십 미터는 되는 높은 탑이 눈
덮인 산 중턱에 홀로 서 있었다.
계속되는 눈발에 탑 표면이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어,이 탑의 이름은 오래전부터 '얼음의 탑'이 라고 불리고 있었다.
대륙에 있는 다섯 개의 마탑 중 제일 북쪽에 있는 마탑.
하지만 이 마탑은 다른 마탑과 달리,세상과 격리되어 있었다.
다른 마탑처럼 지하의 유적을 기 반으로 세워진 마탑이었지만,이 곳의 추위는 마법사들이 세상에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탑 주위에 도시가 발전할 수도
없었고,마법사들의 힘을 빌리기 위해 탑까지 오기도 어려웠다.
덕분에 이 마탑은 전투 같은 마 법보다는 연구와 지원을 위한 마 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렇기에,마탑의 마법사들은 제 국 정예 기사들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없었다.
활짝 열린 마탑의 문 앞에는 마 법사들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시체는 마탑 안에 들어가서도 계 속 보였다.
실험실 안에서 어리둥절한 표정 으로 죽은 마법사.
도망치다가 등을 베어 죽은 마법 사.
그리고…… 저항하다가 난자되어 죽은 마법사.
이곳까지 밀고 들어온 기사들은 마법사들을 한 명도 살려 둘 생각 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마탑의 마법사들은 대부 분 죽임을 당했고,그사이 얼음 탑의 탑주는 어린 수습 마법사들 을 데리고 지하 유적으로 몸을 피 했다.
넓은 지하 홀.
알 수 없는 고대의 여러 시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이 지하 유 적은 얼음 마탑의 최종 연구 목표 였다.
"우리도 죽는 건가요?"
어린 마법사의 물음에 늙은 탑주 는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럴 리가. 이 유적의 문은 아 무나 열 수 없는 거란다."
늙은 여탑주의 말에 소년은 억지 로 기운을 차리는 것 같았지만, 아직도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조금 전에 마법사들의 죽음을 눈 으로 본 소년,소녀들이었다.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마법사들 이 기사들을 막아섰고,덕분에 수 습 마법사들은 탑주와 함께 이 지 하 유적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왜 기사들이 우리를 죽이는 거 죠?"
"반란군인가?"
"아니,왕관을 쓴 사람도 있었어."
조금 안정이 되니 수습 마법사들 은 의문을 토해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물음에 탑주는 대 답할 수 없었다. 그녀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새 황제였어. 왜 이곳을 공격한 거지? 아무 쓸데도 없는 곳을..
다른 마법사들은 알지 못했지만, 탑주는 황제를 대관식 때 본 적이 있었다.
피 냄새가 나는 사람이라는 느낌 에 인사만 하고 돌아왔지만,그 황제가 이렇게 직접 마탑을 공격 할 줄 생각도 못 했다.
"조금만 버티면 돼. 저들은 좀 있으면 돌아갈 거야."
금방 돌아갈지는 알 수 없었지 만, 적어도 저들이 유적의 문을 쉽게 부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 했다.
탑주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 연했다.
이 문은 고대의 마법으로 지켜지 는 문이었다.
이곳에 자리 잡은 마법사들이 탑 을 세운 이유가 이 문을 열기 위 해서였을 정도였으니,대마도사가 오더라도 힘들 터인데,하물며 기 사 따위들이 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탑주가 어린 마법사들을 다독이고 있을 때였다.
그그그긍-
커다란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탑주가 놀란 얼굴로 문을 바라봤 고,열리기 시작한 문 사이로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신가,얼음탑의 탑주." 왕관을 쓴 잘생긴 젊은 황제가 탑주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