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제국 남동부 평야에 자리 잡은 네이스 영지의 한 언덕.
그곳에 조금 낡아 보이는 갑옷을 입고 있는 루이가 서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추적 장치를 목표
로 공간 이동을 하기로 한 제이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을 기다리는 루이의 외모가 1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려 보이던 얼굴은 이제 누가 봐도 성인이었고,그에게서 풍기 는 분위기는 관록이 넘치는 기사 처럼 보이게 했다.
담담히 언덕 위를 바라보던 루이 는 곧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사람들의 발에 다져진 너른 언덕 에 강렬한 빛이 나타났기 때문이
었다.
너무도 눈이 부신 탓에 루이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윽고 빛이 사라진 걸 느낀 루 이가 손을 내렸을 때.
그의 눈앞에 반가운 이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레이첼 영주와 두 사제,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제이크와 제시카까지.
"우와,루이다!"
어린 두 사제가 공간 이동 마법 으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휘청거리는
사이에 제시카가 번개같이 달려와 루이에게 매달렸다.
놀란 루이가 몸을 피하려고 했지 만,전보다 훨씬 빨라진 제시카의 속도에 그만 잡히고 말았다.
루이는 질겁을 하며 제시카를 떼 어 놓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제시카가 교 묘하게 움직여 루이의 손을 피했다.
"어,반항이 심해졌네? 설마,애 인이라도 생겼어?"
제시카는 장난으로 물어보았지 만,뒤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그녀
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루이 경은 한참 열애 중이에요. 너무 심하게 하지 마세요."
하지만 레이첼의 말에 제시카의 눈은 오히려 더욱 반짝거렸다.
"정말? 어떻게 된 건데? 상대는 누구야? 빨리 말해 줘!"
루이는 도움을 받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모두가 그를 외면 했다.
더구나 제이크마저 무척이나 궁 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릴 생 각이 없어 보였다.
"설명할게요. 우선 귀환 보고부
터 하고요."
결국,두 손을 든 루이는 뒤에 설명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곤 곤 란한 분위기를 모면했다.
루이의 약속을 받고서야 제시카 도 장난을 멈췄다.
이어 일행은 루이를 따라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와! 뭐가 이렇게 많아?"
언덕 아래 펼쳐진 광경에 제시카 가 입을 딱 벌렸다.
제이크도 무척이나 놀란 얼굴이 었다.
언덕 아래 광활한 평야에 엄청난
숫자의 천막이 펼쳐져 있었다.
"거의 제국의 사분의 일 이상의 영지가 뭉쳐서 만든 군세입니다. 작을 리가 없죠."
루이가 일행에게 자랑스럽게 이 야기했다.
"오호! 대단하네."
제시카가 그의 말에 휘파람을 불 며 감탄했지만,제이크는 조금 표 정을 굳혔다.
이런 거대한 군대를 황제와 제국 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그는 담담한 얼굴로 언
덕을 내려가는 레이첼을 보고는 표정을 풀 수 있었다.
보아하니 레이첼은 완전히 결심 을 굳힌 것 같았다.
그렇다면,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앞으로 달릴 뿐이었다.
숙영지에 다가가자 병사들이 루 이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그중에는 다른 영지의 병사들도 있었다.
그 모습에 제시카의 장난이 다시 시작됐다.
"오,루이 기사님이 엄청 인정받 나 봐."
"아니에요. 기사로 보이니까 다 인사하는 거예요."
"아닌데. 저건 열과 성의를 다해 서 하는 인사인데?"
제시카의 장난이 심해지는 것 같 자 알리바가 참견을 했다.
"그동안 루이 기사님이 앞장서서 싸워서 많은 병사의 목숨을 구했 어요. 그래서 다들 루이 기사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오오-!"
제시카의 놀림에 루이는 그저 멋 쩍은 듯 곤란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숙영지에 점점 다가갈수록 루이 뿐만 아니라 두 사제를 향해 인사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 는 것은 레이첼이었다.
루이나 사제들에게 인사하는 병 사들은 레이첼에게 경례를 올리는 병사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어떤 부대는 간부 인솔하에 단체 경례까지 하는 바람에, 제이크는 전생에 봤던 사단장의 행차를 다 시 보는 것 같았다.
아쉽게도 제이크와 제시카는 알 아보는 사람이 없어 멀뚱하게 걸
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숙영지 안에 들어간 그들이 아스 굴론 영지 부대가 있는 곳에 접근 하자, 드디어 두 사람을 알아보는 병사들이 나타났다.
"설마,마법사님?"
"맞아! 마법사님이 돌아오셨다!"
"기적의 마법사님이 오셨어!"
"정말?"
"어디,어디!"
한 명이 제이크를 알아보자,그 소식은 부대 전체로 퍼져 나갔다.
놀란 병사들이 천막 안에서 뛰어
나왔고,멀리서 소란을 듣고 병사 들이 달려왔다.
"와! 마법사님,살아 계셨군요!"
"와! 와!"
연맹군 전체가 들릴 정도의 큰 환호성이 아스굴론 영지병들에게 서 터져 나왔다.
거기다,제이크를 향한 환호성 사이사이에 제시카를 환영하는 소 리도 들려왔다.
"제시카 도둑님도 살아 있었군 요!"
"어,여왕벌 파티장도 무사했네." "제시카,살아 있었잖아! 술값
갚아!"
마지막으로 들린 말에 제시카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누구는 영웅 취급이고 누구는 여왕벌 취급이냐!"
제시카가 몰려든 병사들을 향해 빈 주먹을 휘둘렀고,병사들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레이첼이 그 모습을 보고 잔잔 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병사들과 가장 가까운 건 제시카인 것 같네요."
그 말에 동의하듯 제이크가 고개 를 끄덕였다.
그렇게 일행은 영지병의 격렬한 환영을 받은 뒤,바로 연맹군의 지휘부가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사령관에게 복귀 신고를 해야 했 기 때문이었다.
숙영지 중앙에 있는 커다란 천막 이 연맹군의 지휘부가 있는 곳이 었다.
그 앞에 도착한 레이첼은 일행을 이끌고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에는 마침 회의 중이었는 지,사령관인 오페우스 백작 이외 에 다른 귀족과 기사들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사 레이첼. 임무를 마치고 복 귀했습니다."
천막에 들어선 레이첼은 제일 상 석에 앉은 백작을 향해 경례했다.
그녀의 격식에 맞춘 인사에 백작 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도 말했지만,그렇게 격식 을 차릴 필요는 없는데……
레이첼은 실질적으로 이 동부 연 맹군의 영주들 대표이자,군의 실 세였다.
공식적으로 백작이 사령관직을 맡고 있기는 했지만,어디까지나 황실과 트러블을 없애기 위한 정
치적인 자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레이첼은 항상 백작에게 격식을 갖추었다.
덕분에 다른 영주들도 딴말을 못 하고 있었지만,백작은 그녀에게 계속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백작은 자기도 모르게 작게 한숨 을 내쉬고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 었다.
"늦지 않게 왔군. 그래,철수는 무사히 마쳤나?"
"네,모두 후방에 있는 아젠티노 영지로 철수했습니다."
"무사히 철수했다는 것을 보니 다행히 벌레 놈들은 나타나지 않 은 듯하군. 수고했네."
백작의 말과 달리 벌레 몬스터들 이 등장했었지만,레이첼은 그 이 야기를 이곳에서 꺼내지는 않았다.
시시콜콜 이야기를 꺼내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회의가 끝난 뒤 따로 백작에게 자세히 보고할 때 말할 생각이었다.
"응? 그런데 앰버가 보이지 않는 군. 그리고 못 보던 사람들이 있
는 것 같은데. 아니,낯은 익군. 어디서 봤던가……?"
내전 때 잠깐 스쳐 가듯이 보기 만 했었기에 백작은 제이크와 제시카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 복귀한 마법사와 마나 사용자입니다."
"앰버 대신 온 모양이군. 환영하 네. 레이첼 영주 옆에서 잘 도와 주게……. 이런."
멈추었던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두 사람에게 대충 인사를 보내던 백작은 제시카를 보며 눈살을 찌
푸렸다.
"앗,들켰다."
제시카가 작게 중얼거림과 동시 에 백작의 마나가 폭발적으로 뻗 어 나왔다.
그에 놀란 기사들이 자기도 모르 게 검을 움켜잡았고,천막이 바람 도 없이 출렁거렸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마나는 제시카 앞에서 다른 마나를 만나 움 직임을 멈췄다.
마나 간섭이었다.
그렇게 제시카의 마나 장벽을 두 드리던 백작의 마나가 다시 수그
러들었다.
백작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제국 역사상 처음인가. 대단하 군."
황당한 표정으로 제시카를 바라 보던 그는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지만, 지금은 그 일에 신경 쓸 때가 아 니었다.
"대단한 사람들을 데려왔군."
백작은 레이첼을 향해 의미심장 한 말을 한 뒤,그녀를 회의에 참 석하게 했다.
"작전을 다시 점검 중일세. 늦지 않게 자네가 돌아왔으니,피곤하 지 않다면 회의에 참석하는 게 좋 을 것 같네."
백작의 말에 레이첼은 빈자리에 앉았다.
레이첼이 앉자 루이와 두 사제는 다시 천막을 나섰고,레이첼 뒤에 는 제이크와 제시카가 그녀를 보 좌하기 위해 서 있었다.
루이와 앰버가 섰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선 것을 보고 다른 귀족과 기사들이 의아해했지만,그들의 관심은 회의가 진행되면서 사라졌
다.
자리에 앉은 레이첼은 다른 영주 와 귀족들과 눈인사를 했고,참모 는 새로 참석한 레이첼을 배려해 다시 작전을 설명했다.
"이번 작전은 남쪽에서 올라오는 검은 몬스터,일명 파괴자들의 전 진을 막고,제국을 지키기 위한 방어 작전이자 진격전입니다."
참모는 정면에 걸려 있는 제국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 갔다.
"이곳 네이스 영지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다섯 개 영지를 관통해
서 제국 남부를 가로지르는 방어 선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가 가리키는 위치에는 제국 남 부를 잇는 높지 않은 산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남부 산맥이라는 자연적인 장애 물을 기반으로 방어선을 치는 것 으로,아쉽게도 산맥이 이어지지 않은 영지 한 곳에 벌레 몬스터가 등장해서 완벽한 방어선을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말대로,지도에는 산맥을 이어 그려진 선 가운데 위쪽으로 움푹 팬 곳이 있었다.
"완벽한 방어선을 만들 수 없게 되었지만,그래도 그 영지 이외에 는 산맥을 벽으로 하여 방어선을 만들면 파괴자들의 공격을 오랜 시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모의 말에 몇몇 영주들이 얼굴 을 찌푸렸다.
"그 말은 결국,방어선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이잖은가. 그 뚫린 영 지를 통해 벌레들이 사방으로 퍼 져 나가면 어떻게 막을 생각인 가?"
한 영주가 인상을 찌푸린 영주들 을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연맹 영지들 밖 으로 나가지 말자고 했던 영주들 로,작전에 틈이 보이자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완벽하게 방어선이 만들어 진 것은 아니지만,그래도 영지 하나만 막으면 되기 때문에 병력 에 집중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말입니다. 저 벌 레들이 산맥을 못 넘어온다는 보 장도 없잖습니까."
그들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이런 것도 하지 않는다면 제국은 저 검은 몬스터들에게 속
수무책으로 유린당할 뿐이었다.
반대하는 영주들도 그것을 잘 알 고 있었기에,사실 지금 말은 일 종의 푸념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때,천막 안에 뜻밖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점령당했다는 영지를 수복하 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모두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을 꺼낸 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레이첼 영주를 따라온 젊은 마법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