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연맹군의 본진이 밀고 들어오자, 영지는 빠르게 안정되었다.
그러는 중에 마을이나 산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발견됐다.
하지만 그 수는 양손으로 셸 정
도에 불과했다.
"어떻게 수복은 했지만,영지를 지키기는 쉽지 않겠군."
평야를 바라보던 오페우스 백작 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상 중턱에 세워진 사령부 천막 앞에서 영지를 보는 중이었다.
백작의 말에 레이첼이 고개를 끄 덕였다.
검은 몬스터의 비행 고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때문에 다른 영지들 은 높은 산맥을 방패로 삼을 수
있었지만,산맥이 없는 이 영지는 그럴 수 없었다.
너른 평야와 제국 남부의 교통로 라는 장점이 지금은 오히려 단점 이 된 것이다.
"아무래도 성을 보수해서 방어 거점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산이 없으니 부서진 성으로나마 대신해야 했다.
"흠,자네 영지가 이 영지를 담 당한다고 했는데. 괜찮겠나?"
"영지 후계자가 원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레이첼의 말에 백작은 얼마 전에 본 소년과 소녀를 떠올렸다.
망한 영지의 후계자는 백작 앞에 서도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말했 었다.
"하하,거참 맹랑하군. 영지를 줄 테니 지켜 달라니."
"저는 후견인만 맡을 생각입니다. 영지 문제는 그 아이들이 큰 다음에 돌려줄 생각입니다."
백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대에게 손해만 되지 않 는가? 영지민도 없고,지키기도 쉽지 않은 영지인데."
나중에 영지를 가지게 된다면 모 를까.
영지를 지켜 주고 나중에 돌려준 다니,사람 좋은 것도 정도가 있 었다.
"아무리 빈 영지라지만 그런 식 으로 빼앗고 싶진 않습니다. 애들 도 귀엽고요."
"흠,그냥 가지자고 하는 사람은 없나? 그 무시무시한 마법사 같은 사람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백작은 슬쩍 주위 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마법사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 보게 된 마법사의 마법 은 대검호인 백작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천의 군대로도 막을 수 없던 몬스터들을 한 군데로 몰아서 쓸 어버리다니.
수십 년 전 대마도사의 마법을 본 이후로 이렇게 놀란 것은 처음 이었다.
'엄청난 검호가 나왔다고 좋아했 더니,더 괴물 같은 마법사가 있 었어.'
더구나 병력 운영도 마법사가 했 다고 하니,레이첼 여남작 손에
신검이 쥐어진 꼴이었다.
레이첼은 백작의 말에 고개를 저 었다.
"오히려 더 권하던데요."
레이첼은 무너진 성을 떠나기 전 에 제이크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는 아직 10대 초반인 소년을 보며 말했었다.
"나중에 영지를 돌려주게 되든, 그냥 영지를 먹든,무조건 후견인 이 되십시오. 절대 그를 놓치면 안 됩니다."
뜻밖의 대답에 레이첼이 의아해 하자,제이크는 이렇게 답했다.
"복제 세상에서 제국이 내전에 빠졌을 때,제일 두려운 책사가 그였고,괴물과 싸울 때 그가 마 지막까지 인류의 작전을 세웠습니다."
책략가 애드원 자작.
제국을 지옥 같은 내전으로 빠뜨 린 자였고,괴물들의 침략을 끝까 지 버티게 만든 자였다.
"흠,예상과 다르군. 마법사답게
냉정한 성격으로 보였는데."
물론 제이크는 냉정하고 이성적 으로 권유한 것이었다.
"어찌 됐든,여남작이 그렇게 결 정했다면 할 수 없는 게지."
대신 그는 다른 일을 물어보았다.
"그럼 그 마법사는 지금 저 성에 있는 건가?"
"지금 성을 복구 중이에요."
"지금 복구한다고?"
백작은 의아한 표정으로 성을 바 라보았다.
그때,부서진 성에서 빛이 솟구
쳐 올랐다.
무너진 성이 스스로 복구되고 있 었다.
무너진 영주성의 비밀 창고.
여러 가지 보물을 숨겨 둔 그곳 은 제이크의 예상대로 마도 제국 의 유적이었다.
던전급 유적은 아니었지만,마법 진 형태는 남아 있었다.
이 영주성도 유적의 위에다 성을 지은 것이다.
물론,주인이 있는 성이었다면 유적이 있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성은 이미 비어 있었 고,성의 후계자는 영지 전체를 레이첼에게 떠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이 유적 마법진을 그 냥 놔둘 이유가 없었다.
제이크는 아이들과 병사들을 보 내고,바로 버려진 마법진을 되살 리기 시작했다.
살펴본 결과,이곳에 있는 마법 진은 아쉽게도 보존 마법진이었
다.
온도를 일정하게 만들고 신선도 를 유지하는 보존 마법진.
마도 제국 때도 이곳은 창고로 사용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낙담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마법진에 자신 있 었다.
마법진을 구죽하는 것도, 기존에 있는 마법진을 개조하는 것도.
보존 마법진을 공간 이동 마법진 으로 개조하는 것은 차 한 잔 마 실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마법진을 개조한 뒤,제
이크는 마법 가방에서 큼지막한 마석 하나를 꺼냈다.
대수림을 넘어오면서 구한 마석 이었다.
그는 마석을 마법진 중앙에 올려 놓고 개조한 마법진을 활성화했다.
위잉-
묵직한 소리를 내며 마법진이 가 동되 었다.
이윽고 마법진에서 환한 빛이 쏟 아져 나왔다.
그런데 제이크는 여전히 그 자리 에 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게,지금 마법진이 활 성화한 마법은 이곳에 있는 사람 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는 마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곳에 있는,사람 이 외의 것을 부르기 위한 것이었다.
이윽고 빛 속에서 반투명한 요정 이 솟아올랐다.
아스굴론 영지의 수호신이자,던 전 에고인 빈크루였다.
[부르셨나요?]
과거 대수림과 붙은 장벽에서 부 른 것처럼,제이크는 이 성에 있 는 공간 마법진을 매개로 그녀를
부른 것이었다.
물론,그녀의 본체는 아스굴론에 있었다.
인간과 다르게 공간 이동 마법진 의 가동이 멈추면 반투명한 그녀 의 모습은 이곳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제이크는 빈크루에게 성의 복구 작업을 지시했다.
이미 아스굴론 영주성을 복구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이 성의 복 구도 어렵지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성이 복구된다는 것은,
아스굴론의 영주성처럼 이곳도 빈 크루의 던전이 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빈크루가 뜻밖의 말을 건 넸다.
-공간 이동 마법진이 멈추면 평 범한 일반성에 지나지 않게 될 거 예요.
"그럼,마법진을 안 멈추면 되잖아."
-아...
그렇게 된다면 마석의 수명이 짧 아지겠지만,던전화의 강점은 마 석의 수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음,그런데 이렇게 되면 나중에
도 못 돌려줄 것 같은데."
돌려줘도 상관없다고 레이첼에게 말을 하긴 했지만,아무래도 조용 히 먹어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 고 생각하는 제이크였다.
그사이,성벽 위로 붉은 선들이 내달렸다.
무너진 돌들이 성벽을 타고 음직 였고,이내 스르륵 허물어졌던 벽 들이 메꿔졌다.
한편에는 한 곳에 쌓은 돌과 흙 이 뭉쳐져 골렘들이 만들어졌다.
골렘이 움직여 성을 보수해 나갔다.
이제,사람이 없어도 얼마 지나 지 않아 성은 제 모습을 되찾을 것이었다.
영지를 되찾고,아스굴론 영지병 일부가 영지에 남았다.
남은 병력은 계속 서쪽으로 향했다. 동부 연맹군은 새로운 영지에 서도 환영을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을 구하러 온 병 사들이었다.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것이 당연 했다.
그렇게 몇 개의 영지를 지나니, 이제 동부 연맹군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없을 만큼 그 수가 많아 졌다.
협력하기로 한 영지가 동부를 넘 어 남부와 서부까지 포함되었고, 모여든 병사와 용병,민간인들이 제국 전체를 아우를 정도였기 때 문이었다.
동부 연맹군은 이제 제국 연맹군 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연맹군이 병력을 움직인 지 한 달
결국,연맹군은 방어선을 완성했다.
마중 나온 서부 영지들의 영주들 이 연맹군의 대표인 레이첼과 반 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연맹군에서는 그 누구도 레 이첼을 얕잡아 보거나,우습게 보 는 사람은 없었다.
두 개의 영지를 가지고,강력한 영지군과 친위대를 이끄는 영주.
게다가 오페우스 백작이 인정한 대검호와 고대 마도 제국의 후계
자가 분명한 마도사를 데리고 있 는 레이첼이었다.
무력으로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다.
거기다,제국의 창업 공신 중 하 나인 루테리아의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였다.
그녀가 신조를 어깨에 얹고 등장 하면,초대 황제의 친우였던 루테리아 공작을 보는 것 같았다.
이제 황제의 예비 황태자비였다 는 약점은 누구도 꺼내지 않는 과 거사가 되어 버렸다.
방어선이 완성되었다고,제국으
로 검은 몬스터가 못 들어오는 것 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상대는 비행 몬스터 였으니까.
큰 쇠뇌인 발리스타를 동원하고, 마법사들을 배치한다고 해도,산 맥을 넘어가는 놈들이 없을 리가 없었다.
방어선을 넘어 간헐적으로 몬스 터들이 후방을 습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방어선이 뚫리기도 했다.
하지만,방어선은 금방 메꿔졌다. 후방으로 침입한 한두 마리의 몬 스터들 정도는 영지들의 힘으로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뚫린 방어선은 수많은 인 력으로 메꿔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처음 생각했던 인해전술이었다.
다른 방어선들처럼 벤드로 영지 도 여러 번 검은 몬스터들의 침입 을 받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영지로 들어 선 몬스터들은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곧바로 영주성으로 향했다.
영주성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날아오는 몬스터에 처음에는 질겁
을 했지만,요즘은 몬스터보다 귀 신이 붙은 성을 더 무서워했다.
몬스터가 성을 공격하자,성이 살아 있는 것처럼 반격해 댔기 때 문이었다.
성벽을 이루는 바위가 스스로 날 아가지를 않나,골렘이 움직여서 몬스터를 공격하지를 않나.
덕분에 병사들 사이로 제이크 마 법사가 악마를 성에 불러들였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그 소문도 조금씩 잠잠 해 지고 있었다.
"갈수록 날아오는 놈들이 줄어드
는 것 같지 않아?"
영주성 성벽 위를 지키던 병사가 옆 병사에게 말을 붙였다.
"그렇지? 이제는 골렘도 안 음직 일 정도야."
"신기하네,왜 숫자가 확 줄어들 었을까. 여기만 그런가?"
"소문을 들으니,방어선 전체가 한가하다는데? 며칠 동안 보지 못 했다는 곳도 있고."
"어떻게 된 거지? 이대로 끝나는 건가?"
"그럴 리가,남쪽은 아직 엉망이 잖아. 한가해지긴 했지만,우리도
지키는 게 고작이고."
"껍,그건 그렇지. 그럼 왜 갑자 기 안 보이는 거지?"
멀리서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던 루이는 고개를 들어,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쪽에는 이곳 병사들을 위해 고 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힘내세요.'
루이는 그들에게 조용히 응원을 보냈다.
같은 시각.
제국과 레타니아 왕국의 국경 지 대 숲속.
그곳에는 수십 명의 마법사와 기 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숨어 있 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검은 몬스터가 지나갔다.
당연히 들킬 거리였지만,제이크 의 은신 마법 덕분에 몬스터는 원 래 가던 방향으로 날아갔다.
검은 몬스터가 사라지고 잠시 뒤,제이크의 머릿속으로 메시지 마법이 들려왔다.
-둥지 발견! 남쪽으로 5만 걸음 입니다.
메시지 마법을 들은 제이크가 고 개를 돌렸다.
그의 주변에는 수십 명의 마법사 와 기사가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맹군이 추리고 추린 기사와 마 법사로 구성된 이들은 몬스터들을 줄줄이 뽑아 내고 있는 적의 둥지 를 타격하기 위한 타격조였다.
원래 연맹군은 방어선을 친 뒤, 조금씩 적을 밀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제이크가 새로운 작
전을 제안했다.
바로,몬스터들을 생산하는 둥지 를 소수의 인원으로 타격하자는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이었으면 바로 무시되었겠지만, 제이크의 말을 무시할 사람은 없었다.
제이크의 계획은 바로 사령부의 결재를 받게 되었고,이렇게 타격 조를 꾸려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벌써 여러 둥지를 파괴한 상황이었다.
방어선이 한가해지고 있는 이유
는 전적으로 이들 덕분이었다.
-다음 타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출발하죠.
제이크가 지시를 내리자 마법사 들과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동시에 꽤 많은 마법사 와 기사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제시카가 제이크에게 다가오며 작게 한마디 했다.
"제이크,네가 이상한 작전을 짜 는 바람에 다들 힘들어하잖아. 진 짜 나빴어"
"기분 나쁠 게 뭐가 있다고 그래요."
"흥,그럼 나도 다른 사람하고 바꿀까?"
"바꾸고 싶으세요?"
"홍,흥."
투덜거리는 제시카의 허리를 손 으로 감으며 제이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뒤를 따라 다른 마법사들도 기사를 안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서로 껴안은 남자 기사와 남자 마법사들은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 럼 보였다.
그렇게 제이크가 이 세상에서 처 음으로 만든 공수 부대가 다음 몬
스터의 둥지를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