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황제가 대관식을 한 지 아직 몇 년 지나지 않았다.
원래 이맘때라면 제국 전체가 부 흥하는 시기였다.
새로 뽑힌 능력 있는 신하들과
새로 찾게 된 던전들,그리고 역 시 새로이 시행되는 안정적인 정 책.
모두 황제들이 미래를 보고 온 덕분이었다.
하지만,이번 황제는 그때와 달 탔다.
물론 몇 가지는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현 황제인 그는 제국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자신의 재능 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미래의
황제를 보고 온 제이크까지도.
동쪽과 남쪽으로 향하는 제국군 은 황제의 군대로 불렸다.
영지를 약탈하고,제국민을 끌고 가는 군대를 차마 제국군으로 부 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제군은 군대가 지나가는 영지 들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만행은 거기에 그치지 않 았다.
황제군은 지나가는 곳마다 병사 들을 징발하고 곡식을 약탈했다.
또한 영주를 협박해서 영주성의
재물을 털었다.
분명 제국의 영지고,황제의 땅 이었지만,그들은 적국을 약탈하 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부대 내에도 반대하는 사람 들이 나왔다.
하지만 각 부대를 지휘하는 근위 기사와 마법사들이 그들을 용서하 지 않았다.
점점 부대는 공포와 강압으로 유 지되었고,그 분위기는 황도의 주 변 영지를 넘어 제국 전체에 퍼져 나갔다.
그 소식은 정찰대와 마법사에 의 해 바로 연맹군에 알려졌다.
연맹군은 방어선을 지킬 최소한 의 병력만 남기고 북으로 향하던 중이 었다.
"막무가내이기는 해도, 병력과 물자를 모으기는 최고이군요."
"정말 황제는 제국을 멸망시킬 생각인가?"
"병력은 무시무시하게 모이겠 군."
"근데 그런 부대가 유지될 수 있 겠습니까?"
"뭐,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지
만,근위 기사단과 마법사들은 맹 목적으로 따르고 있다고 하니,굴 러는 가겠네요."
회의에 모인 기사와 영주들은 황 제군 방식에 혀를 찼다.
인심이 돌아선 황제가 어떻게 연 맹군을 상대할지 궁금했는데,아 예 황제는 인심 같은 것은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그 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연맹군 입장으로는 상대하기에 무척이나 위험한 적이었다.
"각 영지에 연락을 보내서 추가
로 영지병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황제군이 동부 연맹의 영역에 도 착하기 전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모의 보고에 동부 영지의 영주 가 입을 열었다.
"그럼,우리도 빨리 합류해야죠." 하지만 그의 말은 바로 남부 영 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곳 남부 영지들은 어떻게 하고요?"
반면 동부 영지의 영주들은 처음 의견에 동의했다.
"추가로 모집하는 영지병으로는
황제군을 막을 수 없어요. 이쪽이 주력입니다. 우리가 합류해야 싸 움이 됩니다."
"남부 영지들을 버린다는 이야기 입니까?!"
영주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영 주들은 두 파로 갈라서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동쪽과 남쪽.
두 갈래로 나뉜 황제군은 연맹군 에 분란을 일으켰다.
원래 연맹군의 주력은 동부 영지 의 영지군이었다.
당연히 동쪽으로 향하는 황제군 을 막아야 했지만,그렇다고 남쪽 으로 향하는 병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연맹군의 시작은 동부 영지들이 었지만,지금 연맹군은 '동부'라는 이름을 빼 버렸기 때문이었다.
지금 연맹군의 비율에서 동부 영 지의 비율은 반 정도였다.
물론,황제군의 진격에 걸리는 남부 영지들은 몇 안 되었지만, 영맹군의 단합을 위해서는 남부
영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던 영주들은 결국 중 앙에 앉아 있는 레이첼을 바라보 았다.
물론,그녀의 영지도 동부 끝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그녀는 이 연맹군의 수장이자 공명정대한 것 으로 유명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그 녀에게 향했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외통수인데?"
"한쪽 편 들면 바로 욕먹을 것 같은데."
"과연 무슨 말로 피해 갈지 궁금 하군."
뒤쪽에서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 려왔지만,레이첼의 표정은 변하 지 않았다.
영주들이 싸우는 사이에 그녀는 그녀의 참모. 제이크와 메시지 마 법으로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내가 말할게요.
-아뇨,제가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레이첼은 의아한 표정으로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제이크가 앞으로 나서는 일은 드 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제이크의 요청을 받아들 였다. 그가 나선다면 나서는 이유 가 있을 게 분명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 까."
사람들은 레이첼 여남작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했다.
항상 뒤에서 지켜만 보던 마법사 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영주도 아니고,고위 귀족도 아
니었지만,젊은 마법사의 말을 무 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가 원하는 대로 해 주면 되 지 않을까요?"
하지만,마법사가 꺼낸 말은 마 법사답게 뜬금없었다.
사람들을 대표해서 영주 한 명이 그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황제가 군을 움직인 이유 중 하 나가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한 길 을 열기 위해서잖습니까."
제이크의 말에 사람들은 생각을 더듬었다.
확실히 황제의 포고문에는 그런 내용도 들어 있었다.
물론,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 모 두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명분을 삼기 위해 넣은 문구 아 니었습니까?"
"자기편 영지를 박살 내는 황제 가 명분을 삼기 위해 그런 문구를 넣을 것 같진 않군요."
확실히 황제는 미치광이였지만, 거짓말쟁이는 아니었다.
거기다,제이크는 아인족 땅을 가기 위해 대수림을 뚫어 버렸던 미래의 황제를 알고 있었다.
제이크는 말을 이어 갔다.
"황제가 몬스터에게 가는 길이 필요하다니까. 우리는 길을 내주 면 되지 않을까요?"
이어지는 말에 남부 영주들과 기 사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당신도 남부 영지들을 버리자는 이야기인가!"
"다 똑같은 놈들이군."
"이래서야,황제와 뭐가 달라?" 동부 영주들은 만족한 얼굴로 고 개를 끄덕였지만,남부 영주들은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바로 전까지 영지를 구해 준 영
웅으로 치켜세웠건만,의견이 갈 리니 순식간에 대우가 달라졌다.
그때 레이첼이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백작처럼 검으로 두들길 수도 있 었지만,그녀는 그저 영주들이 조 용해지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소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제이크는 레이첼에게 고개를 숙 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황제군을 그냥 놔둔다면 남부 영지들에 큰 피해를 줄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유도만 잘 할 수 있으면 황제군을 우리가 원하
는 방향으로 몰 수 있을 겁니다." 제이크 말에 남부 영주들이 관심 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유도된 영지는 박살 날 게 분명하잖아."
한 영주가 투덜거리긴 했지만, 한 영지만 박살 나고 만다면 다른 영지는 무사할 수 있었다.
자신의 영지만 무사하다면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영지를 뽑을 건 가? 제비뽑기? 아니면 다수결?"
좀 전에 말을 꺼냈던 영주가 주 변을 둘러보며 말을 더했다.
그러자 관심을 보였던 영주들이 고개를 돌렸다.
"이놈이나,저놈이나."
제이크는 투덜거리는 영주를 보 고는 속으로 말했다.
-적어 놔. 차기 사법관으로.
-네? 계속 딴지를 늘어놓던 영 주인데요?
-그러니까 차기 사법관 감이야.
-그냥, 반대만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잖아요.
-너도 딴지 전문이잖아.
- 흥.
제이크가 그를 이번에 처음 보았
다면 파티마의 말이 맞을지도 몰 탔다.
하지만,제이크는 복제 세상의 미래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 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영주이자, 관리.
지금 눈앞에 있는 중년의 영주도 그때의 노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제이크는 회의실을 쭉 둘러보았다.
아는 사람도 있고,모르는 사람
도 있었다.
복제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 람도 있었고,악명을 떨치던 사람 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 상황도 다르 고,나이도 달랐다.
제이크도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지는 않았지만,그가 알고 있 던 정보는 이미 레이첼에게 전해 주었다.
군대의 편성도, 관리의 직책도 미래의 정보와 무관하게 진행되지 는 않을 것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것까지 걱정
할 때가 아니었다.
"제비뽑기 같은 것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황제군을 유인해도 괜찮을 영지가 하나 있 습니다."
"맞다. 거기가 있었지?"
영주들은 제이크가 말한 영지가 어디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영지민이 없는 영지.
얼마 전까지 몬스터에게 장악되 었던 영지.
벤도르 영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귀족 한 명이 질문을 던졌다.
"황제군의 유인이 실패하는 것은 둘째 치고,벤도르 영지까지 유인 한 뒤에 황제군이 몬스터들을 공 격 안 하면 어떡할 겁니까?"
비어 있는 영지를 장악한 뒤에 측면에서 다른 영지를 공격해 오 면 방어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터 였다.
다른 이들이 그의 말에 다시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방금 질문한 귀족도 체크해 둬.
-네에,네에.
파티마에게 말을 남긴 뒤,제이크는 귀족의 말에 대답했다.
"황제군이 몬스터를 공격하지 않 아도 상관없습니다."
"네?"
"황제군만 유인하라는 법은 없잖 습니까? 몬스터도 충분히 유인할 수 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회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물론,다른 마법사들은 불가능했다. 제이크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지만,제이크에게 증명해보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대 마법사가 어디까지 가능한 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더 이상 반대가 없자,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그럼,제이크 마법사의 의견대 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나가 실린 레이첼의 말에 회의 실이 조용해졌다.
"연맹군을 둘로 나눕니다. 주력 은 동부 영지로 향하고,남부에 남는 것은 황제군을 유인하기 위 한 유격대 위주로 편성합니다."
레이첼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동부 방어를 담당할 부 대장은 오페우스 백작입니다."
갑작스러운 지명에 백작이 고개 를 저었다.
"저는 맡을 수 없습니다. 지금 참관인 자리도 어색한데 부대장이 라니……
그의 말에 레이첼이 미안한 얼굴 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황제와는 인연이 끝났잖아요. 다른 귀족들도 다 죽은 것으 로 알고 있습니다."
백작은 레이첼의 말에 한숨을 내 쉬었다.
그녀의 말대로 황도에 있는 그의 기반은 모두 사라졌다.
제국군은 마법사와 근위 기사 위 주로 재편되었고,그와 친한 기사 들과 귀족들은 모두 목이 잘렸다.
전에 온 소식에 의하면 그의 집 도 모두 털리고,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자리에서 물러났지만,이미 그는 황제의 적이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백작 이상으로 실력이 있는 사람은 이 연맹군 안에 없었다.
"차라리,레이첼 여남작이 맡으
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백작은 마지막으로 레이첼을 물 고 넘어졌지만,그녀는 고개를 저 었다.
"저는 여기에 남을 겁니다."
"그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바로 사방에서 반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레이첼이 동부로 갈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황제군을 유인하려면 유격대 정 도로 부족합니다. 미끼가 필요해요. 그리고,미끼로는 저 이상 가
는 사람이 없습니다."
레이첼은 이어지는 마지막 말을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그리고,내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 법사가 나를 지켜 줄 거예요.'
레이첼은 힐끗 고민에 잠긴 제이크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