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동쪽으로 향한 본대는 다행히 황 제의 군대보다 빨리 동부 영지에 서 출발한 영지군과 합류할 수 있 었다.
그들은 얼마 전 내전을 일으켰던
프랑코 영지의 남쪽 평야에 병력 을 주둔시켰다.
물론 내전으로 엉망이 된 프랑코 영지는 어느 편도 들지 않겠다고 했지만,황제군도 연맹군도 관심 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연맹군 본대가 평야에 진 을 친 지 사흘 뒤,황제군이 평야 로 들어섰다.
황제군 병력은 벌판을 가득 메웠다.
추가된 병력까지 10만이 넘는 병력을 자랑하던 연맹군을 까마득 히 넘은 규모였다.
"너무 정석인데……
오페우스 백작은 벌판을 가득 메 운 적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유격대도,별동대도 없 는 겁니까?"
"네,정찰대와 마법사의 확인이 끝났습니다."
앰버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아스굴론과 레타니아 영지의 후 발대를 데리고 온 앰버는 그 자리 에서 참모로 임명되었다.
영지 마법사에 귀족,거기다 연 맹군 수장의 친우라는 점에서 그
녀는 참모로 쓰기 딱 좋았다.
비록 당사자인 앰버는 한숨을 내 쉬었지만.
"뭐,무지막지한 숫자로 봐서는 모두 끌고 온 것은 맞는 것 같은 데"…
벌판을 가득 메운 황제군은 연맹 군 전체를 질리게 할 정도였다.
"근데 쓸 만한 애들은 거의 보이 지 않잖아. 다 어디 간 거지?"
기사의 뛰어난 시력은 멀리 적군 의 모습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 었다.
대다수가 죽창에 쇠스랑을 들고
있었다.
제국군은 창과 나무 방패를 기본 무기로 하고 있었다. 보통 징집병 에게 필수적으로 지급되는 무기들 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황제 군에는 그런 기본 무기를 들고 있 는 병사가 삼분의 일도 보이지 않 았다.
"정말,무기도 주지 않고 전부 끌고 나온 건가?"
백작은 나지막이 혀를 차고는 연 맹군을 돌아보았다.
숫자는 반도 되지 않지만,그래
도 꽤 건실한 군대였다.
후발대로 온 병력은 농사를 짓던 평민들이 꽤 껴 있어서 아쉽긴 하 지만,그래도 험난한 동부의 영지 민들이 었다.
특히 앰버가 데리고 온 두 영지 의 병력은 당장 기존 연맹군과 차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럼,시험을 해 봐야겠군."
아직 상대가 진형을 갖추지 못하 고 있었다. 백작은 이 기회를 놓 칠 생각이 없었다.
"우선 마법사부터."
백작이 앰버에게 지시를 내렸다.
앰버는 바로 천막을 나와 궁수에 게 신호를 보냈다.
슈우웅.
사령부가 있는 천막에서 붉은 연 기를 뿜는 화살이 솟구쳤다.
이어 연맹군 곳곳에서 불덩어리 와 마나볼,얼음 화살이 황제군을 향해 날아갔다.
그 가운데는 앰버가 만든 특제 화염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법사들 주력이 이곳에 없어서 그런지 영 시원찮구만."
적진을 향해 날아가는 마법들을 보고 백작이 입맛을 다셨다.
백작의 말과는 상관없이 마법들 은 꾸준히 날아가 황제군에 도달 했다.
당연하게도 황제군 상공에 실드 마법이 펼쳐졌다.
쾅! 쾅!
첫 번째 마법도 실드에 막혔고, 두 번째 마법도 실드에 막혔다.
그리고,그 뒤로는 실드가 펼쳐 지지 않았다.
콰앙!
마법들이 적군을 직접 타격했다.
사람들이 날아가고,얼어붙어 깨 졌다.
작은 마법은 몇 명의 사람만 다 쳤지만,앰버가 쏜 화염구는 수십 명을 그 자리에 불태워 버렸다.
"안 막아?"
백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반격 준비 때문일까요?"
참모의 말에 백작은 뒤쪽을 보고 소리쳤다.
"적의 마법 공격을 막을 수 있겠 습니까?"
"실드용 마나는 충분히 남겨 놓 았어요!"
천막 밖에 서 있던 앰버가 백작 의 물음에 대답했다.
백작은 예상보다 약한 방어에 강 한 반격이 올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제국군에서 마법이 날아 오는 일은 없었다.
"설마……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한 가 지 가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백작은 명령을 내렸다.
"한 번 더 시험해 봐야겠군. 기 사단은 출격하라! 위험하지 않을 곳까지 진격하도록."
그러자 잠시 뒤에 길게 늘어선 연맹군 중앙이 갈라지더니,기사
들이 달려 나왔다.
여러 형태의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
다행히 이쪽은 반반씩 나뉘었기 에 상당한 정예들이었다.
적을 향해 달리는 기사들이 점점 빨라졌다.
온몸에 갑옷을 입고 달리는 백 명이 넘는 기사들의 모습은 황제 군 전체에 비교해 티끌만큼 작았다.
하지만,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사들을 보게 된 병사들은 그 모 습에 공포에 질려 버렸다.
기사들이 활을 사정거리에 들어 서자,황제군에서 화살이 날아오 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훨씬 적은 숫자의 화 살이었다.
이 정도 화살이면 말을 타고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마나검들이 휘둘러졌고,화살들 은 말조차 맞추지 못하고 잘려 나 갔다.
그사이에 연맹군에서 다시 마법 들이 황제군을 향해 날아갔다.
실드를 위해 남겨놓았던 마나를 모두 쏟아부은 마법들이었다.
이번에는 하나의 실드도 펼쳐지 지 않았다.
마법은 다시 황제군을 타격했고, 기사들에게 쏟아지던 화살 공격이 멈추었다.
"곧 적진에 도착합니다. 더 달립 니까?"
선두에 선 기사가 임시로 기사단 장 역할을 하는 니콜라스에게 물 었다.
적 기사단은 마중 나오지 않았다. 기사단끼리의 싸움을 대비하 던 연맹의 기사들은 낯선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니콜라스는 전방을 살펴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끝없는 사람의 장 벽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그 장벽을 이루는 병사 들의 얼굴에는 공포만 보일 뿐이 었다.
니콜라스는 결정을 내렸다.
"밀고 들어간다! 가족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엘리스를 위해!"
각기 사랑하는 사람을 외치며 기 사단은 황제군 안으로 뛰어들었다.
거대한 물고기가 물결을 가르기
시작했다.
일반인은 기사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평범한 병사들은 기사 단을 막을 수 없었다.
창을 잘리고,방패가 부서졌다. 병사들은 사지가 분쇄되고,목이 잘려 나갔다.
저항은 없었다.
기사단은 그대로 적진을 관통할 기세였다.
황당한 상황에 사령부에 있는 사 람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기쁜 표 정이었다.
하지만,백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설마가 사실이 되었군. 마법사 도 기사단도 없다는 건가?"
"그럼,예상외로 쉽게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참모의 말에도 백작의 표정은 펴 지지 않았다.
물론,백작도 질 것으로 생각되 지는 않았다. 하지만,쉽게 이기리 라는 보장은 없었다.
"저 많은 병력을 전부 버리는 패 로 쓴다는 건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백작의 말 을 들은 듯이,황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형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열 도 맞추지 않은 거대한 군대가 밀 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오합지졸이 분명한 적이었지만,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병력을 뒤로 물려!"
"마법과 화살을 퍼부어! 진격을 늦춰야 한다!"
황제군이 밀려 내려오는 것을 본 백작이 소리를 쳤다.
"후퇴하기 시작하면 진형이 무너
질 수 있습니다. 지금 진형으로 상대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백작의 말에 한 참모가 반대 의 견을 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 었다.
하지만,백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가 보통의 군대라면 자네 말이 맞아. 하지만 저건 그런 군 대가 아냐!"
백작의 몸에서 자기도 모르게 살 기가 피어올랐다.
"황제는 자기 군대를 다 죽일 생 각이다. 모두 밀어붙여 난전을 만
드려는 거야! 섞이면 안 돼!"
진형끼리 붙어 밀리면 뒤로 후퇴 해 병력을 추스르는 게 옳은 병법 이었다.
아니면, 기발한 전술로 상대의 진형을 무너뜨리든가.
하지만,지금 황제군이 쓰는 전 략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진형도 없고,전술도 없었다.
단지 수많은 목숨을 담보로 한 공격일 뿐이었다.
10명이 죽으면 100명을 밀어 넣 고,100명이 죽으면 1000명을 밀 어 넣고.
"황제는 미쳤어. 그는 제국의 시 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어."
백작은 지금 이 순간 황제에 대 한 마지막 미련을 버렸다.
황제는 악이었다. 제국을 멸망시 키기 위해 나타난 악마였다.
백작의 말에 사령부는 벌집으로 변했다.
전령이 뛰쳐나갔고,기사들이 달 려 나갔다.
곧이어 마법들이 하늘로 치솟았 고,화살이 비처럼 쏘아졌다.
적군은 관통했던 기사단도 다시
반대로 관통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젠장,당했다. 세상에 어떤 미치 광이가 이런 전쟁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다가오는 황제군을 보며 백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알아차리는 게 너무 늦었다. 난 전을 피할 수 없었다.
난전이 벌어진다고 해도 질 리는 없겠지만,이곳에 있는 연맹군도 더는 움직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주력이 이쪽이 아니었어. 황제 도 당연히 이쪽에 없을 거고."
백작은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황제의 목표는 뭐지?" 몬스터를 없애겠다는 개소리를 믿을 수 없었기에 백작은 황제의 생각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 *
같은 시각.
남부 방어선에서 북쪽으로 말로 달려서 이틀 거리인 한 구릉지에 서 황제군과 연맹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동부 전선과 달리,이곳에 마주
친 두 병력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병력의 질은 확실히 차 이가 났다.
연맹군은 마법사들이 많이 남아 있었고,기사도 반은 있었지만,병 사들은 남부 영지의 영지병들이 태반이었다.
영지병들은 반은 징집병에다가, 동부 영지의 병사들보다 수준도 떨어졌다.
하지만,황제군은 달랐다.
"젠장,전부 정예군이잖아."
제시카가 황제군을 보며 손톱을
깨물었다.
앞에 보이는 황제군은 전부 가죽 흉갑과 철 방패,쇠 창을 갖춘 정 규군이 었다.
"설마,이쪽에 주력이 왔을 줄은 예상 못 했어요."
레이첼도 황제군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담대한 두 여성이 이 정도였으 니,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군사들은 웅성거렸고,영주들은 겁에 질려 달아날 구석을 찾고 있 었다.
그중에는 연맹군에 괜히 들었다 고 후회하는 영주도 있겠지만,이 미 배는 떠난 뒤였다.
레이첼이 어쩔 수 없이 마나가 실은 검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쿵. 쿵.
천막 안이 잠잠해졌다.
레이첼은 천막 안을 훑어보았다.
여러 얼굴들이 레이첼을 바라보 고 있었다.
대부분은 부정적인 얼굴. 하지만, 몇몇 얼굴들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뭐가 문제죠?"
"우리가 적과 정면 대결을 할 생 각이었나요?"
"적의 무기가 좋다고 적의 발이 빨라졌을까요?"
"적이 달라졌다고 우리가 항복이 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요?"
사람들을 보며 하나씩 질문을 하 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우리가 왜 이 자리에 있는 지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 니다. 영지민들을 생각하세요. 집 에 있는 아이들,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세요."
"그리고 난 그들을 지키기 위한 우리 병사들의 힘을 믿습니다."
레이첼의 말이 계속되자,천막 안에 있던 귀족들은 간신히 수긍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와! 와! 가족을 위해!"
"영지를 위해!"
"자신을 위해!"
밖에서 터져 나온 함성은 연맹군 전체를 들썩였다.
사람들이 놀라 밖을 내다보았고,
레이첼은 실눈을 뜨고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좋은 연설이었습니다. 이런 연 설은 모두가 듣는 게 좋죠."
제이크의 손에서 펼쳐졌던 증폭 마법진이 스르르 사라졌다.
"좀 미리 말을 해 줘요."
"미리 말하면 안 된다고 했을 테 니까요."
제이크의 대답에 레이첼이 한숨 을 내쉬었다.
모두에게 하기는 창피한 연설이 었지만,도움이 된다니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에 게 선언했다.
"작전을 시작합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레이첼은 천막 밖으로 나가 멀리 제국군을 바라보았다.
제국군 중앙.
기사단이 모여 있는 곳에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