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따각따각.
네 마리의 말이 황제군을 향해 다가갔다.
선두에는 방패를 든 루이가,뒤 를 위어 레이첼 여남작,제이크
마지막으로 제시카가 따랐다.
"오랜만이네요. 우리끼리 움직이 는 것도."
제시카의 말에 세 사람이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바로 사라졌다.
황제군 중앙에 앉아 그들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 때문이 었다.
레이첼은 전령을 보내는 대신, 직접 황제를 만나기로 했다.
당연히 모두 반대했지만,레이첼
은 완강했다.
"황제를 움직이려면 제가 직접 가야 합니다. 미끼 역할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그녀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연맹군의 대표인 그녀가 황제군 앞에 선다는 것은 너무 위 험했다.
고민하던 그들은 결국,대안으로 최고의 경호대를 편성할 수밖에 없었다.
제일 강력한 방어 기사와 검후, 그리고 고대 마법사까지.
웬만한 기사단 이상의 전력이 그
녀를 보호하기 위해 같이 나섰다.
"미안해요. 괜히 고집을 부려서 다들 힘들게 했네요."
"알면 됐습니다."
레이첼의 말에 제이크가 무뚝뚝 하게 대답을 했다.
의외로 차가운 제이크의 말에 모 두 놀랐지만,제이크는 그들의 표 정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황제군, 아니,황제에게 다가갈수 록 꺼림칙한 기분이 강해지고 있 었다.
다행히 황제 앞에 설 때까지 공
격은 없었다.
일행은 황제 군에서 200걸음 떨 어진 곳에 멈춰 섰다.
멀다면 먼 거리였지만,마법사나 기사,궁사에게는 사정거리 안이 었다.
레이첼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몇 걸음 앞으로 나온 뒤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정중히 가슴에 손을 올리는 그녀 의 모습은 군주에게 경례를 하는 기사 그 자체였다.
반역자 취급을 당하고 있지만, 기사로서 예의를 다하는 그녀의 모습에 황제군 사이에서 호감 어 린 눈빛들이 흘렀다.
하지만 정작 인사를 마친 그녀는 황제를 보곤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는 그녀의 인사에도 비웃는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레이첼은 황제의 비웃음 때문에 눈살을 찌푸린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창백한 얼굴과 그의 분위 기가 그가 알고 있던 황제와 너무 달랐던 것이다.
제이크도 심각한 표정으로 황제 를 보고 있었다.
그는 저런 분위기의 황제를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복제 세상에서 황제가 대수 림을 넘을 때였다.
큰 병을 앓고 있다느니,악마에 씌웠다느니 여러 가지 소문이 있 었지만,확실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황제에게서 에고 아이템의 느 낌이 나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무슨 에고 아이템이지?
-이상한 에고네요.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도 않고. 더구나 무기나 방어구 같은 형태도 아닌 것 같아요.
제이크가 파티마와 이야기를 나 누는 동안,인사를 마친 레이첼이 숨을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저희 연맹은 저 몬스터들의 공 격에서 영지를 지키기 위해 모인 연지들의 모임일 뿐입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췄다가,좀 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황제 폐하도 허락해 주셨고,저
희는 언제나 제국의 안위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녀의 말은 멀리 있는 황제군들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모두 제이크가 펼친 마법 덕분이 었다.
레이첼의 말은 황제에게 하는 하 소연이기도 했지만,황제군에게 펼치는 심리전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저희는 몬스터들의 위험이 사라 질 때 다시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 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황제군이 몬스터와 싸운다면 충분히 길을
비켜 드리겠습니다."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지만,그 렇다고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레이첼은 길을 비켜 주어 싸우지 않게 된다면 그 어떤 수모도 견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녀의 말에는 별 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쁘군. 아쉬워. 이럴 줄 알았으 면 널 취하고 이놈을 구하는 건 데."
황제는 갑옷 위로 왼쪽 가슴을 쓰다듬었다.
황제는 에고 아이템을 몸에 심은 뒤에는 더 이상 성욕이 일지 않았다.
물론 과거에도 경험한 적이 있었 기에 알고는 있었지만,눈앞에 레 이첼을 보게 되니 황제는 아쉬움 을 느꼈다.
"거기다,기사가 되지를 않나,에 고 아이템도 가지고 다니고. 내가 아는 그 어떤 사람보다 많이 변해 버렸어."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예비 황태 자비였을 때하고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복제 세상에서의 일을 들었던 레이첼과 제이크 일행은 황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폐하와 제국의 은덕입니다."
다시금 몸을 낮추는 레이첼의 행 동에도 황제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다만,슬쩍 그녀 주변의 사람들 을 훑어보았을 뿐이었다.
루이를 지나,제시카를 건너,황 제의 눈이 제이크의 얼굴에 잠시
머무르더니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 렸다.
-역시 여기서 모든 걸 끝내기는 힘들겠지?
-마법사들이 대기 중이고,근위 기사들도 긴장하고 있어요. 한 번 에 죽이기에는 에고 아이템이 걸 리고.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동안 제이크는 한창 황제를 죽 일 수 있을지 계산 중이었다.
이렇게 황제에게 가까이 접근했 는데,그냥 두고 보기가 쉽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황제는 제이크를 알아보
지 못했다.
황제는 고개를 돌려 레이첼을 바 라보았다.
황제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레이첼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황제는 어쨌거나 레이첼과 오랜 시간 같이 살았었다.
자신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모습.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고개 를 돌리던 모습.
자신이 박살 내 버린 가구들 사 이에서 불쌍하듯이 자신을 바라보 던 모습까지.
"하하,뭔 추억이 이따위냐." 황제는 잠시 떠올렸던 그녀의 모 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지금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꽉 다문 입술,활력이 넘치는 몸. 살아서 번뜩이는 눈.
생김새는 같았지만,분위기는 전 혀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달라진 분위기는 황제 의 욕심을 더욱 자극했다.
"아무래도 더는 어울려 주지 못 하겠다. 내 예상보다 훨씬 멋지게
변했어. 황후하고 큰 전쟁을 벌여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시간이 촉박해서 말이지."
황제는 아직 레이첼을 황후로 생 각하는 듯한 말을 하면서 손을 들 어 올렸다.
"시작해! 모두 죽이고 황후만 살 려서 데려와."
황제의 말이 끝나는 순간.
수많은 마법이 하늘로 치솟았다 가 레이첼을 향해 쏟아졌다.
동시에 황제 주변에 있던 근위 기사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황제군 곳곳에서 고
동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웅!
진격 신호였다.
황제군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실드."
제이크가 하늘을 향해 완드를 들 었다.
메모리 스펠에 담겨 있는 마법이 펼쳐졌다.
콰과과광.
각양각색의 마법들이 제이크가 펼친 실드에 부딪쳤다.
수많은 마법사가 퍼붓는 마법은
제이크의 실드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쩍! 쩍!
실드가 깨져 나갔다.
그리고,또 실드가 깨져 나갔다.
마법 공격으로 계속 실드가 깨져 나갔다.
그 뒤로도 계속 실드가 만들어졌다.
제이크가 자랑하는 다중 실드였다.
세상 그 어떤 마법사보다 강한 마나를 지닌 지금,강력한 한 방 이 아니고서는 제이크의 실드를
깰 방법이 없었다.
제이크가 마법을 막고 있는 사 이,말을 탄 기사들이 다가왔다.
제이크는 기사들을 향해 완드를 들지 않은 다른 손을 펼쳤다.
"디그."
쿠궁.
제이크 앞의 땅이 길게 푹 가라 앉았다.
말도 뛰어넘지 못할 정도로 넓게 파진 땅.
하지만,마나 사용자인 기사들은 충분히 넘을 수 있는 넓이였다.
기사들이 말을 박차고 앞으로 몸
을 날렸다.
히이이잉!
땅속으로 떨어지는 말들의 비명 이 들려왔다.
"근위 기사들은 자신의 말을 중 요하게 생각 안 하나?"
"그럴 리가요."
방패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루이 가 고개를 저었다.
루이의 방패에서 반투명한 막이 점점 크게 자라났다.
그는 구덩이를 뛰어넘어 자신에 게 달려드는 기사를 향해 방패를 휘둘렀다.
캉!
기사도 검을 휘둘렀지만,방패는 상처도 입지 않았다. 기사만 뒤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그는 깊은 도랑 속으로 떨어졌다.
루이는 빠르게 자리를 이동해서 도랑을 뛰어넘는 근위 기사들을 차례로 물 없는 도랑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루이 혼자만으로는 기사 들을 모두 막을 수 없었다.
반 이상의 기사들이 도랑을 뛰어 넘었고,나머지는 말을 타고 도랑
옆을 달렸다.
루이가 막지 못한 기사들은 제시카가 상대했다.
서걱! 서걱!
사방에서 피와 팔다리가 솟아올 탔다.
제시카의 움직임을 기사들은 도 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검으로 막으면 검과 함께 팔이 잘려 나갔고,포위를 하면 순식간 에 포위를 빠져나갔다.
다만 제시카가 모두 막기에는 기 사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많은 기사가 그녀를 지나쳐 레이
첼에게 향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마법사를 먼저 상대해야 했다.
다행히 마법사가 펼친 실드는 마 법만을 상대하기 위해 하늘에 펼 쳐져 있었다.
한데 마법사의 실드를 펼치지 않 은 한쪽 손은 비어 있었다.
"에어밤."
제이크가 메모리스펠에 저장해 놓은 세 번째 마법이 펼쳐졌다.
펑! 펑! 펑!
달려들던 기사들 앞쪽 공간이 터 져 나갔다.
기사들은 마나를 끌어 올려 충격 에 대비했다.
제이크의 마법은 기사들에게 피 해를 주지 못했다.
갑옷에 그을린 자국도 내지 못한 마법이었지만,효과는 충분했다.
기사들의 몸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지면과 가까운 곳에서 터진 충격 파가 기사들을 공중에 띄운 채로 뒤로 날려 버린 것이다.
몇몇 기사들은 도랑 아래로 떨어 져 버렸고,나머지 기사들도 한참 을 밀려나 버렸다.
그사이,레이첼은 황제를 마지막 으로 바라보고는 뒤로 몸을 돌렸다.
"이랴!"
그녀는 말을 달렸고,다른 세 사 람도 그녀의 뒤를 따라 뒤로 물러 서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놈들이군. 추격해. 절 대 놓치지 마."
황제는 남동쪽으로 달려가는 레 이첼 일행을 보며 말에 을라탔다.
황제의 말에 마법사들이 공중으 로 솟구치고,나머지 기사들도 레 이첼을 향해 달려갔다.
동쪽의 황제군은 진격로를 가로 지르는 제이크 일행과 추격하는 근위 기사들 때문에 진군이 늦춰 졌다.
하지만,서쪽 부대는 착실하게 남쪽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얼마 뒤,서쪽 부대는 연 맹군과 부딪쳤다.
"우리는 막아야 해!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마!"
"천천히 물러서! 절대 구멍 뚫리 면 안 돼! 죽으면 메꿔!"
연맹의 서쪽 부대는 황제군과 충 돌한 그 자리에서 필사적으로 적
을 막았다.
하지만, 다른 부대.
중앙과 동쪽 부대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 몰려온 황제군에는 진형 을 무너뜨릴 기사단과 마법사가 없었다.
모두 레이첼을 쫓아갔던 것이다.
덕분에 연맹군은 처음 생각대로 황제군의 공격 방향을 바꿀 수 있 었다.
마치 비탈길에 쏟아지는 비처럼 황제군의 병력은 남동쪽으로 음직 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