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황성 임페리얼의 복도를 제이크 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참 동안 씻지 못해 지저분한 모습이었음에도,그가 걸어가자 복도를 걸어가던 내관과 하녀,낮
은 직급에 관료들은 급하게 고개 를 숙였다.
몇몇 관료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곧 동료의 귀띔 에 기겁한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이번에 황도를 점령한 전 예비 황태자비 레이첼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마법사였다.
그것만으로도 고개를 숙이기 충 분했지만,이들은 마법사 자체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황도 상공에 떠 있 던 제이크를 보았었고,그가 마법
을 시전하는 것도 보았다.
단지 본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황도에 있는 사람 중에 그의 마법에 기절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물론 산소 부족으로 기절한 것뿐 이었지만,이들로서는 엄청난 마 법에 당했다고 여겨질 만한 일들 이었다.
제이크는 뒤바뀐 처지에 감회를 느꼈지만,지금은 그런 감상에 취 할 때가 아니었다.
한참 복도를 걸었던 그는 이윽고 황성의 한 방 앞에 멈춰 섰다.
과거 총리대신이 사용했던 집무 실이었다.
나름 중후한 느낌이 나는 문 양 쪽에는 기사 두 명이 자리를 지키 고 있었다.
"계시는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말하지 않았 지만, 기사들은 재깍 알아들었다.
"넵."
"내가 방문했다고 알려 드리도 록."
얼마 전까지라면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도 상관이 없었지만, 이곳 황성에는 그럴 수 없었다.
기사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고를 했고,바로 허락이 떨어졌다.
제이크가 문 안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바빠 죽겠는데 며칠 동 안 뭘 하다 온 거야? 아이고,그 꼴은 다 뭐야!"
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호들갑스 러운 제시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가 연구에 빠지면 주위에 신경을 안 쓴다는 것은 알지만, 제시카 말대로 좀 씻는 게 좋지 않을까 하네만."
오페우스 백작도 그녀 옆에서 혀 를 찼다.
"맞아요. 평상시에는 깔끔하던 인간이 가끔 저렇게 엉망이 돼서 나타난다니까요."
어느새 오페우스 백작과 제시카 는 서로 말을 놓을 정도로 친해진 것 같았다.
정통 귀족 기사와 여자 용병 사 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지만, 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뛰어넘는 동질감이 있는 듯했다.
더구나 귀족으로 대검호까지 올 라간 백작이니,상관없을지도 몰
랐다.
-제시카 씨 정도면 바로 백작 이상 받을 수 있지 않나요?
파티마의 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일이 정리되면 논공행상에서 충분히 그 정도 작 위가 내려질 게 분명했다.
덕분에 제시카에게 달라붙는 사 람들이 늘었지만,제시카는 그런 인간들에게는 살기를 가득 내뿜어 버렸다.
"몸 생각하면서 하세요. 그보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죠?"
레이첼의 말에 앰버가 고개를 끄
덕였다.
과거 총리대신의 집무실이자,현 레이첼의 집무실에서는 지금 다과 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연맹군의 수장인 레이첼과 검후 제시카,그리고 얼마 전에 황도에 도착한 오페우스 백작과 앰버.
가까운 사람들끼리의 다과회였지 만,모인 사람들로 봐서는 연맹군 의 수뇌부 회의라 불러도 될 정도 였다.
주위 사람들은 레이첼에게 황제 의 집무실을 쓰라고 권유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황제가 아니면서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대신 이 총리대신의 집무실을 쓰기로 했고,덕분에 황성에서 제 일 중요한 곳이 총리대신의 집무 실로 변해 버린 것이다.
걱정스러운 레이첼의 말에 제시카가 눈을 크게 떴다.
"맞다. 제이크가 이런 식으로 나 타나면 항상 뭔 일이 있던데."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제이크는 묘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인가 봐요."
앰버의 말을 들으며 제이크는 자 리에 앉았다.
그리고 숨겨진 방에서 발견한 내 용을 이야기했다.
"……황제는 몬스터를 제어할 방 법을 북쪽 유적에서 찾은 듯합니다. 근위 기사나 마법사를 세뇌한 것도 비슷한 방법을 쓴 것 같습니다."
제이크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동안 황제에 관한 일은 사람들 은 모두 외면했었다.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몬스터 사 이로 뛰어든 황제.
폭군에 피에 미친 자였지만,그 는 바보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 만,그는 자기 나름대로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던 사람이었다.
그런 황제가 이대로 사라질 거라 고 믿기는 어려웠지만,사람들은 모두 황제가 그냥 사라졌기를 바 탔던 것이다.
"정확한 방법은 알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북쪽 마탑에 제가 다녀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또 어디를 가? 다른 사람 보내고 그냥 있으면 안 돼? 네가 떡하니 버티고만 있어도 다들 조 용하단 말야."
제시카의 말처럼,제이크는 황도 에 있던 사람들과 연맹군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존재였다.
제이크가 벌인 일이 퍼져 나가면 서 점점 덩치를 키운 덕분에 지금 제이크는 고대의 마왕과 다를 바 없었다.
제시카의 말에 쓴 웃음을 지은 제이크였지만,그는 고개를 저었
다.
"유적이라면 고대 마법사인 제가 가야 합니다. 그리고 몰래 다녀올 테니 그냥 연구 중이라고 하면 될 겁니다. 뭐,필요하면 앰버님 께 대역을 부탁해도……
하지만 앰버의 날카로운 눈길로 제이크는 말을 얼버무려야 했다.
"하아,제이크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다행히 레이첼은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하고 싶은 말은 그것만 이 아니죠?"
이제는 제이크의 표정만 보고도 일행은 그가 할 말이 있는지 알아 차리는 듯했다.
아무래도 이들에게 뭔가 속이고 자 한다면 표정 관리 연습을 더 해야 할 듯싶었다.
레이첼의 말에 제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어선에서 빼낸 병력을 다시 돌려보내야 합니다. 아니,최대한 인원을 보내 방어선을 점검하고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몬스 터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건 안 될 일이네. 여기서 병
력을 빼면 다른 영지들이 다 들고 일어날 거야. 우리가 황도를 장악 해서 가만히 있는 거지,다른 영 지들이 반란을 포기한 게 아니란 말일세."
제이크가 꺼낸 말은 오페우스 백 작이 바로 반대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레이첼 병력이 먼저 황도를 장악 하자,황도로 달려오던 다른 영주 들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고 있었다.
그 뒤,오페우스 백작과 동부에 서 달려온 연맹군이 합류를 하자,
많은 영지와 영주들이 레이첼의 권리를 인정하고 다시 영지로 돌 아갔다.
모두 연맹군의 힘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뭉그적거리며 간을 보고 있는 영주들도 있었다.
힘 차이는 인정했지만,욕심을 버리지 못한 영주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맹군 태반이 남 쪽으로 빠져 버린다면 기껏 안정 화된 정세가 다시 엉망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오페우스 백작의 말에
호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상황을 잘 아는 레이첼과 앰버도 고심을 할 뿐이었다.
"이런,정말 실세는 따로 있었 군."
오페우스 백작은 주위를 둘러보 고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여태 제이크 마법사 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어요. 특 히 황제에 대한 말은……
오페우스 백작을 제외한 다른 사 람들은 모두 제이크의 인생을 잘 알고 있었다.
레이첼은 결정을 내렸다.
"최대한 인원을 빼서 남부로 보 내겠습니다. 황도는 제가 책임지 고 지키겠어요. 방어선은 백작님 께 부탁드려요."
"이런,겨우 여기까지 달려왔더 니 또 움직이란 소리군."
다행히 백작은 다시 반대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묘한 표정으로 제이크를 바 라봤을 뿐이었다.
그렇게 다과회는 바로 끝나 버렸다.
이어,소집한 회의에서 레이첼은 연맹군 대부분을 방어선으로 보내
기로 했다.
당연히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레이첼은 강한 목소리를 주장을 관철시켰다.
"우리가 연맹군이 모인 이유가 뭔지 다들 잊었습니까! 바로 저 몬스터들에게서 제국을 지키기 위 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황도로 달려온 것도 혼란한 제국을 안정 시키기 위해서였음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오."
원론에 가까운 레이첼의 말은 대 부분 반론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황도도 안정화가
안 되었습니다. 지금 병력이 빠져 나가면 황도가 위험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반대하는 사람 들이 있었지만,그것은 제이크가 나서서 해결했다.
"병력이 빠져나가도 황도는 문제 없습니다. 레이첼 님이 황도에 계 시고,그 옆에 제가 있습니다."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었지만,사 람들은 제이크의 말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 날,황도에 모여 있던 연맹 군 상당수가 남쪽으로 출발했다.
오페우스 백작이 이끌고,실력자 가 대부분 포함된 연맹군은 남쪽 방어선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연맹군이 빠져나가는 사 이,제이크가 몰래 북쪽으로 날아 갔다.
지하 세계.
거대한 균열 아래 홀로 자리한 검은 건물은 오랜 시간 동안 디스 트로이어가 둥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비행 디스트로이어들은 따뜻한 옥상의 열기를 이용해서 알을 깨 고,숫자를 늘려 지하 세계의 한 축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지금 막혀 있던 균열이 열려 소수의 암컷을 제외하고는 모두 균열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알을 품어야 하는 본성과 균열 밖으로 날아가고 싶은 욕망 사이 에서 흔들리던 암컷들은 요 며칠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항상 조용하던 둥지 아래 건물이 며칠 동안 무척이나 소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균열에서 인간들이 떨어진 다음 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 명은 새끼들이 모두 먹어 치 웠지만,천장을 뚫고 안으로 떨어 진 인간은 그날부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대신 천 년 넘게 조용하던 건물 은 며칠 동안 빛을 뿌리고,둥지 를 흔들었다.
암컷들은 둥지를 옮겨야 할지, 아니면 알을 버려야 할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암컷들이 고민을 끝내기 전에 건물의 진동이 멈추었다.
또한 빛도 사라졌다.
어두운 방 안.
치익.
검은 물이 담긴 관이 열리기 시 작했다.
턱.
뒤이어 물속에서 검은 손이 빠져 나와 관의 모서리를 잡았다.
손이 힘을 주었고,검은 물이 관 밖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검은색 일색의 인간 이 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옷을 전혀 걸치지 않은 나체의
남자가 단 하나 몸에 걸친 것은 가슴에 달린 쇳덩어리였다.
아니,에고 아이템이었다.
검은 인간,아니,황제는 관 밖 에 내려선 뒤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흰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검게 변한 몸과 머리카락처럼 검 은 눈동자만 가득 담겨 있을 뿐.
[별로 달라진 것 같지는 않은데.] 황제의 음성이 방 전체를 울렸다.
-디스트로이어 기술은 기본적으 로 본성을 건드리지 않고 육체의
성능을 강화하기 위한 연구입니다. 실질적으로 성격의 변화는 없 을 것입니다.
[하지만,실패한 기술이잖아.]
-네,기본적인 목표는 성공했지 만,아쉽게도 마나 방어력과 마나 저항력을 강화시킨 덕분에 마나 친화적인 지성체에 대한 분노가 본성에 각인 되고 말았습니다. 덕 분에 기술은 폐기되고,성과물들 은 지하에 유폐되었습니다.
[킥킥,병신같은 마법사들이라니 까. 혹시라도 쓰게 될지 몰라 봉 인으로 끝내 버리다니. 덕분에 폐
기 처분된 실험물에 멸망해 버리 고 말았잖아.]
-그래도 봉인으로 끝난 덕분에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지요.
[그래,그 덕분에 나도 이렇게 원하던 모습이 될 수 있었지.]
-괜찮으십니까? 인간이 디스트 로이어로 변한 적은 한 번도 없었 습니다.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뭐,인간을 죽이고 싶은 기분이 더 심해진 것 같지만,전에도 이 랬으니 별 차이없어.]
검은 디스트로어로 변한 황제는
킬킬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확실히 강해진 느낌이군. 어떻 게 힘을 써야 하는지도 알 것 같 고.]
황제는 자신이 떨어진 구멍을 올 려다보았다.
[그럼 움직여 볼까?]
쾅!
폭음과 함께 건물의 천장이 터져 나갔다.
놀란 디스트로이어들이 사방으로 날뛰었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둥 지는 조용해졌다.
[흠,이런 식으로 힘을 빼앗는
거군. 먹으면 더 좋겠지만,이걸로 만족해야겠어.]
거죽만 남은 비행 디스트로이어 의 목을 움켜쥐었던 황제는 디스 트로이어를 옆으로 던져 버렸다.
황제가 서 있는 주변에는 바짝 마른 알과 가죽만 남은 검은 몬스 터들이 흩어져 있었다.
하늘을 나는 디스트로이어들만 있는게 아니었다.
공룡처럼 생긴 디스트로이어,벌 레처럼 생긴 디스트로이어 등 소 란을 듣고 달려온 온갖 디스트로 이어들이 모두 황제의 손에 쓰러
진 것이다.
황제는 넘치는 힘을 등으로 보냈다.
푸악!
검은 피가 등 양쪽에서 솟구치더 니,그 자리에서 커다란 검은 날 개가 자라났다.
[능력도 잘 뽑아 먹은 것 같고.] 황제는 손으로 가슴에 달린 에고 아이템을 두드렸다.
[다음은 애들을 부르고.]
검게 변한 에고 아이템이 붉게 달아올랐다.
삐이이익!
고음의 괴성이 그의 가슴에서 퍼 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호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아아앙!
쿠엉!
멀리서 디스트로이어들이 다가오 기 시작했다.
[준비는 다 되었고,이제 문을 열어 볼까?]
황제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구름 위로 펼쳐진 균열.
너무 높아서 비행 디스트로이어 외에는 갈 수가 없었다.
황제는 하늘을 보며 입을 벌렸다.
점점 크게 벌어지는 황제의 입.
턱관절에 상관없이 입이 계속 벌 어져 벌어진 입이 얼굴 전체를 차 지해 버렸다.
그리고,그 벌어진 입에서 빛이 쏘아졌다.
번쩍!
전에 제이크가 보았던 벌레 몬스 터의 입에서 나온 그 빛과 똑같은 빛이었다.
빛은 균열 옆 벽에 부딪혔고,엄 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균열과 균열 옆에 있는 천장이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황제는 광선을 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바위와 흙.
지하 세계의 거대한 산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마치 천장에 닿을 정도로 쌓이는 산.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결국,지하 세계는 균열과 이어 졌다.
황제와 그의 부름에 응답한 디스 트로이어들이 산을 타고 위로 올 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