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너무 빠른 퇴각 신호였다.
적어도 하루 이상은 버티며 몬 스터들의 돌격 속도를 떨궜어야 했다.
하지만 토벽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에도 더 버티기는 힘들어 보 였다.
드디어긴 구덩이가 메꿔지고 불이 꺼졌기 때문이었다.
많은 몬스터들이 불타 죽었지 만,이제 구덩이를 넘지 못하던 몬스터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후퇴! 계획대로 빠진다!"
"후방 대기조 교대!"
"궁사,발리스타 조 모두 후퇴!"
"교대한 병사들도 모두 후퇴한 다!"
병사들이 차례로 물러나기 시작 했다.
기사들과 아인족들도 빠르게 후 퇴하기 시작했다.
병력이 줄수록 남은 병사들의 부담은 커졌다.
아직 토벽 자체는 무너지지 않 았음에도 몬스터들이 벽을 넘어 오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방어가 뚫린 것이다.
제시카가 마지막까지 남아서 방 벽 위로 올라온 몬스터들을 쓰러 뜨렸지만,혼자서는 한번 뚫린 구멍을 막을 수 없었다.
그때,하늘에서 제이크의 음성 이 들려왔다.
[모두 후퇴! 당장 토벽에서 벗 어나!]
공간 전체를 울리는 제이크의 말에 병사들은 급하게 토벽 뒤쪽 으로 내달렸다.
수직에 가까운 남쪽 벽과 달리, 북벽은 경사가 완만했다.
그 탓인지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미처 뒤쪽으로 가지 못했던 일 부 병사들이 몬스터를 막아섰지 만,토벽 위로 올라온 몬스터를
일반 병사가 상대할 수 있을 리 가 없었다.
사방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제시카도 빨리 피해요! 더 버 티면 피해만 늘어나요!
마지막까지 몬스터들을 막아서 던 제시카는 제이크의 음성에 이 를 악물었다.
아직 방벽에 남아 있는 병사가 많았다.
하지만,이미 방어선은 붕괴했다.
지체하다가는 후퇴하는 병사들 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근처의 병사 둘의 목덜 미를 잡고 북쪽으로 몸을 날렸다.
제시카가 뒤로 빠지면서 이제 토벽 위는 검은빛으로 뒤덮여 버 렸다.
제이크는 눈을 감고 마법을 시 전했다.
푸아아악!
짧지 않은 주문이 끝나자,길게 이어진 토벽이 흐물거리기 시작 했다.
돌과 흙과 모래로 만든 토벽이 마치 늪처럼,흐르는 모래처럼
변해 버렸다.
토벽 아래로 달려가던 몬스터들 이 밑으로 빠져들었다.
토벽 위에 흩어져 있던 시체들 도 흙 속에 잠겼다.
처음부터 마법으로 만들었던 토 벽이었고,지금도 빈크루의 마나 로 유지하고 있었다.
빈크루의 마나는 제이크의 마나 와 다르지 않았다.
토벽의 점성을 높이는 것은 제이크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제이크는 거대 몬스터가 토벽을 가르며 전진하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그래도 주인님 아니었으면 후 퇴 자체가 불가능했을 거예요.
파티마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 고 있었지만,자신의 마법에 아 군도 빨려 들어간 것을 보고 제이크는 기분이 착잡했다.
하지만 곧 떨쳐 내고서 그는 남 쪽을 두루 살폈다.
아쉽게도 황제, 혹은 몬스터들 을 통솔하는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제이크는 병력이 빠져나오고 있 는 영주성을 바라보았다.
영주성 성벽 위.
반투명한 빈크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탁해.
-맡겨 두세요.
제이크는 빈크루에게 말을 남기 고 북쪽으로 날아갔다.
예상보다 빠른 후퇴는 더 큰 피 해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른 후퇴에 아직 피난을 떠나 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부대는 시간을 벌기 위해 여러 번 후퇴를 멈추고 몬스터를 막아 서야 했다.
계속된 전투는 부대를 힘들게 만들었다.
병사들의 수는 줄어들었고,사 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이크가 활약하고 제시카가 정 신없이 움직였지만,뛰어난 몇몇 사람의 힘으로는 몬스터의 물결 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몬스터들 스스 로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면 제국 군은 전멸했을지도 몰랐다.
계속된 소모전 끝에 제국의 군 대는 하천을 앞에 두고 방어선을 펼칠 수 있었다.
황실 직할령과 다른 영지를 구 분하는 넓지 않은 강이었다.
이 하천 뒤로는 황도까지 넓게 펼쳐진 평야밖에 없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제국이 자랑 하는 곡창지대였다.
황도의 성벽 말고 적을 막아서 려면 이 강밖에는 막아설 위치가
없었다.
황도만 지키겠다면 황도에 들어 가 농성을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그렇게 되면 제국 전체 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인간과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 었으니까.
검은 몬스터에게 점령을 당한다 는 것은,그곳에 있는 인간은 모 두 죽는다는 이야기였다.
군대는 황도가 아니라 제국을 지켜야 했다.
하천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서 백작이 남쪽 땅을 바라보 았다.
"그래도 벤도르 영지를 지난 뒤 에 몬스터의 반 이상이 무리를 벗어났습니다. 덕분에 피해가 많 이 줄었습니다."
참모의 말에 무표정하던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행이라니! 몬스터들이 제국 땅에 퍼져 나간 걸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오페우스 백작의 호통에 보고하 던 참모가 물러났다.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모 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피난도 못 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화를 내 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 이상 남아 있는 몬스터의 주 력은 계속 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반만 남았지만,이 숫자도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반 남은 몬스터들은 제 국의 황도를 향해 일직선으로 움 직이고 있었다.
다행히 몬스터들은 점점 속도가
느려지더니 직할령을 앞에 두고 멈춰 섰지만,그 모습은 백작에 게 안 좋은 예감을 들게 했다.
남쪽 지평선을 바라보던 백작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참모가 물러서자 그의 옆에는 이제 제이크만 남아 있었다.
"군대가 움직이는 것 같아. 실 시간으로 반응하는 것 같지는 않 지만,미리 전략을 짜 놓은 대로 움직이는 게 분명하네."
제이크도 백작의 말에 동의했다.
남쪽 지평선에서 꾸물거리는 검 은 그림자들은 여기서 보기에는 명령을 기다리는 군대 같았다.
하지만,백작은 몬스터들이 왜 멈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제이크에게 물어보았다.
"왜 멈춘 거지?"
"기다리는 것 같군요."
"누굴? 설마,황제를 기다리는 건가?"
"글쎄요. 아직도 황제가 인간인 지 모르겠지만,명령을 내리는 자를 기다리는 게 맞을 겁니다."
유적에서 본 내용이 사실이라면
황제는 지금 저 몬스터들을 통솔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황제라면 직접 황궁 을 무너뜨리고 싶을 게 분명했다.
백작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병사들에게는 이길 수 있을 거 라고 말하고 있지만,솔직히 자 신이 없네. 후방에서 병사를 더 모아 온다고 해도 이건 어려워."
몬스터들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소모한 병사의 숫자가 수만이었다.
기사와 마법사들은 어느 정도 보존했지만,병사 숫자는 반 아 래로 떨어졌다.
평범한 전쟁이었으면 전멸이라 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말은 다른 사람이 있다면 백작이 결코 꺼낼 수 없는 말이 었다.
하지만,이 젊은 마도사에게는 본심을 꺼내도 될 것 같았다.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아 주십 시오."
제이크가 담담히 그의 말에 대 답했다.
그 말은 백작이 듣고 싶은 말이 었다.
제국,아니,그가 알기로는 대륙 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였다.
'그의 말을 믿지 않으면 무얼 믿는단 말인가.'
그때,침울했던 병사들 가운데 소란이 일어났다.
뒤쪽부터 시작되던 소란은 곧 함성이 되었다.
방어선의 뒤쪽.
북쪽 평야에 깃발들이 불쑥 올
라와 있었다.
지원군이었다.
영주들의 깃발 가운데에는 신조 가 그려진 깃발이 우뚝 솟아 있 었다.
그리고 깃발 아래에는 갑옷을 입은 레이첼이 말을 타고 오는 중이 었다.
그녀의 어깨에 앉아 있는 신조 는 이제 깃발의 신조와 그리 달 라 보이지 않았다.
"멋지군. 레이첼,아니,새로운 황제님이신가."
백작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
다.
제이크가 보기에도 음유 시인이 노래할 만큼 멋진 모습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레이첼의 모습을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계속 감탄하는 병사들과 달리 백작은 고개를 돌려 검게 물든 남쪽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저쪽 황제는 어디 있 는 거지?"
백작도 이제는 전 황제를 배려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황제는 베어
버려야 할 몬스터일 뿐이었다.
제이크도 지평선을 노려보았지 만,아쉽게도 그곳에는 검은 그 림자만 보였다.
폐허가 된 벤도르 영지.
기껏 복구했던 벤도르 영주성은 다시 흉물로 변해 있었다.
방어선을 무너뜨린 몬스터들이 성을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튼튼하게 보강했던 성벽은 무너
져 내렸고,다시 달았던 성문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무너진 성 옆으로 한 무리의 검 은 몬스터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중형 이상의 검은 몬스터들과 무너진 성 크기의 대형 몬스터 무리였다.
중형 몬스터 수백 마리가 중앙 의 대형 몬스터를 감싸는 듯한 모습이었는데,대형 몬스터 위에 는 작은 형태가 앉아 있었다.
커다란 박쥐 날개를 달고 있는 검은색 일색의 인간이었다.
바로,검은 몬스터가 된 황제 엘리고스였다.
원하는 숫자만큼 세뇌를 끝낸 황제가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코가 없는 코끼리처럼 보 이는 거대한 몬스터 등에 기대어 있던 엘리고스가 무너진 성을 보 며 중얼거렸다.
[여기 영주 후계자가 꽤 똑똑했 었는데,아쉽게도 날개도 펴지 못하고 죽은 모양이군.]
복제 세상에서 한참 이름을 날 렸던 젊은 귀족을 떠올린 그는
바로 답례를 해 주었다.
입을 벌려 아직 남아 있는 성벽 을 날려 버린 것이다.
[흠,이제야 보기 좋은 묘지가 되었군.]
폐허로 변한 영주성을 보며 엘 리고스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은 황도와 황성을 묘지로 만들 차례인가. 다들 모여 있으 니, 황도는 국립묘지로 만들고 황성은 황비의 묘지로 만들면 되 겠군.]
전 황제 엘리고스는 혼자 만족 한 미소를 지으며 몬스터들을 재
촉했다.
아쉽게도 비행 몬스터들을 모두 미리 보내 버리는 바람에 시간이 걸려 버렸다.
그래도,멸망한 제국과 대륙을 둘러보는 것은 나름 쏠쏠했기에 황제는 불만을 삭일 수 있었다.
황제는 무너진 영주성을 뒤로 하고 북으로 올라갔다.
멀리 황제의 모습이 작아지자, 무너진 영주성 위로 흐릿한 인영 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투명한 아름다운 여성.
빈크루였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엘리고스와 몬스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 목표를 찾았습니다.
그녀의 메시지 마법은 공간을 뛰어넘어 제이크의 귀에 들어갔다.
제이크가 몸을 일으켰다.
한참 회의로 시끄럽던 막사가 조용해졌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오페우스 백작과 레이첼도.
도와주러 온 영주들과 그들의 도움에 고마워하던 영주들도.
새로 진형을 만들기 위해 머리 를 쥐어짜던 참모와 기사들도.
그 모두가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남쪽을 바라보던 제이크가 고개 를 돌려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레이첼은 기대에 찬 눈으로 제이크를 바라보았고,제이크는 입 을 열었다.
"전 황제를 찾았습니다." 기대하던 대답이었다.
"계획대로 할 건가요"
"네."
제이크의 말에 레이첼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고,앰버, 제시카,참모들도 동의했다.
레이첼은 자리에서 일어나 명령 을 내렸다.
"적 수뇌를 제거합니다! 준비한 작전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