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화 〉11화 (11/44)



〈 11화 〉11화

웃음소리가 점점 커져서 대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루시우스 아르카옌, 제국의 황제는 멀리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를 내려 보며 생각했다.

‘미친놈이다. 크크크큭.’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황제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 넓은 제국을 주무르는 힘은 풍족함과 동시에 권태를 가져왔다.

이렇게 웃어본 적은 올해 들어서 처음이었다. 저 남자가 원하는 바는 예상한 범위 내였다.

‘그래도.... 실제로 행동에 옮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군.’

저 용병은 정말 별 볼일 없는 자였다.
마나를 다루지 못해서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다른 특출한 구석도 없었다.

이 세상이 지구인에게 얼마나 가혹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능력이 없는 저놈에게는 특히나  잔인한 곳이었을 거다. 그럼에도 어찌 적응을 해서 살아왔다는 건 남자가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겠지만.

‘그것뿐이다.. 미리 대답은 생각해뒀지만 궁금하군. 과연 행운이 저 놈을 또 도와줄 건지.’

운이란 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힘이었다. 조금 더 궁금해졌다, 행운이 얼마나 저 남자를 도와줄 것인지.
호기심을 감추며 말했다.

“짐이 내건 약속을 어길 수는 없지. 너는 정말 그것을 바라는가?”
“그렇습니다.”

드디어 귀족이, 황녀의 남편이 되어서 신분세탁을 하고 새로운 기회가 생기는 걸까.

나는 황제의 표정을 살피면서 기대감을 간신히 억눌렀다. 딱히 읽히는 건 없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황제는 처음 대면했을 때처럼 무표정으로 일관됐으니까.

“음... 어렵구나. 군주의 입장에서는 네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다만 아비의 입장에서는 자녀를 무시하고 뜻대로 해서 마음 한구석이 좋지 않아.”
“...”
“사실 난 네가 작위를 달라 예상했는데 말이지... 너는 짐의 고민을 헤아리지 않을 것이지?”

나보고 물러서라 하는 뜻인가. 지금이라도 물리고 다른 바를 말하면 재고 해주겠다는 건가.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잡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원하는 건 그뿐입니다.”
“흐음... 좋다. 그럼 서로 한발자국 양보를 하는 것으로 하지. 그 정도는, 짐을 위한 배려를 해주겠지?”
“알겠습니다.”

계급이 깡패라고 저렇게 말하는데도  고집을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애써 초조한 기색을 숨기며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국엔 3명의 황녀가 있다. 그 아이들에게 직접 너와의 혼사를 묻겠다. 이유를 불문하고 한명이라도 받아들인다면  바람을 이뤄주겠다. 그 누가 반대를 하더라도 밀어붙이겠다. 다만  아이들이 거절한다면 너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허나 짐의 입장을 헤아린 네게 자비를 베풀어야겠지.”

황제는 검지로 턱을 쓸면서 말을 이었다.

“그때는 네게 남작의 위를 수여하고 영지를 할애하겠다. 향후 2년간 세금을 면제하고 황실이 비호를 해주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이의는 없겠지?”
“없습니다만... 제가 감히 궁금한 것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황제는  질문을 허락해주었다. 그냥 귀족이 되고 싶었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싶어서였다.

“그랬다면 자작의 위를 내리려 했었다. 이만 물러가라.”

*

아주 단순하게 확률적으로 따지면 3분의 1. 확률적으로는 33% 정도쯤인데, 변수는 이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시발... 진짜 좆 됐네.”

대체 3명의 황녀 중 누가 나와 결혼을 하려 할까.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아도 부정적인 생각만 맴돌았다.

황제가 내게 최대한 선의를 베푼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상의 호의는 허락되지 않았다. 빈말로도 황제는 나를 좋게 포장해서 혼사를 묻지 않을 거다.

아쉽지만 실패를 받아들이고 이후의 일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남작이 되고나서 해야 할 일들. 철저한 계획이 필요하다.

“일단... 지구인이 귀족이  경우는 많이 없어.”

다른 나라의 상황은 모르겠고, 현시점 지구인 중 제국에서 떠오르는 사람은 제임스 이모르트 백작.

‘이 시발새끼는 초반부터 뇌전계열을 각성한 놈이었지.  꿀 빠는 새끼.’

지구에 살다 왔다고 해서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게 아니다. 비율로 따지면 4할은 마나를 각성한다.
개중에는 이모르트 백작처럼 희귀한 원소계열 마력을 타고난 놈들이 있었다.
 만난 고기마냥 이세계를 제집처럼 활보하고 다니는 새끼들.

제임스 이모르트는 그런 무리에서도 군계일학 이었다. 뇌전이라는 속성계열 마나, 무의 재능도 있어서 완숙한 6성의 경지.
그의 미래에 걱정이란 그늘은 없을 것이다.

“쓰읍... 빌붙어서 서로 윈윈 할 수 있으려나.”

아쉬운 사람은 나.
만약 도움을 받고 싶으면 구미가 당길만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는지, 여러 방면으로 머리를 쥐어 짜내야 했다.

“로아나가 내 기사가 되어만 준다면....”

떠오르는 방법 중 하나는 로아나 크로이츠.
그녀와는 꽤 좋은 관계를 구축했다고 생각 되었다.
제국의 제2 기사단장을 맡고 있지만 강제적으로 속박된 지위는 아니니까. 그녀는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모른다.
로아나와 지내면서, 그녀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그러다보면 알게 되는 날이 있을 거다. 그때 내가 권력의 힘이 있다면.

음... 고개를 저었다.

‘황녀의 남편이면 몰라도.... 남작으로썬 힘들지도. 역시 영지 경영에 최대한 힘을 쓰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건가.’

2년간은 황제가 비호를 해준다고 약조했으니 그 기간 동안 가능한 최고의 성장을 한다. 그리하여 향후 정치판에 뛰어들 준비를 한다.

“당장은 최선일  같은데...”

지금으로써는 보다 나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

황제와 독대를 한지 2일이 지났다. 그가 마련해준 방에서, 안타까운 소식을 어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총 두 번을 듣게 되었다.

어제는 1황녀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건 단순한 통보였다. 예의상 돌려 말하는 미사여구 같은 건 없었다.
불현듯 1황녀 휘하의 시종이 찾아와서 불가하다, 그러고선 가버렸으니까. 예상하자면 황제의 얘기를 듣자마자 거절한 모양이었다.

두 번째 좋지 않은 소식은 눈앞에서 3황녀가 직접 전달해 주고 있었다. 어딘가의 싸가지 없는 년과는 다르게 직접 행차하는 정성이 보였으나.

“네가 감히 나와 결혼을 하겠다고? 주제를 모르는 버러지 같은 놈.”

시발 년이.
올해 18살이 된 3황녀는 전형적인 싸가지 없는 황족이었다.
그래, 저런 모습이 진정한 이세계 버전 노블레스 오블리주지.

3황녀는 그 예쁜 얼굴로 입에 담기 힘든 더러운 욕들을 쏟아 부었다. 부모 얘기가 나왔을  울컥하는 마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널 고문하고 노예로 팔아버리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바마마의 명령만 아니었어도 이 자리에서 바로 죽여 버렸을 거야. 미천한 종놈 같은 새끼.”
“황녀님의 너그러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알면 당장 더러운 눈부터 깔아라.”

물 싸대기를 맞았다.
내가 싸대기도 맞아봤는데 물로 쳐 맞은 게 기분이 배는 더 나빴다. 좆같은 년. 나중에 기회만 되면 꼭 두고 보자.
3황녀는 그렇게 경멸의 눈으로 돌아가 버렸다.

“후.... 시발 확실하게 영지 경영으로 간다. 2황녀는... 아마 볼 것도 없이 거절이겠지.”

계획은 실패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나보다 5년은 일찍 영주가 된 제임스 이모르트 백작. 그의 선례를 학습하면서 영지의 힘을 키워야겠다.
후회는 없다.
계획한 일이 실패하는 경험은 매번 겪어왔던 일이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였다.

‘남은 시간동안 로아나와 관계를 더 돈독히 다지는데 힘을 써야겠어.’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었을 때였다. 밖에서 노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네. 들어오셔도 괜찮아요.”

누구지?
들어온 사람은 비슷한 또래의 남자였다. 옷차림을 보니 그가 시종이라는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3황녀로부터 좆같은 일을 겪었다. 오늘 기어코 두 번 연속 정신적 타격을 줄 셈인가.

“리엘라 황녀님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예상대로 그는 2황녀의 전령이었다.
남자는 품속에서 고풍스러운 재질로 동봉된 서신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자, 남자는 읽어보고 자신에게 답을 해주면 된다고 첨언했다. 과연 이 안에는 뭐라고 쓰여 있을까.
기대할 것도 없이 거절의 대답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되는 걸까.

“후우.... 알겠습니다. 읽어보죠.”

밀봉된 상태를 뜯어내고, 안에 감춰진 종이를 꺼내었다.
2황녀의 것일 유려한 필체가 보였다. 내용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읽어보았다.

“헐.... 아니.. 진짜로? 미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와서 입을 빠르게 다물었다. 시종을 쳐다보자 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다시 편지로 시선을 옮겼다.

[황제 폐하께서 그대의 얘기를 해주며 내게 의사를 물었었다. 나는 폐하께 그대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하였고. 황실의 정보부에게서 그대의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서신을 작성하고 나서, 폐하께 그대와 결혼하겠다고 답을 하러 갈 것이다. 그대는 시종에게 내일 나를 만날 시간을 전하도록 하여라.]

황제는 나와 약속했다. 3명중 누구든 나와 결혼하겠다고 한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그리 해주겠다고.

“혹시... 이게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황녀님께선 서신을 읽고 나면 시간을 정해주실 거라 이르셨습니다. 저는 대답을 가지고 돌아가면 됩니다.”

시종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시간은.... 정오쯤이 좋을 거 같다.

“2시쯤이 좋을 거 같습니다. 그때로 할게요.”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편히 쉬시길.”

남자는 멋들어지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돌아갔다.

“말도 안 돼....”

황제의 꼼수에도 기어코 해냈다. 나는 이제 부마가 된다. 2황녀 리엘라 아르카옌의 남편으로.

듣기로는 엄청나게 아름답고 지혜로운 황녀라고 들었다. 그런 2황녀가 왜 결혼을 결심했는지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었다.
말 한번 안 섞어본 나한테 반했다는 그런 말도  되는 이유는 아닐 테고.

다 포기한 심정에서 갑자기 원하던 바가 이루어질지는 꿈에도 몰랐다. 내일 2황녀를 만나보면 알  있을 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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