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1화 〉31화 (31/44)



〈 31화 〉31화

내 예상에 가면남은 B급 용병의 힘을 갖고 있었다. 일반인인 내가 놈의 말을 섣불리 듣기에는 위험하다.

‘근데.... 릴리아가 더 강할 거 같단 말이지.’

리엘라는 내 호위에 유독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릴리아를 떼놓지 말라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요 며칠간 이해하기 힘든 일이 몇 번 있었다.

나는 릴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셔도 괜찮아요.”

릴리아의 말에 믿음을 가지고서, 철장의 문을 열쇠로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가면남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순간 폭발적으로 내게 쇄도했다. 내가 전혀 인지할 수 없는 속도였다.

“커허어억!”

릴리아가 순식간에 가면남의 목을 낚아챘다. 가냘픈 손에 들려진 가면남이 양손으로 목을 잡고 켁켁 거리고 있었다.

“놔줘.”

릴리아가 가면남을 벽에 내동댕이쳤다. 끄흐흐, 가면남이 한참 숨을 들이마시더니 말했다.

“괴물이야? 아까 기사보다 훨씬 강해 보이는데..”
“알았으면,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묻는 말에 충실히 대답하면 됩니다.”
“어지간히 높으신 양반이구만. 그런 양반이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방금 전 질문이 기억나지 않는 겁니까?”

릴리아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면남이 잠깐 흠칫했지만 굴하지 않고 말했다.

“그게 왜 궁금하지? 미안하지만 나도 그건 말할 수 없어.”
“그럼 말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면 되겠네요.”

릴리아가 손을 풀기 시작했다. 가면남은 전혀 겁먹지 않고 오히려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그건 네가 결정할 게 아니라,  양반이 결정할 일 같은데.”
“눈 까세요. 죄수의 신분이면서, 그런 눈으로 쳐다보실 분이 아닙니다.”

이내 릴리아가 올려친 뺨에 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가면남이 억눌린 음색으로 말했다.

“난 죄수가 아니야. 시발... 한번만 더 죄수라고 하면, 나도 입을 열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아둬.”
“됐어. 그만해.”
“하아... 알겠습니다.”

나는 앙칼진 고양이가  릴리아를 말리고, 아무렇게나 앉아있는 가면남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여유가 있는 태도. 나를 겁내는 기색은 전혀 없어보였다.

‘죽음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네.’

용병 일을 했었을 적, 가끔씩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가면남도 비슷한 케이스로 생각됐다.
가면 너머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가면은 언제까지 쓰고 있을 생각이지? 답답하지 않나?”
“오지랖은.”
“...!”

릴리아가 다시 발끈했다.
나는 릴리아의 손목을 잡아서 등 뒤로 이끈 다음 말했다.

“확인해야  게 있어서.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가면남이 내 심장과 배 부근을 몇 번씩 살펴보고 나서 말했다.

“알만하네. 너도 마나를 각성하고 싶은 거냐?”

손이 부들 떨리고 있는 릴리아처럼, 비웃는 태도라고 생각할  있지만, 나는 연민이 느껴졌다. 마치 불나방을 쳐다보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내가 느낀 감정을 티내지 않으면서 말했다.

“꼭 그런  아니지만... 비슷한 이유는 있지.”
“그런가. 멍청해 보이진 않았는데, 동쪽으로 가봐라. 네놈 같은 머저리가 꽤 모여 있으니까.”

동쪽이라. 김세희가 말해준 게 떠올랐다. 소문의 시발점이 된 곳이자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
나는 그녀가 알려준 이름을 상기시키곤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혹시 거기에 무궁화라는 단체가 있나?”

가면남이 나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하면 네가 알려주면 안 되나? 서로 쉽게 가면 좋잖아.”
“내가 받을 게 없는 일방적인 관계 아닌가. 이빨 그만 까고 이만 꺼져줬으면 좋겠어. 휴식에 방해되니까.”
“혹시 네가 김원혁이야?”
“....빨리 꺼져.”

가면남이 원하는 대로, 꺼져주기로 했다. 릴리아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기어코 한마디를 내뱉었다.

“다음에도 이런 태도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기대해도 좋을 거예요.”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겠어서, 별로  닿진 않는 말이야.”

가면남이 이죽거렸다. 릴리아는  참기 힘들었는지 벼락같은 발차기를 내질렀다.

“끄흐으으윽.”

벽에 처박힌 가면남의 신음이 방을 가득 메웠다. 너무 아파보이는 모습이라,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



“곧장 동쪽으로 가보실 거예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덧 해가 져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감시 역할도 있었을 아델은 여전히 자고 있겠지만 날이 어두워지니 움직이는 게 고민됐다. 내일 황자와 만나고 나서 움직이면 기회가 없으려나?

그러면 지금 움직여야 하는 건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릴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까... 제가 그자를 때린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요?”
“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나서지 말라는 뜻을 제가 분에 못 이겨 어겼으니까, 화가 나신 건 아닌지 물어봤어요.”

릴리아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운 없어 보이는 얼굴에 나까지 힘이 빠졌다.
나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네가 옆에 없었으면 나는 아까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뿐만이 아니었다.

릴리아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힘든 일이 많았을 거였다.
내 출신 때문인지, 호의적이지 않은 귀족들의 태도. 그건 귀족들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황궁에 있던 하인들도 호의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젠 내 집이 된 리엘라의 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리엘라가 가진 영향력은 엄청났지만, 그건 그녀가 자리를 비우지 않았을 때다.

리엘라가 황비를 만나러 궁을 자주 비웠을 때, 은근히 선을 넘을 듯 대하던 하인들이 많았으니까.

황궁에서 일하는 자들은 귀족의 자제들이 꽤 섞여있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릴리아가 정이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세한 과거는 몰라도 같은 평민 출신에, 나를 대함에 있어 은근히 보이던 무시가 없었으니까.

많은 힘이 되어준 릴리아의 시무룩한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나는 쾌활한 음색으로 말했다.

“정말 괜찮아. 네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테니까. 생각해보니 고맙다는 말을 못했네. 고마워.”
“네... 앞으로도 잘 보좌하도록 할게요.”

릴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기분은 나아진 건지 발걸음이 가벼워보였다. 이왕 분위기가 잡혔으니, 나는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했던 것을 말했다.

“아까 보니까.. 엄청 강해보이던데, 언제부터 무를 익혔어?”
“제가 11살 때부터 익혔으니 이제 12년이 됐네요. 그때 황녀님을 만나게 되서 운이 참 좋았죠...”
“엄청 오래됐네.”
“아직 많이 부족해요.”
 경지가 어떻게 돼?”
“이제 7성이에요.”
“헉...”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혀를 깨물었다.
7성이라니, 이런 말도  되는 일이. 릴리아는 강자의 반열에 든 어엿한 무인이었다.

‘어쩌면... 로아나 이상의 천재가  옆에 있는 게 아닐까.’

로아나가 언제 7성에 올랐는지 모른다. 그녀는 9성의 벽을 넘고 있으니 릴리아보다 빠르게 7성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러나 경지에 오른 시기가 빠르다고 무조건  뛰어난  아니다. 릴리아도 어엿한 천재임은 분명했다.

나는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가... 되고 싶지는 않고?”
“아니요.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차갑게 느껴지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싸늘한 표정이 잠깐 스쳐지나갔다.
릴리아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이 좋아요. 황녀님은 과분한 은혜를 주셨고, 지훈님도... 여러모로 귀족 같지 않은 굉장히 좋은 분이니까요.”
“그래.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왠지, 그렇게 말하실  같았어요.”
“벌써 내가 파악이  된 거야?”
“그럼요, 항상 옆에서 모시고 있는데 모를 리가 있나요?”

릴리아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녀가 지은 예쁜 미소를 보니까, 마음속에 있던 마나를  다루는 열등감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래.... 암만 열심히 수련해봐야 내 말 한마디면 뒤질 놈들이 수두룩해. 이게 인생이지.’

나는 즐거워 보이는 릴리아에게 말했다.

“바로 가기 보단 여유를 두고 가는 게 좋겠어. 당장은 황자를 만나는 일이 더 급하니까.”
“알겠어요.”

가면남이 일러준 동쪽으로 가면, 무슨 일이든 휘말릴 기분이 들었다. 그럼 알테온의 초대에 응했는데도 참석을 못하는 실책을 저지를  있으니 참아야지.

“꽤 괜찮은 디저트 가게를 봐두었는데, 돌아갈  포장해 갈까요?”
“네가 먹고 싶은  아니고? 나 디저트 잘 안 먹는  알잖아.”
“이럴 때는  얄미우시네요. 그냥 넘어가 주시면 좋을 텐데...”



*

아델은 여느 때보다 개운한 표정으로 경례를 올렸다. 간밤에 피로를 제대로 씻어냈는지 아주 쌩쌩해 보였다.

“각하. 밤에 별일은 없으신 건지요?”
“여관에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겠나.”
“하하. 다행입니다.”

그 모습이 퍽이나 웃겼기에 실소를 머금었다. 아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조용하게 아침을 먹고 나서, 아델이 말했다.

“성에 다녀오겠습니다. 각하를 모실 인원을 데려오지요.”
“그러도록 하게.”

릴리아가 타주는 차를 마시면서 아델을 기다렸다. 여유가 생겼기에 잡생각이 떠올랐고, 간밤에 동쪽으로 가보지 않았다는 게 약간 후회가 되었다.

‘그냥 가볼걸 그랬나... 괜히 찝찝하단 말이야.’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지.
괜히 어제 들쑤셨다가 오늘의 초대를 망칠 수도 있었으니, 참았던 게 정확한 판단이었을 거다.

여관이 소란스러워졌다.
아델이 호위할 기사단을 이끌고 온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묵직한 기사들의 걸음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백작각하. 괜찮으시다면 지금 출발하시지요.”
“그러지.”

백작의 성은 굉장히 컸다.
황궁에서 살지 않았더라면 입을 헤 벌릴 정도였다.

‘대단하네...’

사는 곳만 봐도 카엘로스의 힘이 느껴질 정도다. 리엘라의 말을 떠올렸다. 내 뒤엔 그녀가 있으니 기죽을 필요가 없다.
든든한 7성의 무인인 릴리아도 있었고.

성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다른 귀족들의 마차가 몇 보였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빠른 편이라 많이 보이진 않았다.
아마 전부 1황자를 따르는 작자들이겠지.
이유모를 적대심이 잠깐 생겼지만 애써 억누르진 않았다. 어차피 그들도 나를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일 테니까.

“카엘로스 각하께서 마중을 나오실 예정입니다.”

마차 밖에서 어제 봤던 선두의 기사가 그리 일러주었다.

“잠시만요.”

릴리아가  옷차림을 다듬어주기 시작했다. 어제 이후로 미묘하게 더 다정해진 느낌이다. 센스 있는 손놀림을 보면 릴리아는 기사보다 시녀가 더 어울리는 지도 모르겠다.

“됐어요. 이정도면 고리타분한 귀족들도 옷차림을 지적하진 않겠죠.”
“설마 그렇게 유치할까.”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한 가지 당부를 했다.

“웬만하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참아.”
“제가 애도 아니고, 알겠어요.”

릴리아가 입술을 삐죽였지만 나는 재차 당부했다. 7성의 무인이란 걸 깨닫고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마차에서 내렸다.
멀리서 기사를 한껏 이끌고 오는 카엘로스 백작이 보였다. 족히 500명은 되어 보인다. 처음부터 기세를 잡으려 하는 건가.
마음에 드는 행색은 아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선두의 카엘로스 백작이 손을 건넸다. 손을 맞잡자 보기와 다른 악력이 느껴져 인상이 써졌다.

“오랜만이군, 백작. 아.. 그대에겐 오랜만이 아닌가.”
“우리가 만났던 적이 있었던가?”

나도 손에 힘을  쥐었다.
카엘로스 백작이 피식 웃더니 힘을 뺐다.

“의회에서 자네를 봤었지. 알카드 카엘로스네. 편하게 부르든 마음대로 하게나.”
“그럼 알카드라고 하지.”
“하하하!”

알카드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보기보다 대범한 친구구만. 그래, 간밤에 산책은 즐거웠나?”

알카드의 눈매가 날카롭게 나를 살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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