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4화 〉44화 (44/44)



〈 44화 〉44화

황제는 안건을 발의할 마무리 단계를 거치고 있었다.

 소식을 전해 받은 지 이틀이 되었다. 이제 의회가 소집되는 날이 불과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알테온의 서신은 확인해 보셨어요?”
“응, 방금.”

복지부장 집무실에서 릴리아에게 대답했다. 나는 서랍을 열어 서신을 릴리아에게 건네주었다.

“알테온은 파벌의 장악력이 대단하네요.”

릴리아의 말대로, 알테온은 휘하 귀족들의 의견을 어렵지 않게 일치시켰다.
나와 대립각을 세우고, 내가 크리스 파벌로 자연스럽게 녹아들게끔 작업을 쳐주기로.

여러모로 크리스보다 능력이 뛰어났다.

“황제의 도움도 많이 받았겠지. 저번에 독대를 했을   봐도 알테온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확실히 느꼈어.”
“네. 크리스는 좀.... 제 눈에도 황제가 되기엔 많이 부족해요.”
“그렇게 망나니야?”
“그런 것도 있고, 일단 오만해요. 능력도 없는데 자기가 최고인줄 아는 멍청이예요.”

리엘라와는 완전 딴판이구나. 기껏 티타늄 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면 인생을 똑바로 살아야지.

“혹시 일부러 능력을 숨기려고 멍청한 척을 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릴리아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크리스와 만나  경험이 있어 보였다. 저리 강하게 부정하는데 그럴 리가 없지.

“알테온은 해결됐고, 크리스도 황비가 어련히 주무를 거야. 남은 건 대공인데, 이 새끼 생각을 모르겠어.”
“대공 말인가요?”
“응.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양반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이번 의회에서 대강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까. 대공에 대해서는 황제와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외에는 알고 있는 게 없었다.

“그건 폐하께 맡기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훈님이 당장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왠지 감이 안 좋아.”

불안감이 스멀스멀 생겼다. 어쩌면 황제는 나를 알테온을 대신할 사냥개로 만들려 하진 않을까.

가정일 뿐이다. 나는 커져가는 불안감을 빠르게 누그러뜨렸다.

“슬슬 이한석한테 연락 할 준비를 해. 안건이 발의되면 일을 진행시키기로 했으니까.”
“알겠어요.”

릴리아는 어련히  해줄 거다. 깐깐하게 전부 간섭할 필요는 없다.

“이것도 김세희한테 전해주고. 전부 허가하니까 생각한대로 해보라고 전해줘.”
“네!”

밀린 일들을 처리했으니 의회소집을 기다리며 대응방안을 세우면 된다.



*

의회가 열리는 당일이라서 황궁에 입궁하는 귀족들의 수가 많아졌다.
황궁의 모든 시종들이 평소보다 분주한 움직임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 역시 의회에  준비를 바쁘게 하고 있었다.
자주 열리지도 않는 의회인데, 내 중심으로 열리는 것만 벌써 두 번째다. 귀족들의 질의를 상대해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하다.

‘대공이 뭐라고 참견할지 존나 궁금하네.’

얼추 예상되는 것들은 머릿속에 정리했다. 어제 밤새 리엘라와 대담을 나누며 전략을 세웠다. 생각한 범위 내의 공격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릴리아가  옷을 정리해주면서 말했다.

“이한석에게 지시를 해뒀어요. 오늘 중으로 움직이겠다고 연락도 받았어요.”
“잘했어. 별 이상은 없었지?”
“네. 위장도 깔끔했고, 카엘로스가 영지를 비운 상태라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이현성은?”
“카엘로스 백작과 안면을 틀 생각에 행복해 보이던데요?”

릴리아가 비웃음을 지었다.

“일이 끝나면 처리해야겠네.”
“네. 말만 하시면 제가 조용히 처리할게요.”

멍청한 놈. 분명 줄을 잘 서라고 진지하게 일러줬는데. 설마 내가 복지부에 임관해서 만만해보였나.

“이제 출발 하셔야겠네요.”
“갔다 올게.”

리엘라는 궁에 없었기에 릴리아가 나를 배웅해주었다. 나는 기사들을 몇 대동하고 의회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내부로 들어가서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저번과 똑같은 자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자리는 귀족들의 시선을 온전히 감내해야 한다.

이윽고, 황제가 입장하고 의회가 열렸다.

내가 발의한 안건을 다루기 전에, 몇 밀린 안건들을 먼저 처리하는 과정이 있었다. 분위기를 조심스레 파악했다.

‘대공 쪽이 아주 약간 우세하네.’

몇 달 사이에 정세의 변화가 있었나? 나한테는 정보부가 없기 때문에 자세한 정세를 파악하기 힘들다.

이건 예상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정보가 있어야 추론도 가능한 법이다. 그나마 황비와 연을 슬슬 트고 있어서 점차 나아지긴 하겠지만 당장은 뼈아픈 실책이다.

알테온이 세세히 알려줄 리는 만무하다. 신뢰를 다져가고 있어도 아직은 나를 완전히 믿지 않으니까.

“그럼, 이지훈 백작의 안건을 다루도록 하겠다.”

황제의 증폭된 목소리가 의회를 울렸다. 나는 침을 삼키고 귀족들의 대응을 준비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쉽지 않을 거라는 게 예상 됐으니까.

“작금의 아카데미는 귀족들의 소유물이지. 아카데미라 하기엔 너무 빈약하다. 사실상 귀족자제들의 놀이터나 다름이 없어. 이지훈 백작은 이를 문제 삼고 아카데미의 대대적인 개편을 건의했다. 대신들의 의견을 나누었으면 좋겠군.”
“평민을 아카데미에 입학 시키겠다는 내용은 터무니없습니다.”

반발은 대공 휘하의 파벌에서 시작되었다. 황제가 나를 쳐다보았다. 안건을 낸 사람은 나니까 반론을 해도 내가 해야 했다.

“아카데미 예산은 매년 2억 골드가 편성됩니다. 그에 비해 운영되는 효율은 전혀 없죠. 그렇게 쓰일 거, 평민들에게도 기회를 주자  말입니다.”
“예산 편성은 재상의 소관. 백작은 지금 재상을 탓하는 겁니까?”

그 말에 대공 휘하의 귀족들이 하나같이 헛기침을 했다.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복지부는 여태껏 성과가 전혀 없고, 이번엔 비리를 저지른 정황도 있지 않습니까? 아카데미 예산을 꼬집는 게 우습네요.”
“정확히 말하면 비리를 저지른 정황을 제가 잡아낸 거죠. 누가 보면 같이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하겠네요. 복지부는 새롭게 바뀌고 있습니다. 곧 기대할만한 성과가 나타날 일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런 말은 성과를 내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논쟁에 벗어난 말입니다. 아무튼, 돌아와서. 아카데미를 평민들에게 개방하면 제국이 더 부강해집니다. 사실 그들은 기회가 없을 뿐이지 재능이 없다고 말하긴 어렵지 않습니까?”
“제국이 부강해지는  아니라, 평민을 구워삶을 백작이 부강해지겠죠.”
“그건 귀하의 억측입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알테온을 보았다. 슬슬 알테온이 나서주기를 기다리던 찰나였다. 시선을 받은 알테온이 헛기침을 했다.

“나는 찬성한다. 헌데, 역시 백작이 다른 마음을 품을까 의심스러워. 이 부분만 해결되면 좋을 것 같은데.”

애매모호한 대답.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은, 형님이 백작을 견제하겠단 말입니까?”
“물론.”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건 백작의 제안을 가로채는 일이 아닙니까!”

크리스는 뒤를 돌아,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의 지지를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2황자 파벌 귀족들이 헛기침을 하며 알테온을 보았다.

“그럼, 네게 좋은 생각이라도 있느냐?”
“그건····.”
“오히려 크리스 황자께서 더 적임이죠. 사실 알테온 황자께서는 기회를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내가 끼어들었다.
알테온이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보며 말했다.

“능력이 있는 자가 기회를 더 받는 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기회조차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카데미의 개편은 평민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크리스 황자께서도 기회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만!”

황제가 나서서 중재했다. 귀족들의 다툼이 과열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테온. 네 생각은 어떻지?”
“블레앙 후작을 선임교수로 내정하고 싶습니다.”
“흐음····.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다.”

어차피 황제는 알테온의 편이다. 크리스는 그간 너무 많은 신용을 잃어버렸다.

다만, 오늘 설전으로 크리스 파벌 귀족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내가 은근히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에서 희망을  것이다.

‘생각대로 됐어. 이제 대공이 문제인데····.’

아직 대공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황제를 제외한 제국 최고의 권력자. 그의 발언은 지금껏 논쟁한 내용을 모두 뒤엎을  있을 정도다.

이윽고, 대공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백작의 계획이 정확히 뭔가?”

클레이튼 대공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리엘라의 주의를 깊게 새겼다. 나는 표정관리에 더욱 신경 쓰며 말했다.

“저는 복지부를 맡고 있죠. 이것도 평민들의 복지를 위한 계획의 하나입니다.”
“복지라··· 그렇군.”

뱀 같은 시선이 온 몸을 훑었다. 이내 클레이튼 대공이 눈을 감았다. 그것만으로 반대파벌 귀족들이 전부 입을 다물었다.

이후 알테온과 내가 아카데미의 이권을 다투는 동안에도, 대공 휘하의 귀족들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나는 알테온과 미리 짜둔 연극을 하면서도 대공을 계속해서 살폈다.

‘그냥 무난하게 통과하겠는데?’

얘기해둔대로, 알테온은 나와 대립각을 세웠다. 내가 크리스의 파벌로 녹아들기 쉽게 작업을 쳐주는 것이다.

덕분에 크리스 파벌은 내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상황이다. 크리스 파벌이 보기에, 나는 알테온과 대립하고 있으니 품에 안기 쉬워 보이니까.

나와 알테온의 대립이 점점 과열되고 있다. 간간히 황제가 중재를 한다. 여전히 대공휘하 귀족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차피 마지막에는 알테온 파벌도 마음을 바꿔 찬성할 터이다. 그럼 황제파벌 전원이 찬성하는 그림이 나온다.

‘그냥 통과시킨다고? 진짜?’

대공은 아직도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가 아카데미에 기사단이라도 끼워 넣을 줄 알았는데, 그럴 움직임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이권다툼도 점점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황제가 은근히 알테온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에 못이긴 내가 양보를 하는 식으로.

우려했던 반발은 처음과 달리 전혀 없었다. 싱거운 결과였지만 차츰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예상과 다르면 어떤가, 원하는 대로 되기만 하면 된다.

“그럼, 이지훈 백작의 안건은 이대로 통과를 시키는 것으로 하겠다.”

황제가 그렇게 선포까지 해버렸다. 그때가 돼서야 대공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슬며시 손을 들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저는 아직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파장은 컸다. 황제도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지? 반대를 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나.”
“잠시 생각에 잠긴 터라.”
“대공은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황제는 대공을 아니꼽게 쳐다보았다. 대공은 그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결국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세가 바뀌어서 당장은 대공이 미약하게 우세한 상황이었다.

“말해보게.”
“감사합니다.”

클레이튼 대공은 한차례 목례를 하고선 말을 이었다.

“우선 제 기사단의 일부를 아카데미에 주둔시키고 싶군요. 귀족자제들이 평민과 섞이면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 일은 블레앙 후작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러면 저도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공이 웃었다. 그의 휘하 귀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공은 전혀 말리지 않고 방관하기만 했다.

황제는 찌푸린 얼굴로 이마를 매만졌다. 알테온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새로운 발판이 마련되는 찰나에, 훼방을 놓고 있으니 두통이 생기는 기분이다.

나도 덩달아 두통이 생기는 듯했다.

‘시발. 다 된 밥에 왜 이제 와서 재를 뿌리는 건데!’

클레이튼 대공이 기를 쓰고 반대하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래, 반대를 할 거라고 생각은 했잖아.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 어차피 내가 끼어들 상황은 아니었다.

황제가 말했다.

“그럼, 그걸 들어주면 되겠는가?”
“하나 더 있습니다.”
“뭐지?”

대공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지훈 백작은 복지를 거론하며 아카데미를 개편하려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보여준 능력이 없죠.”
“복지부의 예산은 터무니없는 수준이었다는 걸,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백작의 능력을 보여주기엔 아직 시기상조가 아닌가. 그는 비리를 밝혀내어 복지부의 성장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우선 일을 맡겨보고 판단하는  낫지 않겠나?”

황제가 달래듯 말했다.
대공은 여전히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따가웠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공의 눈이 살짝 커진 걸 느꼈다.

이윽고, 대공은 황제를 다시금 바라보며 말했다.

“최근, 국경에 피해를 입은 지역이 있습니다. 이지훈 백작을 그곳에 파견해 능력을 시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복지의 일환일 테니. 백작의 능력을 확실히 시험할 수 있겠지요.”
“그건 대공의 억지가 아닌가!”

황제가 언성을 높였다. 클레이튼 대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그것도 하나의 복지가 아니겠습니까? 피해를 입은 지역을 복지부장인 백작이 가서 다독이고, 물자를 지원하는 일에 힘을 쓴다면,  또한 제국의 복지겠지요.”

시발.
표정관리가 잠깐 흐트러졌다. 대공은 나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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