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50)

16화

* * *

밤이 되면 통신구에 불이 들어온다. 두 꼬마는 속닥속닥 오늘 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베개에 폭 파묻힌 윈터가 작게 속삭였다.

“오늘은 <까마귀 기사님과 겨울 공주의 밤마다 피워낸 장미>라는 책을 읽었어.”

“[무슨 내용인데요?]”

사실 3페이지까지밖에 못 읽었다.

이건 어린이가 볼 수 없는 내용이라며 나일라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윈터는 대충 지어서 말하기로 했다.

제목만 봐서는 로맨스 소설이던데, 그런 쪽으로는 전생의 기억 덕분에 나름 빠삭했다.

“자기밖에 모르는 유아독존 모자란 남자한테 유능하고 대단하고 부족한 거 하나 없는 여자가 코 꿰여서 고생하는 얘기야.”

이렇게 말하고 나니 왜 나일라가 제게서 소설책을 뺏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사람은 그런 고생을 왜 한 대요?]”

“글쎄. 사랑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자기밖에 모르는 유아독존을요?]”

“아마 눈 돌아가게 잘생긴 놈이었나 봐.”

원래 로맨스 소설의 개연성은 8할이 남자 주인공의 미모다.

거기까지 말한 두 꼬마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요즘 부쩍 체력이 떨어진 윈터는 벌써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가만히 느려지는 숨소리를 듣고 있던 메이딜리언이 작게 인사했다.

“보고 싶어요.”

잠결에도 윈터는 대답을 잊지 않았다.

“우음, 나도…….”

두 꼬마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통신석을 꼭 끌어안고 사이좋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이셀이 흥분한 모습으로 윈터의 방에 들이닥쳤다.

“이제 마음껏 기뻐해라, 이 못된 망아지야.”

아직 잠도 덜 깬 윈터가 멍한 눈을 끔벅이는데, 아이셀은 그 모습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드디어 너를 살릴 수 있게 되었다, 하하하!”

“어떻게요?”

허리에 손을 얹고 껄껄 웃는 아이셀을 보며 윈터가 심드렁하니 물었다.

그러자 휙 고개를 돌린 아이셀이 두 눈을 반짝이며 속삭였다.

“스승님이 계신 곳을 알아냈거든!”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는 대현자 에르퀼 모네스티에의 행방을 알아냈다니.

확실히 아침부터 이렇게 들떠 있을 만했다.

“거기가 어딘데요?”

“마누트라 섬.”

“……섬?”

“그래. 대륙 동쪽 끝에서 일주일 정도 배를 타고 가면 나오는…….”

“자, 잠깐. 잠깐만요.”

윈터가 황급히 와다다 쏟아지는 아이셀의 말을 막았다.

대륙 동쪽 끝이라니.

황도 타운하우스에서 여유롭게 지내던 윈터에게는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동쪽 끝에서도 다시 배를 타고 일주일이라니?

“설마 제가 거길 가야 하는 건가요?”

그러자 아이셀이 뭘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픽 웃었다.

“당연하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네 마력을 봉인해보자.”

윈터는 대번에 불안해졌다.

아이셀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지만, 그녀는 현실 감각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마법사였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윈터가 조심스레 물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흐음, 글쎄. 연구가 성공한다면 아마 10년 안에는 되겠지?”

되긴 뭐가 돼. 완전히 망했네.

졸지에 최소 10년은 편지는커녕 제대로 된 연락도 할 수 없는 외딴 섬에 처박히게 생긴 윈터는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공작은 아니었다.

딸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누구보다 의욕적으로 나선 공작은 아이셀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준다고 선언했다.

제국 절반의 황금은 블라디미르에게. 그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필요한 지원은 어떤 것이든 요청하라며 책정한 예산에 아이셀이 경악했다.

평소에 그렇게 돈을 밝히던 것과 다르게, 의외로 아이셀은 간이 작았다.

여태껏 약값으로만 천문학적인 금액을 요구했으면서 이제 와 그 예산 전부를 거절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블라디미르 공작이었다.

아이셀의 거절을 가볍게 거절한 공작은 사람도 얼마 살지 않는 섬으로 가는 행장에 황금과 보석을 가득 챙겨주었다.

“마, 망아지야. 네 어머니 좀 말려봐라.”

결국 아이셀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윈터에게 달려왔다.

“제가 왜요.”

윈터가 침대에 파묻혀 퉁명스레 말했다.

아이셀 덕분에 섬에 끌려가게 생긴 윈터는 요즘 매우 저기압이었다.

“이익, 아, 내가 미안하다니까!”

아이셀이 바락 사과를 건넸다.

졸지에 윈터가 메이딜리언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윈터는 아이셀의 사과에도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죽기 전까지 메이딜리언의 곁에 붙어서 그를 도와주고자 했던 계획들이 모두 어그러졌다.

운 좋게 연구가 성공해서 살아난다고 해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사이에 메이딜리언이 눈이 돌아서 황궁에 쳐들어가고, 또 배신당해서 죽어버리면 어쩌려고.

문제는 이런 생각을 나눌 만한 인물이 공작가에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방해나 안 하면 다행이지.

“내가 물론 돈을 좋아하긴 하지만 나는, 나는! 돈에 깔려 죽고 싶지는 않아!”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황금 만능주의에 질식해가는 아이셀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윈터가 대뜸 물었다.

“마법사님.”

“왜.”

“루비로 공기놀이해 보고 싶지 않아요?”

“…….”

그 말에 잔뜩 일그러졌던 그녀의 표정이 마법처럼 잠잠해졌다.

곧 아이셀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크험험, 난 갑자기 바쁜 일이 생각나서 이만.”

이내 아이셀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잔뜩 맥이 빠진 윈터도 그대로 침대 위로 다시 널브러졌다.

“……드디어 조용해졌네.”

윈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섬으로 떠날 준비는 착착 빠르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메이딜리언에게 다 나아서 만나러 가겠다고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 결국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아가씨,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하게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윈터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들어와.”

나일라가 문을 열었다.

그 뒤로 푸른 머리의 영리한 얼굴이 보였다. 엘리슨이었다.

지난번 거래 때부터 윈터의 조언을 얻어 제니마 상회는 블라디미르 공작가에 모나 꽃 열매를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모나 꽃 열매는 마법사를 죽이는 독초로 유명했는데, 조금만 섭취해도 무서운 속도로 인간이 가진 마력을 소진시키기 때문이었다.

그 성질 때문에 마력 과다로 폭주를 일으키는 윈터에게는 오히려 이롭게 작용하지만.

‘나, 이거 가져오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줄곧 제 방 안에만 있던 윈터가 얼마 전 대뜸 그런 말을 했다.

‘모나 꽃이요?’

‘응.’

메이딜리언을 만나는 것 외에 블라디미르 공작가에서 윈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없었다.

블라디미르 공작은 당장에 제니마 상회에 연락했고, 윈터가 부른다는 말에 엘리슨은 열 일 다 제쳐두고 당장에 달려왔다.

“마,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가씨. 저는 제니마 상회의 엘리슨이라고 합니…….”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인사를 건네려던 엘리슨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모나 꽃 열매는 복용하면 입술이 푸르게 변하는 특징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셀이 만든 약을 먹고 나면 윈터의 입술도 곧잘 파랗게 물들어 있고는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엘리슨이 알 리가 없었다.

블라디미르 공작가에서 대량의 독초를 사들이는 것이야 이상하지 않았지만, 설마 그걸 저 작은 아가씨가 먹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얼마 전 봤을 때보다 눈에 띄게 야윈 모습을 보고 나니 더욱 충격적이었다.

‘나는 앞으로 8년 안에 죽어.’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후계자가 시한부를 선고받았다는 것은 이미 암암리에 퍼진 소문이었다.

설마 그게 이 독초 때문이었던 걸까? 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거지?

무심히 지나쳤던 말이 왜 이제야 뼈아프게 다가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 침대가 벅찰 만큼 작고 마른 모습에 엘리슨은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메이가 황제가 되는 것.’

마치 그것이 제 사명이라도 되는 듯 비장하게 말하던 눈빛에 새삼 가슴이 아려왔다.

“나일라, 이만 나가 봐.”

“네.”

엘리슨이 뭐 때문에 저러는지도 모르고 윈터는 나일라부터 내보냈다.

“당신, 대체 어째서 이렇게까지 황, 아니 메이 님을……!”

나일라가 나가기가 무섭게 엘리슨이 성큼성큼 다가와 말했다.

아니 말했다기보다는 눈물처럼 흩뿌렸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 같았다.

흡, 하고 제 입을 틀어막은 엘리슨은 이미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애를 좋아하거든.’

이 어린 나이에 이토록 애절한 사랑이라니! 엘리슨이 눈물을 글썽였다.

“아가씨의 사랑, 제가 꼭 응원할게요.”

“……갑자기 뭔 소리야, 또.”

만나자마자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엘리슨을 보며 윈터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나 그런 퉁명스러운 모습조차 이미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여 엘리슨은 작게 웃으며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이상한 착각에 빠진 것 같은 엘리슨을 보며 윈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과연 이 인간들을 믿고 떠나도 되는 걸까.

이마에 손을 올리니 슬슬 미열이 나고 있었다.

이 약한 몸으로 과연,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엘리슨,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곧 두려움을 갈무리한 윈터가 입을 열었다.

* * *

밤이 되었다. 온종일 정신없이 바빴던 윈터가 간신히 지친 몸을 침대 위로 뉘었다.

“……다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힘이 닿는 대로 다 알려주기는 했는데, 부디 똑똑한 엘리슨이 잘 이해하고 그대로 해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오늘 하루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이 느슨해지며 곳곳에서 비명을 질러왔다.

미열이 오르던 머리도 지끈거렸다.

당장이라도 쉬라며 종용하는 몸을 애써 외면한 채 윈터가 다시 바르게 누웠다.

손에는 어느새 통신석을 쥔 상태였다. 그 위의 붉은 마석이 누군가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했다.

“이제 메이만, 메이만 잘 달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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