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 *
창가에 비친 햇살이 반짝였다.
가벼운 셔츠에 바지 차림의 여자가 소매를 접어 올리며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검은 머리카락은 가볍게 목선에서 찰랑거렸고, 앞을 똑바로 응시하는 금빛 눈동자가 선명하다.
입술에 걸린 미소는 자신만만하고, 자세는 바르다.
붉은 마석이 장식된 펜던트를 목에 걸고 나서야 모든 준비가 끝났다.
“흐음, 좋아.”
지나가던 누구라도 한번은 돌아볼 만큼 매력적인 얼굴이 미소를 지었다.
윈터 블라디미르, 18살. 오늘은 그녀가 성인이 되는 날이었다.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자 막 안으로 들어오던 노인이 있었다.
성성한 백발과 서릿발 같은 잿빛 눈동자. 세상은 그녀를 대현자라고 불렀다.
“좋은 아침, 할머니.”
그 말에 에르퀼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 고얀 것! 그 말버릇은 어째 다 커서도 못 고치는 것이냐! 게다가 해 뜬 지가 언젠데!”
“나 원래 이런 거 몰라?”
히죽 웃는 윈터를 에르퀼이 밉지 않게 흘겼다.
“하여간, 생명의 은인에게는 조금 더 예를 갖추거라.”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에도 윈터는 그저 시큰둥했다.
“생명의 은인은 무슨, 우리 서로 하나씩 주고받기로 했잖아.”
“쯧쯧, 아주 한 마디도 안 지는구나.”
“어차피 할머니도 지는 애들은 별로 안 좋아하잖아?”
윈터는 에르퀼이 대현자랍시고 설설 기는 애들을 내심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걸 뻔히 알았다.
말을 던지는 족족 죄다 받아쳐지는 바람에 더는 할 말이 없어진 에르퀼이 그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오늘 큰 섬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냐?”
“맞아. 가서 선물 좀 사려고.”
“돌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 입이 귀에 걸리는구나.”
“당연하지. 그동안 여기서 얼마나 좀이 쑤셨는지 알아?”
“얼씨구, 좀이 쑤신다는 녀석이 그런 짓을 해?”
기가 찬다는 듯 내뱉는 에르퀼의 말에 윈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게 눈을 깜박였다.
“응? 무슨 일?”
“대륙에 이제 <칼리스타>를 모르는 자가 없다더구나. 아주 악명이 자자해!”
“너무 화내지 마, 할머니.”
씨익 윈터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내가 원래 나쁜 쪽으로는 좀 타고났어.”
에르퀼은 그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지었다.
이런 반응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윈터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콧노래를 불렀다.
“나 그럼 다녀올게!”
“가다 다치지나 마라!”
“에이, 내가?”
픽 웃은 윈터가 곧 집 앞마당으로 나갔다.
가볍게 숨을 들이켠 그녀의 눈동자가 한층 더 금빛으로 진해졌다.
곧 거대한 흰색 새 모양의 마력이 그녀의 앞에 뭉쳤다.
마치 작은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처럼 윈터가 그 위에 올라탔다.
창밖으로 슬쩍 그 모습을 바라본 에르퀼이 바락 소리쳤다.
“너! 내가 그렇게 마력 낭비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보통 사람은 꿈도 못 꿀 방법으로 마력을 펑펑 써대는 윈터였다.
하지만 에르퀼의 경고에도 윈터는 그저 깔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 정도는 끄떡없어! 나 갈게, 할머니!”
기분 좋은 바람과 함께 윈터가 떠올랐다.
이내 마력으로 만든 흰 새가 빠르게 날아갔다.
마누트라 섬. 사실 이 섬은 큰 섬과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큰 섬은 마누트, 작은 섬은 누트라 섬이라고 불렀다.
윈터와 에르퀼은 이 작은 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단둘이 보냈다.
결계가 처져 있는 작은 섬. 대현자가 머무는 비밀스러운 땅. 그것이 누트라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반면에 마누트 섬은 나름 큰 규모의 섬이었다.
작은 마을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사람도 여럿 살았고 한 달에 한 번씩 소규모 장이 열리기도 했다.
물론 그 장이 원래부터 열리던 것은 아니었다.
예전이었다면 마누트 섬사람들도 일주일씩 걸려서 육지로 나가야 했었다.
하지만, 3년 전 갑자기 생긴 정보 길드 칼리스타에 의해 마누트라 섬사람들의 삶의 질은 대폭 상승했다.
든든한 일자리가 생기고, 육지에서 넘어오는 사람들도 늘어난데다 칼리스타가 운영하는 정기선이 생기며 달마다 장을 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 작은 섬에서 시작한 길드는 놀라운 속도로 커져서 이제 대륙에서도 그 이름을 아는 자가 꽤 되었다.
“리어트! 나 왔어!”
마누트 섬에 가볍게 착지한 윈터가 버럭 외치며 한 건물에 쳐들어갔다.
이곳이 바로 정보 길드 칼리스타의 본거지였다.
“리어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윈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라면 당연히 이 시간에 여기에 있어야 할 인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좋은 아침, 윈터.”
기척도 없이 윈터의 뒤로 그림자가 졌다. 나른하고 까슬까슬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윈터는 뒤에서 와락 저를 끌어안는 체온에 그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무거워. 저리 가.”
“쳇, 냉정하기는.”
“그리고 해 뜬지가 언젠데 좋은 아침이래.”
윈터는 제가 아침에 에르퀼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 말에 리어트가 순순히 윈터를 놓아줬다.
“그럼 좋은 점심?”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하는 헛소리에 윈터가 픽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녀석도 처음 만났을 땐 까칠하기 그지없었는데. 그때랑 비교하면 지금은 비교도 안 되게 물렁해졌다.
청보랏빛 머리카락과 짙은 피부색이 그림처럼 어우러지는 이 미남의 이름은 리어트.
시원한 입매가 매력 포인트라고 일컬어지는 정보 길드 칼리스타의 부단주이자 윈터의 동업자이다.
그에게서 가장 큰 외형적 특징을 꼽자면 마력이 담겼다 일컬어지는 보랏빛 눈동자를 꼽을 수 있겠다.
빛을 받으면 동공이 작아지는, 수인족 혼혈 특유의 눈동자였다.
“보고서는?”
“여기.”
윈터가 손을 내밀자 리어트는 기다렸다는 듯 서류 뭉치를 건넸다.
지난주 제국의 동향과 대륙에 진출한 칼리스타 지점의 매출 현황 보고서였다.
집중해서 읽느라 살짝 찌푸려진 윈터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리어트가 물었다.
“근데 있잖아.”
“왜. 나 읽는데 방해하지 마. 저리 가서 놀아. 이따가 놀아줄게.”
귀찮다는 듯 리어트의 손을 치운 윈터가 무신경하게 몇 마디 뱉었다. 그러나 리어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나도 같이 가는 거 어떻게 생각해?”
“어딜?”
“황도.”
그 말에 윈터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줄곧 턱을 괸 채 심드렁한 표정이던 리어트가 시선이 마주치자 반짝 눈을 빛냈다.
“갑자기 황도는 왜?”
“왜긴. 우리 단주님이 가시는데 부단주가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지.”
그러나 윈터는 작게 도리질을 쳤다.
“안 돼. 본부엔 아직 네가 필요해. 일단은 상황을 보고, 가능하다면 황도로 본부를 옮기게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야. 일단 넘어야 할 큰 산도 있고.”
“꼭 만나야 할 애인도 있고?”
가늘게 눈을 뜨며 하는 소리에 윈터가 못 말리겠다는 듯 작게 웃었다.
이 말을 한두 번 듣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인 아니라니까.”
“8년째 걸고 있는 목걸이나 빼고 그런 말을 하지?”
“이건…….”
윈터는 반사적으로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있을게요!’
헤어질 때 마지막 대화를 끝으로, 아직 실험작이었던 통신석은 그대로 기능을 다했다.
애초에 짝지어 만들어진 메이딜리언의 것과는 물리적 거리 자체가 너무 멀어서 더는 연결할 수조차 없었다.
“……뭐, 잘 컸을까 궁금은 하네.”
“그러게 미리미리 연락해보라니까.”
“어쩔 수 없지.”
안타깝게도 8년 전을 마지막으로 윈터와 메이의 연락은 아예 끊겼다.
처음 에르퀼을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윈터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연구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아이셀이 만들어준 약으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긴 했지만 실제로 죽을 고비는 몇 번이나 더 있었다.
덕분에 윈터는 이 실험에 아주 회의적이었다.
더 일찍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섬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자니 당시의 윈터는 평소답지 않게 감상적으로 변했었다.
‘그래, 차라리 이게 기회일지도 몰라.’
지금이라면 땅을 치고 후회할 만한 다짐까지 했기 때문이다.
윈터가 아직 공작가에 머물던 시절, 메이딜리언은 다소 폐쇄적인 성향을 보였다.
윈터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경계가 심했고,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윈터는 이번 기회에 다른 사람과도 잘 어우러져 지낼 수 있도록, 일부러 자신의 존재감을 조금 지워 보자 싶었다.
만약 이대로 있다가 자기가 죽기라도 하면, 메이딜리언의 충격이 너무 심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메이가 더 성장할 수 있을 거야.’
물론 이 방법은 장렬하게 실패했다.
윈터는 한두 번, 나일라를 통해 간신히 메이딜리언의 소식을 전달받았다. 건조한 성격의 나일라답게 메이딜리언은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줬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있는지, 잘 웃기는 하는지 물었는데 그냥 잘 지낸다니. 윈터의 입장에서는 그저 순조롭게 망하고 있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원작에서 망한 인성을 자랑하던 메이딜리언을 뻔히 알던 윈터였기에 그녀는 당연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메이딜리언이 눈앞에 있기라도 했으면 목을 짤짤 흔들며 뭐라도 해보겠지만 섬에 처박힌 윈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제 목숨마저 간당간당해서 오늘내일하는 와중에 뭘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대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닐까. 포기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다행히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을 만큼, 연구는 성공적이었다.
물론 완벽한 성공은 아니었다. 시간만 조금 벌었을 뿐.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윈터는 만족했다.
그 사이 에르퀼을 닦달해서 마법도 익혔고, 메이딜리언을 도와줄 정보 길드까지 구축했으니까.
그렇게 5년의 시간이 지났다.
병마와 싸우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도 윈터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잠까지 줄여가며 쓰러질 때까지 일하며 정보 길드의 틀을 만들었다.
마침내 칼리스타를 출범시키고, 윈터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메이딜리언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