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메이, 나 치유마법은 못 써.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익힐 수가 없더라고.”
제대로 듣고 있기는 한 건지, 메이딜리언은 대답이 없었다.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며 윈터가 말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 올 때까지 내가 지켜줄 테니까, 우선 체력부터 비축해.”
“……좋아요.”
눈을 감은 그대로 메이딜리언이 작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단둘이 있게 되었네요.”
“어? 뭐라고?”
“그래서 더 좋아요…….”
윈터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히 두 뺨이 화끈거리며 열이 오르기만 해서 얼른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어, 얼른 자기나 해.”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윈터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이마에 손 올려주세요, 아가씨.”
서늘한 윈터의 손을 가져다 제 이마에 올려놓은 메이딜리언이 작게 속삭였다.
상반된 온도에 기분 좋은 듯 그가 윈터의 손에 이마를 비볐다.
“그러면…… 잠이 잘 올 것 같아요.”
어린 메이딜리언의 어리광 같은 느낌에 윈터의 입가는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픽 웃은 윈터가 메이딜리언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마침내 가물거리던 시야가 스르륵 감기며 메이딜리언은 제가 말한 대로 잠에 빠졌다.
8년 만에 맞이하는 안온한 단잠이었다.
* * *
날이 밝고, 메이딜리언도 깨어났다.
자고 나면 낫는다는 말이 영 농담만은 아니었는지 전날보다 열도 내리고 상태도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이 굳어 있었다.
“왜 말 안 했어요?”
“아니, 말을 안 한 게 아니라…….”
부상자가 메이딜리언뿐이 아니었던 탓이다.
붉게 부어오른 윈터의 손목을 보며 메이딜리언이 작게 인상을 썼다.
“당신을 다치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닌데…….”
“이건 너 때문에 다친 게 아니야, 메이.”
후회 가득한 목소리에 윈터는 그저 의아했다.
자기 다친 건 자고 나면 낫는다더니, 고작 손목 좀 삔 걸 가지고 뭐 저리 유난인지.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낫는다고 해줄까 하던 윈터는 그냥 그만뒀다.
사실 윈터도 자기가 다친 걸 까맣게 몰랐던 터라 퍽 당황스러웠다.
지난밤에는 메이딜리언이 아프다는 생각에 다른 걸 살필 겨를이 없었다.
‘하여간 넌 중증이야.’
문득 리어트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윈터를 만난 이후로, 그녀는 단 한 순간도 메이딜리언에게 진심이 아니었던 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야유하듯 꺼낸 말에 그때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었는데.
이래서야 중증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생각에 괜히 윈터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친 손목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던 메이딜리언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아가씨, 지금 무슨 생각해요?”
흠칫 놀라 고개를 든 윈터가 순순히 대답했다.
적절히 진실은 숨긴 채로.
“아, 리어트라고…….”
“……리어트?”
“응. 마누트라 섬에서 사귄 친구야.”
리어트를 떠올리니 메이딜리언의 미래도 자연스레 같이 상상하게 됐다.
원작에서 수인족들과 힘을 합치던 멋진 모습들을 떠올리며 윈터가 흐뭇하게 웃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해줄게. 분명 너도 맘에 들 거야.”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슬쩍 웃는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번뜩이는 붉은 눈이 섬뜩했다.
안 그래도 윈터의 지난 8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메이딜리언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말해주겠지, 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제일 처음으로 언급하는 게 거기서 만난 친구 같은 거라니.
메이딜리언이 궁금한 건 고작 그런 게 아니었다.
사실 그의 아가씨는 메이딜리언에게 새로 사귄 친구 같은 건 말하지 않은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끓어오르는 살기를 내리누르기 어려웠으니까.
“그나저나 왜 마력 폭발이 일어난 거죠? 완전히 고쳐진 게 아니었어요?”
메이딜리언이 화제를 돌리려고 다른 말을 꺼냈다.
그전까지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절벽에서 추락하면서 썼던 마력은 분명 불안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메이딜리언의 물음에 윈터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 마도구를 잃어버려서 그래. 아마 옷 갈아입다가 떨어뜨린 것 같은데.”
“흐음, 잃어버렸다고요?”
치료 결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은 채, 윈터가 작게 웃었다.
다행히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유도한 대로 넘어와 줬다.
무슨 생각인지 골몰하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윈터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뭐, 잃어버렸으면 어쩔 수 없지. 아이셀 언니한테 또 만들어달라고 하면 돼. 너무 걱정하지 마. 넌 네 몸부터 지켜야지.”
“아아, 그거 말인데요.”
윈터가 메이딜리언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그런데 메이딜리언은 갑자기 허리를 바로 세우더니 씩 웃었다.
비밀을 가득 숨긴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에 순간 윈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아가씨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나한테? 뭔데?”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손목을 조심스레 감쌌다.
아까부터 유심히 살펴보더니, 뭘 하려는 거지?
그때 메이딜리언의 손에 잿빛 마력이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다.
그 마력의 색에 윈터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원작에서는 분명, 메이딜리언의 마력이 검은색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메이? 지금 뭐 하는…….”
어쩐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다 마칠 수 없었다.
발현된 메이딜리언의 마력이 윈터의 손목을 치료하고, 더 나아가 메이딜리언의 몸까지 빠르게 치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작은 생채기까지 완벽하게, 지우개로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말끔해지는 모습에 윈터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원래 메이딜리언이 가진 마력의 형질은 <죽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메이딜리언의 마력은 원작에서 터부시되는 데다 매번 그를 공격하기 좋은 약점이 되기도 했다.
메이딜리언의 마력이 생명력을 빨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는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메이딜리언을 지탄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는 걸 아는 윈터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갑자기 치유라니.
마력의 형질을 어떻게 바꾼 거지? 아니면 처음부터 치유로 발현된 건가?
윈터는 혼란에 빠졌다.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마력이 가라앉고, 메이딜리언이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속삭였다.
“……왜?”
“약속을 지켰다는 걸 증명하려고.”
약속이라는 말에 윈터의 눈이 커졌다.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있을게요!’
‘자, 잘…… 클게요. 정말 잘 커서, 만나러 갈게요, 아가씨. 알겠죠?’
그 시절의 메이딜리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헤어졌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메이딜리언이 눈을 휘어 웃었다.
“저 잘 컸죠?”
매혹적인 미소에 윈터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당연하지.”
윈터가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 8년 동안, 메이딜리언도 메이딜리언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윈터는 메이딜리언이 원작의 메이딜리언과 닮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메이딜리언은 윈터만의 메이딜리언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아주 짧지만 반짝이는 추억을 공유한.
그 작고 착하고 겁 많던 메이딜리언을 다시 만나게 된 것 같은 기쁨에 윈터는 저를 바라보며 웃는 남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메이!”
“하하.”
메이딜리언은 낮게 웃으며 윈터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병색을 완연히 지우지 못해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몸. 밤새워 그리던 향기가 온전히 품에 안겨 왔다.
잃어버린 조각을 마침내 찾은 것처럼 가득 차오르는 만족감을 메이딜리언은 오래 음미했다.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드디어, 내게 돌아왔다.
* * *
치료를 마친 두 사람은 이내 동굴에서 나왔다.
메이딜리언의 치유 덕분에, 절벽에서 추락한 사람들답지 않게 멀쩡하기 짝이 없었다.
“아가씨.”
“응?”
“가기 전에 보여드릴 게 있어요.”
“또?”
보여줄 게 뭐가 그리 많은지.
픽 웃은 윈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동굴 근처 풀숲으로 걸어간 메이딜리언이 거대한 남자 하나를 끌고 나왔다.
“그게 뭐야……?”
난데없는 시체의 등장에 윈터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의 눈빛은 사냥감을 자랑하는 맹수처럼 초롱초롱했다.
“설마 이것도 선물이야?”
“하하, 뭐, 비슷하긴 하죠.”
윈터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럴 땐 칭찬을 해줘야 하나, 혼을 내야 하나?
“이 옷, 어디서 많이 보지 않으셨어요?”
“……어?”
고민하던 윈터에게 메이딜리언이 작은 힌트를 주었다.
그 말에 윈터가 상대를 유심히 살폈다. 이내 그녀는 정답을 알아챘다.
붉은 두건을 휙 가리킨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이거, 어제 우릴 습격한 그 산적이네?”
“맞아요. 아마 그 난리 통에 우리랑 같이 휩쓸린 것 같아요.”
마력도 폭발하고 말들도 날뛰었으니 절벽으로 추락한 것이 윈터와 메이딜리언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체 이 사람을 언제 발견한 거지?
“그런데 아무래도 이놈, 평범한 산적이 아니에요.”
그 말에 윈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끊임없는 습격. 산적이라고 하기엔 많았던 인원. 게다가 사람을 모는 솜씨나 짜임새 있는 공격까지.
안 그래도 평범한 산적이라기엔 의심스러운 정황이 여럿 있던 참이었다.
“그러면?”
메이딜리언이 말없이 죽은 산적의 어깨 쪽 옷을 부욱 찢었다.
그러자 흘림체로 쓴 것 같은 검은 주술이 문신처럼 새겨진 것이 드러났다.
“이게 뭐야?”
“암흑 주술입니다.”
알아보기 힘든 마력의 흔적을 더듬어가던 윈터에게 메이딜리언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내놓았다.
휙, 고개를 든 윈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자백 금지 같은 게 걸려 있겠죠.”
“그렇다는 건 이 사람…….”
말끝을 흐린 윈터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알고 싶지 않던 진실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끝내 그녀의 말을 이어받아 명확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네, 살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