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럴 리가.”
그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전혀 뜻밖의 목소리였다.
이내 바람이 불며 휙, 흙먼지가 모조리 쓸려 날아갔다.
폭탄에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을 각오하고 잔뜩 몸을 웅크렸던 데보라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얼음으로 된 벽이었다.
단단한 벽은 마력 폭탄에도 끄떡없이 데보라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자신이 선물했던 짙푸른 셔츠가 눈에 들어오자 데보라는 조심스레 상대를 불러보았다.
“……위, 윈터 아가씨?”
부름에 대답이라도 하듯 벽 위에 선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흠결 하나 없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장막처럼 흔들리고, 신을 믿게 만드는 찬란한 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내 다정한 미소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데보라.”
다친 데 하나 없이 멀쩡한 윈터였다.
“아가씨!”
울컥한 데보라가 외쳤다.
온몸이 상처로 너덜너덜한 데보라를 살핀 윈터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얼어붙은 호수처럼 싸늘한 눈동자가 그대로 히르칸에게 향했다.
“감히, 우리 메이의 심복을 건드려?”
분노하는 지점이 조금 이상했으나, 여기서 그걸 지적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곧 얼음으로 만든 벽이 허물어지고 가볍게 아래로 내려온 윈터가 마력 폭탄이 터진 잔해들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쯧, 이런 데 쓰라고 판 게 아닌데 말이야.”
설마 여기서 아이셀의 발명품을 발견할 줄은 몰랐던 윈터였다.
그녀는 아무래도 저택에 돌아가는 즉시 리어트에게 고객 관리 좀 제대로 하라고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좀 진지한 얘기를 나눠볼까, 히르칸?”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윈터가 말했다.
“제, 젠장!”
경악한 히르칸이 뒤로 주춤 물러서는데 등 뒤에 한 명이 더 있었다.
“너……!”
도망칠 수도 없게 사각지대까지 차단한 메이딜리언이었다.
어느새 데보라도 다시 윈터의 곁으로 가 검을 들었다.
완벽히 포위된 히르칸을 보며 윈터가 픽 웃었다.
“공작가로 돌아가면 해야 할 말이 많겠어. 그렇지?”
“알고 있는 건 전부 실토하게 만들겠습니다.”
메이딜리언이 히르칸의 이마 쪽을 보며 대답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고문 방법을 히르칸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히르칸은 당장 이동 스크롤을 꺼내 도망치려 했다.
물론 그것마저 윈터와 메이딜리언에 의해 차단되었지만.
“으, 으아악!”
히르칸이 너덜너덜해진 제 손목을 붙잡고 바닥을 굴렀다.
바람의 마력으로 스크롤만 찢는다는 게 범위 조절이 잘 되지 않아 다른 것도 찢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내 실수야.”
가볍게 혀를 차며 윈터가 히르칸에게 다가갔다.
지독한 통증으로 이마에 잔뜩 핏대가 선 히르칸이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응?”
“분명, 분명 빙결 계열 마법사였는데…….”
“아아.”
이 세계의 사람들은 한 가지 마력만을 다루는 게 기본 상식이었다.
히르칸은 오는 내내 윈터가 빙결 마법을 쓰는 것만 봐서 아무래도 그녀가 빙결 계열 마법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그냥 그게 제일 쓰기 편해서 자주 쓰는 것뿐이야.”
윈터가 준 힌트에 히르칸이 경악했다.
그의 머릿속은 맹렬하게 상황을 파악하느라 바빴다.
“그걸 알려줘도 괜찮아요?”
메이딜리언이 슬쩍 윈터에게 물었다.
그는 처음부터 윈터가 두 가지 계열의 마력을 쓰는 것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윈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상관없어.”
이내 서늘한 시선이 다시금 히르칸에게 닿았다.
“알아도 말할 수 없을 테니까.”
어차피 대마법사가 아니고서야 하나 이상의 마법을 쓴다는 걸 믿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윈터는 마력 조절도 어렵고, 치유마법도 꽝이었으니 애초에 대마법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손목은 치료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둬.”
“예, 알겠습니다.”
윈터의 말에 메이딜리언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히르칸을 그대로 꽁꽁 묶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또 남의 손목에 상해를 입히게 되었지만, 윈터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공작가로 돌아가면 다시금 손목 수집가의 악명을 떨치게 될 텐데, 그 첫 타자로 히르칸은 나쁘지 않았다.
감히 누가 그녀를 죽이라 사주했는지도 알아내다 보면 썰어야 할 손목은 고작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저어, 아가씨.”
“응?”
살기등등한 윈터의 앞에 불쑥 데보라가 나섰다.
“제, 제 손목도…….”
얌전히 제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내민 데보라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제 손목도 잘라주세요!”
“뭐……?”
난데없이 들이 밀어진 손목에 윈터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데보라는 지금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허둥지둥 제 허리춤에서 마도구를 꺼낸 데보라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빠르게 말했다.
“제, 제가 아가씨 마도구를 훔쳤어요. 정말 죄송해요. 비록 한순간이지만 아가씨한테 나쁜 말을 한 것도 그렇고, 저 때문에 아가씨가 하지 않아도 될 고생도 하셨고, 또…….”
말하다 보니 상황이 심각했다.
데보라는 한심하고 멍청한 자신의 행동에 괜히 눈물이 찔끔 나왔다.
고작 손목이 뭐야. 발목이랑 목까지 전부 잘라다 바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제 발목을 내려다보며 눈빛을 번뜩이는 데보라를 보던 윈터가 실소했다.
데보라의 생각이 눈에 잡힐 듯 훤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데보라와 같은 짓을 했다면 용서가 없었을 것이나, 미래에 그녀가 할 일을 알고 있는 윈터는 그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고, 그냥 당분간 내 수족처럼 따라다니면서 심부름이나 해.”
그 말에 데보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손목은 받았다 치자.”
데보라가 내민 마도구만 달랑 들고는 윈터가 돌아섰다.
그 미련 없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데보라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반짝였다.
* * *
히르칸을 짐칸에 꽁꽁 묶어둔 그들은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마부도, 마차도 새로 구해야 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작가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살수들도 기를 쓰고 덤벼들었던 거겠지만.
“메이.”
마차를 점검하고 있던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슬쩍 살피던 윈터가 다가서자 자연스레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숙였다.
윈터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혹시 너, 마력 있는 거 비밀이야?”
그 말에 메이딜리언의 입가가 휘었다.
“왜요?”
“아니, 그냥. 느낌이 그래서.”
보니까 마법을 쓰는 데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이는데, 메이딜리언은 오는 내내 한 번도 다른 사람이 있는 데에서는 제힘을 드러내지 않았다.
히르칸의 검에 여기저기 베인 데보라도 근처 마을에서 간신히 치료를 받았다.
“네, 맞아요.”
메이딜리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공식적으로, 저는 비밀 호위대에서 마력을 못 쓰는 걸로 되어 있어요.”
“왜?”
잠시 눈을 굴리던 메이딜리언이 솔직하게 말했다.
“각하께서 너무 눈에 띄는 건 좋지 않다고 하셨거든요.”
“아.”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임무를 맡을 때는 적당히 변장하거나 얼굴을 가리던 메이딜리언이었다.
검술도 수준급인데 굳이 치유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까지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게 블라디미르 공작의 생각인 듯했다.
“하긴. 치유는 의원이나 사제한테도 받을 수 있으니까.”
홀로 납득한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메이딜리언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윈터는 메이딜리언이 어떤 식으로 치유를 쓰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굳이 나서서 알려줄 생각도 없었지만.
“아가씨! 여기 계셨네요!”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데보라가 나타났다.
“어어.”
윈터는 얼른 메이딜리언에게서 떨어졌다.
전에도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가운데를 가르고 지나간 데보라의 눈총을 받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딜런 님도…… 있었네요?”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슬쩍 윈터와 메이딜리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데보라가 윈터가 아닌, 메이딜리언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행동의 의미를 모르지 않는 메이딜리언이 픽 웃으며 이죽거렸다.
“그새 갈아탔나 봐?”
“갈아타다뇨! 전 원래부터 아가씨의 추종자였어요!”
“……갑자기?”
의아한 건 윈터도 마찬가지였다.
“무, 물론 제가 어리석어서 처음엔 아가씨의 진면모를 몰라봤지만…….”
휙 몸을 돌려 윈터를 마주한 데보라가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딜런 님이 왜 아가씨를 따르는지 알겠어요. 그 강인함! 아름다움! 게다가 자애로움까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데보라가 꿈이라도 꾸듯 몽롱한 눈으로 말했다.
“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거겠죠.”
“그, 그래?”
윈터가 어색하게 하하, 웃자 메이딜리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원래도 거슬렸던 데보라가 한층 더 눈엣가시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지금 그 눈은 뭐예요, 딜런 님? 아가씨! 저 너무 무서워요!”
“…….”
무섭기는 개뿔이.
기죽지도 않고 메이딜리언을 자극하는 데보라를 보며 윈터는 그저 난처했다.
애초에 둘이 주종관계 아니었어?
“디, 딜런?”
조심스레 메이딜리언을 부르자 그가 눈에 띄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적으로 작고 약한 데보라를 보호하는 윈터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점점 더 맘에 안 드는데.”
작게 중얼거린 메이딜리언이 휙 자리를 떴다.
누가 봐도 삐친 기색이 역력한 메이딜리언을 보며 윈터가 픽 웃었다.
그리고 데보라에게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데보라.”
“네! 아가씨.”
“당분간 밤길 조심해.”
“네에…….”
뒤늦게 두려움이 밀려오는지 멈칫한 데보라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금세 기세를 회복한 데보라가 윈터를 졸졸 따라다니며 쫑알쫑알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처음엔 좀 의아했어요. 딜런 님은 써머 외에 저렇게 너그럽게 대하지 않았는데.”
“써머?”
원작에서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름에 윈터가 작게 인상을 썼다.
“그게 누군데?”
“아주 아끼는 녀석 있어요.”
데보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써머라…….”
이미 훌쩍 사라진 메이딜리언의 행방을 눈으로 좇으며 윈터가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그 이름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