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쯧, 큰일이네.”
예상보다 빨리 본색을 드러낸 섭정 황제의 행태에 윈터가 곤란하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곧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가 마력을 뭉쳐 작은 새를 만들어냈다.
수신지는 늘 그렇듯,
“마누트라 섬의 리어트에게로.”
작게 속삭인 윈터가 몸을 돌린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윈터가 유심히 어둠 속을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메이……?”
그러자 어둠 속에서 대답이라도 하듯 메이딜리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 아래, 창백하여 푸른 기가 돌 정도로 하얀 피부가 보였다.
빛을 담뿍 받아 반짝이는 피부 어디에도 흉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아 윈터는 내심 뿌듯했다.
좀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붉은 눈동자가 의문을 품고 물었다.
“저인 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거야 이 공작가에서 그런 짓을 할 만한 건 너뿐이니까.
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킨 윈터가 짤막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냥. 너인 것 같았어.”
의외로 메이딜리언은 그 대답이 맘에 든 것 같았다.
눈을 접어 웃은 그가 천천히 윈터 쪽으로 다가갔다.
“이 시간에 너는 여기 웬일이야?”
쌀쌀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윈터가 물었다.
“갑자기 마력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 한 번 와봤어요.”
그 말에 윈터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흐트러진 머리를 잡아 고정하면서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속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설마 벌써 마력을 감지하게 됐을 줄은 몰랐던 탓이다.
원작보다도 성취가 빠른 것 같아 기쁘면서도, 놀라웠다.
“아아, 그거?”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린 윈터가 대답했다.
“아이셀 언니의 마도구를 좀 작동시켜봤어.”
“위험한 건 아니죠?”
“그럼, 당연하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윈터의 모습에, 메이딜리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윈터는 제 나름대로 티를 안 낸다고 하지만 상대는 메이딜리언이었다.
어린 시절 눈칫밥 먹던 경험으로 그는 타인의 감정에 무척이나 예민했다.
특히나 윈터에게는 몇 배는 더 민감했으니 그녀의 동요를 메이딜리언이 알아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굳이 윈터가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때 두 사람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으으.”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린 윈터가 발코니 문을 다급하게 열고는 물었다.
“메이, 잠깐 들어갔다 갈래?”
그 말에 메이딜리언이 잠시 멈칫하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신경 쓴다면 결코 안으로 초대하지는 못할 텐데.
아직도 저를 아홉 살짜리 꼬맹이로 보는 건가 싶어 그의 기분은 조금 저조해졌다.
물론 윈터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이 밤중에, 다 큰 메이딜리언을 방 안으로 초대한다는 것이 사자의 입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라는 걸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윈터에게는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직 그녀의 뒤에는 미처 도망치지 못한 들쥐들이 있었으니까.
“흐음, 뭐, 좋아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던 메이딜리언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윈터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메이딜리언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듯 발코니 문을 열어준 윈터는 그가 들어가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가 얼른 발코니 문을 닫았다.
“어후, 얼어 죽을 뻔했네.”
일부러 과장되게 제 팔을 쓸며 윈터가 중얼거렸다.
마냥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 으슬으슬하던 몸의 떨림도 멈췄으니까.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 밤에는 기온이 낮은 탓이었다.
“메이, 뭐 따뜻한 거라도 마실…….”
차라도 대접할까 싶어 몸을 돌렸던 윈터가 멈칫했다.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메이딜리언이 자연스럽게 물을 끓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이 방의 주인을 그녀가 아니라 메이딜리언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를 것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혹시 나 없을 때도 여기 와본 적 있어?”
카우치에 몸을 묻으며 윈터가 물었다.
차를 끓이는 데 집중한 듯, 이쪽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메이딜리언이 되물었다.
“왜요?”
“아니, 그냥. ……꽤 익숙해 보여서.”
메이딜리언은 그저 슬쩍 미소 지을 뿐 정확하게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곧 차를 우려낸 그가 윈터의 맞은편에 앉았다.
호록, 차를 들이켠 윈터는 얼었던 몸이 천천히 녹는 것을 느꼈다.
뺨에는 발갛게 열이 오르고, 표정은 저절로 느슨해졌다.
“피곤하지는 않으세요?”
노곤해진 윈터를 가만히 보던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으응. 아까 낮에 잠깐 잤어. 너는?”
“저도 뭐 딱히 피곤하지는 않네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메이딜리언의 말에 윈터도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방을 밝힌 불빛에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에는 공포도, 우울함도, 절망도 없다.
‘자, 잘못했어요!’
혹시라도 얻어맞을까 덜덜 떨며 움츠리던 마른 몸.
멍과 상처로 가득하던 어린 얼굴.
처음 이 방에서 마주했던 메이딜리언을 떠올린 윈터의 입가에 쓴 미소가 어렸다.
“아가씨.”
“응?”
“무슨 생각 하세요?”
그늘이 사라진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윈터는 아주 맘에 들었다.
“네 생각.”
뜻밖의 대답에 찻잔을 들고 있던 메이딜리언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제……생각이요?”
“응. 처음에 너랑 여기서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
윈터의 금빛 눈동자가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낮게 가라앉았다.
“그땐 되게 겁 많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잘 자란 게 신기하잖아.”
다른 사람에겐 잔뜩 날을 세우다가도 윈터에게는 온 마음을 활짝 열고 기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같은 어린애라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감사한 일이었다.
메이딜리언이 순순히 그녀를 따라주지 않았다면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이 더 촉박해질 뻔했으니까.
“아아.”
윈터의 말에 메이딜리언도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 그가 뭔가 떠오른 듯 픽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응? 뭐야, 너야말로 무슨 생각해?”
“그냥, 그때의 아가씨가 생각나서요.”
예상 밖의 화제에 윈터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 내가 어땠는데?”
몸을 잔뜩 제 쪽으로 기울인 채 눈을 빛내는 윈터를 보며 메이딜리언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착하시죠.”
“……내가?”
메이딜리언의 말에 윈터의 얼마 남지 않은 양심이 쿡 찔렸다.
어릴 적부터 메이딜리언 보는 데서는 최대한 원래 성질을 죽이기도 했고, 애초에 남들이랑 메이딜리언을 대하는 윈터의 태도는 천국과 지옥만큼 차이가 났다.
이러다가 그녀가 칼리스타의 주인이라는 걸 알게 되면 실망하는 건 아니려나.
“하, 하하. 뭐, 내가 좀 그렇긴 하지.”
그건 그때 걱정하기로 하고, 윈터는 지금 주어진 칭찬을 낼름 받아먹었다.
그걸 보며 메이딜리언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처음엔 아가씨를 의심했어요.”
“그……랬어?”
자신을 의심했다는 말에 윈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린 시절 메이딜리언에게서는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밝고, 해맑고, 귀여운 꼬맹이였는데.
“그렇다고 지금까지 의심한다는 건 아니에요.”
놀란 듯 눈을 깜박이는 윈터를 보며 메이딜리언이 황급히 덧붙였다.
“세상 그 누구보다, 아가씨를 믿어요.”
붉은 시선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유혹하듯 휘어지는 눈매를 보면서도 윈터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으응. 고마워.”
“…….”
“근데 처음엔 날 의심하긴 했구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근데 난 전혀 몰랐어.”
윈터가 턱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속으로는 한창 앞으로 메이딜리언의 신뢰를 얻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중이었다.
“지금도 많은 걸 모르시죠.”
그런 그녀를 가는 눈으로 야유하듯 흘겨보며 메이딜리언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말에 윈터가 이상함을 느끼기 전에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것 말고 다른 거 더 궁금한 건 없으세요?”
어느새 메이딜리언도 몸을 기울여 윈터와 가까워진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윈터가 눈을 들었다.
“으음, 궁금한 거?”
“네.”
살살 미소 짓는 얼굴은 더없이 매혹적이었다.
코앞에 닿을 듯 가까워진 메이딜리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윈터는 드물게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거야 셀 수 없이 많았다.
조금 전 메이딜리언이 한 말이 맘에 걸려서 그런가.
제일 처음에 자기를 의심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잘 따랐는지.
떨어져 있던 지난 8년간 힘든 일은 없었는지.
본인이 황자라는 걸 알았을 때는 기분이 어땠는지.
자신이 그립지는 않았는지.
책으로는 읽을 수 없는 행간을 물어보고, 빈칸을 꼼꼼히 하나도 빼놓지 않고 채우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쑥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써머가 누구야?”
“……네?”
예상하던 것과 전혀 다른 질문이었는지 메이딜리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윈터 또한 할 수만 있다면 제 입을 힘껏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어볼 게 그렇게 많은데, 왜 하필!
“써머는 어떻게 아셨어요?”
무척 친근하게 부르는 이름에 윈터는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그냥, 알게 됐어.”
작게 입술을 삐죽이며 하는 말에 메이딜리언이 순간 멈칫했다.
곧 그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눈치 빠른 메이딜리언이 지금 윈터의 감정을 모를 리가 없었던 탓이다.
조금 더 자극해볼까 싶은 사악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써머는 제게 아주 소중한 친구예요. 어린 시절부터 쭉 함께 해왔거든요.”
장난기 어린 눈동자가 반짝였다.
바닥만 보고 있던 윈터는 미처 메이딜리언의 표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제 속을 훤히 드러낸 것 같은 질문에 민망해져서 아까부터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평소답지 않게 불퉁하게 튀어나온 물음에 메이딜리언이 결국 목을 울리며 웃었다.
이내 활짝 눈을 휘어 웃은 그가 불쑥 윈터의 턱을 잡아 저를 보게 만들고는 물었다.
“궁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