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윈터가 홀린 듯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내 씩 웃은 메이딜리언이 훌쩍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내일 알려드릴게요.”
“뭐?”
그 말에 윈터가 와락 미간을 구겼다.
순간 메이딜리언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내일 알려준다고?”
“네. 아가씨한테 소개해드릴게요.”
“아니, 나는 별로 만나고 싶지는 않은데…….”
엉겁결에 제 속마음을 말한 윈터가 흠칫 놀라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이미 거의 다 말한 뒤였다.
메이딜리언이 눈에 띄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짜요? 제 소중한 친구인데도요?”
‘소중한’ 친구라니.
그 말이 왜 그렇게 거슬렸는지 모르겠지만, 메이딜리언을 상대로 윈터가 이길 리가 없었다.
마른침을 삼킨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내일 만나볼게.”
그러자 메이딜리언이 기쁜 듯 눈을 접어 활짝 웃었다.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대체 뭘 기대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밤을 보낸 윈터는 날이 밝자마자 메이딜리언이 머무는 별채 쪽 숙소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친 써머를 보고는 금세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얘가 써머라고?”
“네. 귀엽죠?”
“으음…….”
메이딜리언이 품 안에 가득 안고 있는 것은 써머, 그러니까 써머라는 이름의 거대한 고양이었다.
얼마나 잘 먹여서 키운 건지 보통 고양이의 두 배는 되는 크기에 털은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고양이가 아니라 표범인 것 같은데?”
“하하.”
윈터는 더없이 진심이었는데, 메이딜리언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금색 눈동자를 가진 써머는 윈터와 눈이 마주치자 뀱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게다가 이 세계의 흑막이자 인성 박살 난 걸로 유명한 메이딜리언을 뒷발차기로 가볍게 털어내고는 천천히 윈터에게 다가왔다.
소리도 없이 걸어온 써머가 윈터와 시선을 맞추고는 천천히 제 두 눈을 깜박였다.
이게 고양이들 사이에서 인사로 통한다는 것쯤은 어렴풋이 알고 있던 윈터도 써머를 따라 눈을 깜박였다.
“안녕, 써머?”
사람식 인사도 건네자 묘하게 웃는 듯한 얼굴의 써머가 윈터의 무릎에 발을 척 올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그녀의 무릎 위에 웅크리고 누웠다.
“귀여워…….”
반사적으로 중얼거린 윈터가 아주 조심스럽게 써머의 털을 쓸어보았다.
보는 것만큼이나 따뜻하고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곧 윈터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네가 고양이를 키울 줄은 몰랐는데.”
원작에도 등장하지 않던 써머의 정체가 설마 고양이일 줄이야.
메이딜리언이 써머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며 중얼거렸다.
“저도 몰랐어요.”
사실 메이딜리언은 윈터의 말처럼 당연히, 고양이를 키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세상은 전부 제게 등을 돌린 것만 같고, 절망으로 가득했던 어느 날.
비에 잔뜩 젖어 덜덜 떨고 있던 비실비실한 고양이 하나가 하필 검은 털에 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바람에 메이딜리언은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장난처럼, 이름을 써머로 지은 것은 전부 그 때문이었다.
“아가씨랑 닮았어요.”
“응? 나랑?”
뜻밖의 말에 윈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써머랑 꼭 닮아서 메이딜리언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상상하던 장면을 눈으로 보게 되어 지금 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런가…….”
윈터는 눈을 감고 골골거리는 써머를 내려다보았다.
원작에서는 나오지도 않는 고양이를 고작 자기를 닮았다는 이유로 키웠다니.
어쩐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 * *
“대체 누구야?”
복도를 성큼성큼 걸으며 윈터가 와락 표정을 구겼다.
오후에 통신석으로 받은 보고 때문이었다.
“감히 우릴 건드려?”
황도에 새로 오픈한 칼리스타 본부를 누군가 지난밤 습격했다.
안 그래도 윈터가 요구한 인원 증축 때문에 요즘 칼리스타 내부는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급습에 다들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상대는 전문 살수들처럼 재빠른 움직임이었고.
다행히 다들 좀 다친 정도고 사망자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이건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젠장.”
윈터가 신경질적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머릿속은 벌써부터 이번 습격의 배후를 탐색하느라 바빴다.
칼리스타의 성장세가 눈에 거슬릴 만한 인물.
그만한 무력을 가진 집단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
“오셨습니까, 아가씨.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상념을 방해한 것은 집사였다.
곧 윈터는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오오, 윈터. 왔느냐.”
여유로운 웃음을 짓는 블라디미르 공작을 보며 윈터도 활짝 웃었다.
“엄마.”
“그래, 오늘 몸 상태는 좀 어떠니?”
“좋아요.”
공작의 물음에 맞은편에 앉으며 윈터가 대답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예요?”
“으음, 그냥 딸이랑 이런저런 얘기나 할까 싶어서.”
윈터는 제 나름대로 블라디미르 공작을 잘 알았다.
그녀는 딸을 누구보다 많이 아끼지만, 시답잖은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누는 성격은 아니었다.
역시나, 공작은 얼마 안 가 본론을 내놓았다.
“조만간 성대한 연회를 열까 하는데.”
“연회요?”
“그래. 네가 섬에 있는 동안 데뷔탕트도 못했잖니.”
“으음, 그건…….”
딱히 필요 없는데. 윈터가 애써 말을 삼켰다.
어차피 그녀는 사교계에 나설 생각이 그다지 없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블라디미르 공작가에서 그런 걸 했다고.
원래부터 귀족 세계의 이단아나 다름없는 집단 아니었나.
굳이 그런 걸 하지 않아도 귀족이란 족속들은 알아서 공작가의 부와 권력에 머리를 조아릴 인간들이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안다. 하지만 후계자의 자리를 공고히 해야 하지 않겠니.”
“후계자요?”
“그래. 쓸데없는 것들이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게 말이다.”
블라디미르 공작의 눈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나일라에게 언뜻 듣기로는 윈터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섬으로 떠나 소식이 없는 동안 후계자에 대한 불안이 암암리에 공작가에 퍼지고 있던 모양이다.
아직까지 공작이 워낙 건재하니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은연중에 자리를 점찍어놓는 자들도 있다나 뭐라나.
이번에 히르칸을 통해 암습을 당하지 않았다면 윈터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블라디미르 공작가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보여주어야겠다.”
블라디미르 공작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더 섬뜩했다.
그때였다.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던 공간에 좋지 못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각하.”
안으로 들어온 것은 비밀 호위대 중 한 명인 듯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흰 가면을 쓴 여자가 다가와 부복했다.
“무슨 일이지?”
“그게…….”
보통 때라면 딸과의 대화를 방해하지 말라며 물렸을 공작이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작게 속삭이는 소리는 윈터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았으나 척 봐도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뭐? 아직도 버티고 있다고?”
아무래도 최근에 또 어딘가를 밟아놓으신 모양이군.
윈터가 차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오죽하면 제국 절반의 황금은 블라디미르에게, 라는 격언이 생겼을까.
게다가 뒷세계도 장악하고 있었으니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그 권력이 방대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어둠 속에서 군림해온 것에 별다른 비결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가지고 있는 재력으로 거의 독과점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새로 올라오는 어둠의 싹들은 남김없이 짓밟으면서.
“……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생각에 윈터가 멈칫했다.
곧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제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흥, 아주 발악을 하는군.”
더없이 사악한 미소는 악당처럼 빛났다.
“감히 겁도 없이 기어오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지.”
“어떻게 할까요?”
“남김없이 뭉개…….”
“엄마.”
한창 비밀 호위대와 대화를 나누던 블라디미르 공작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칼리스타에 애들 풀었어요?”
윈터의 물음에 공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맙소사. 설마 했던 생각이 맞아들어가자 윈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당장 철수시키세요.”
자세한 설명도 없이 대뜸 나온 말에 공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공작가가 점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뒷세계를 겁도 없이 살살 건드린 것이 바로 칼리스타였다.
슬금슬금 칼리스타 쪽으로 거래처를 옮기는 자들도 몇 있는 것까지 보고 나니 공작의 눈이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뭐라고? 아무리 네가 내 딸이라지만…….”
“거기 내 거예요. 건드리지 마요.”
뜻밖의 말에 공작과 호위대의 어깨가 동시에 흠칫 굳었다.
블라디미르 공작은 급히 말을 바꿨다.
“……정말 대단하구나.”
급하게 변명처럼 나온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진짜,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황도와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데다, 연락이라고는 닿지 않는 작은 섬에서 대체 무슨 수로 그렇게 세력을 불렸는지 모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스타가 마도구를 시장에 풀며 돈을 쓸어 담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마도 아이셀과 모종의 거래를 한 모양이지?
“수완이 대단하구나.”
공작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슬리던 칼리스타의 성장세는 금세 대견한 딸의 업적이 되었다.
하긴, 어린 시절부터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영특했지.
몹쓸 병에 걸리지만 않았다면 진작에 뒷세계를 찜 쪄 먹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갑작스레 밀려오는 애틋한 마음에 공작이 눈물을 콕콕 찍었다.
“켈리.”
“예, 각하.”
“칼리스타 본부에 정식으로 사과한다는 성명서를 보내고, 복구 작업에 착수해라.”
“예? ……예.”
손바닥 뒤집듯 변한 공작의 태도에 잠시 멈칫하던 비밀 호위대가 이내 빠르게 사라졌다.
블라디미르 공작은 태연한 얼굴로 차를 홀짝이는 윈터를 보며 씩 웃었다.
“이렇게 된 거, 네게 더 숨길 것도 없겠구나.”
“저한테 숨기고 있는 게 있으세요?”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했다.
“어제 히르칸이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