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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35/150)

35화

“이 무식한! 당장 이거 못 놔?”

그사이 알버트는 씩씩거리며 잔뜩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속으로는 그 꼴을 보며 쯧쯧 혀를 차는 윈터였지만 우선 상황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아까 맨손으로 알버트의 화염 마력을 만진 터라 메이딜리언의 손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만 놔줘, 딜런.”

아무리 손이 너덜너덜하더라도 메이딜리언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면 결코 알버트를 제압한 손을 풀지 않을 거라는 걸 윈터는 알았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이딜리언의 팔이 느슨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속박에서 벗어난 알버트가 빠드득 이를 갈며 외쳤다.

“건방진……!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주지!”

그는 금세 다시 마력을 뭉쳐 메이딜리언에게 공격을 시도했다.

“크, 으아아악!”

물론 그것마저 메이딜리언이 가볍게 발을 걸어 넘어뜨린 걸로 무마되었지만.

제 마력에 제가 당한 알버트가 한심한 꼴로 바닥을 이리저리 구르며 악을 썼다.

그런 그의 손목을 메이딜리언이 가차 없이 짓밟았다.

으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알버트의 손목이 그대로 으스러졌다.

“아악! 아파, 아파! 아프다고! 우욱.”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알버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힘없이 툭 꺾이는 제 손목을 보고 헛구역질까지 하는 알버트를 보며 윈터가 멍하니 생각했다.

사실 손목 수집가는 쟤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좀 무식해서.”

그렇게 말하곤 메이딜리언이 아무렇지 않게 발을 뗐다.

그 무성의한 사과가 윈터와 똑 닮아 있어서 알버트는 더 복장이 터졌다.

“감히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말은 메이딜리언에게 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명백히 윈터에게 향해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윈터가 픽 웃었다.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한복판에서 후계자에게 저렇게나 기고만장하게 외치는 건 대담한 걸까, 멍청한 걸까.

“아아, 아무래도 정말로 다 까먹은 모양이네.”

안하무인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사촌을 대체 어떻게 혼내줄까 싶은데, 이 소란에 사용인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어, 어머. 어떻게 해.”

“세상에, 저거 알버트 도련님 아니야?”

“저런, 어쩌다가…….”

“윈터 아가씨께 덤빈 모양이네.”

“아아.”

마지막 사용인의 말에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기들 딴에는 작게 얘기한다고 하는 거겠지만 우습게도 다 들렸다.

윈터는 코웃음을 쳤고 알버트는 애써 못 들은 척하고 있었지만 벌써 목부터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 한심한 꼴을 보다 못한 윈터가 뒤쪽에 있던 하인 두엇을 불러 지시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것 같으니 의무실에 모셔다드려라.”

“예. 알겠습니다, 아가씨.”

사용인들은 어느 때보다도 바지런한 몸짓으로 알버트를 부축해 사라졌다.

그들도 잠시 잊고 있었을 윈터의 악명이 알버트를 통해 되살아난 모양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윈터는 그대로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어느새 메이딜리언이 소리 없이 따라붙었다.

“화나셨어요?”

슬쩍 거리를 좁힌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응.”

사용인들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윈터가 그대로 분노를 드러냈다.

“왜요?”

“네가 다쳤잖아.”

걸음을 멈춘 윈터가 휙 몸을 돌리며 물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짠, 하고 메이딜리언이 제 두 손을 내밀어 보였다.

맨손으로 지글지글 끓는 마력을 잡은 탓에 물집이 잔뜩 잡혀 상했던 손은 어디로 간 건지.

어느새 흉터 하나 없이 뽀얀 손바닥에 윈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잊으셨어요? 저는 다쳐도 안 다치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아무래도 그새 마력으로 전부 치료한 모양이었다.

메이딜리언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손을 보여주면 윈터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였다.

윈터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더니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픈 건 똑같잖아.”

“…….”

메이딜리언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난처하게 웃었다.

이상하게 윈터의 앞에서는 바보처럼 잘도 웃음이 나왔다.

마력을 치유로 발현시키는 법을 깨달은 뒤, 누구도 그를 이런 식으로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가끔 윈터의 앞에 서면, 메이딜리언은 자신이 여전히 작고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키도, 체력도, 어쩌면 무력까지도 자신이 한참 위인 데도 윈터는 항상 메이딜리언을 지켜주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걸 메이딜리언도 알았다.

“다음엔 그러지 마. 너무 무모하잖아. 크게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네. 이제 안 그럴게요.”

윈터가 몇 번이고 당부하며 상처가 있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쓸어보았다.

손바닥 위를 간질거리는 체온에 메이딜리언의 손이 움찔했다.

그 미묘한 동요에도 윈터는 얼른 손을 치웠다.

“아, 미안.”

“괜찮아요.”

어딘가 멍한 말투로 중얼거린 메이딜리언이 제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했다.

그걸 버릇처럼 홀린 듯 바라보던 윈터가 의식적으로 눈을 또렷하게 뜨며 말했다.

“아니, 미안해.”

“괜찮다고 말씀드렸…….”

“그거 말고. 알버트 말이야.”

쯧, 하고 혀를 찬 윈터가 작게 인상을 썼다.

“제대로 혼내줄 만한 방법을 찾으려다 보니 오늘은 그냥 순순히 보내줬잖아.”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한 것은 메이딜리언이었다.

윈터가 알버트를 못마땅해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심하기로 따지면 오히려 데보라가 더 심하지 않았나?

데보라는 순순히 넘어가 줬는데 알버트는 왜 그렇지 않은지.

메이딜리언은 윈터의 기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혼내주는데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물음에 윈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마법으로 색을 다르게 한 녹색 눈동자가 말간 빛을 내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냐니. 저 자식, 어릴 때 널 괴롭히던 그놈이잖아.”

“아아.”

그제야 알았다는 듯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윈터의 기준도 알아차렸다.

데보라는 메이딜리언에게 대단히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알버트는 아니었지.

그게 윈터가 사람을 대하는 기준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은 메이딜리언은 어딘지 기분 좋은 기색이었다.

“뭐야, 모르고 있었어?”

“아뇨, 뭐. 그건 아닌데.”

그의 삶에서 그만한 인간 말종은 여럿 있었다.

이제 와서 딱히 특별히 기억에 남지도 않는 자들.

정확히 말하면 윈터를 제외한 대부분이 그랬다.

늘 멸시와 증오를 담은 시선을 보내고, 힘과 권력을 이용해 짓밟던 자들.

“이제 그런 건 별로 상관없어서요.”

턱을 긁적이던 메이딜리언이 픽 웃으며 말했다.

눈을 부릅뜬 윈터가 벌컥 화를 냈다.

“상관이 없기는!”

윈터가 저를 위해 화를 내준다는 걸 뻔히 아는 메이딜리언이 샐샐 눈웃음을 지었다.

“전 아가씨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참나.”

사람을 홀릴 정도로 반짝반짝한 미소를 짓는 메이딜리언에게 윈터는 면역력이 없었다.

묘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오늘따라 또 왜 이렇게 야살스러운지.

원작에서 메이딜리언이 나오는 장면은 달달 외울 정도로 열심히 읽었던 윈터지만 새삼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분명 이렇게 위험한 분위기의 미남으로 자란다는 말은 없지 않았나?

“됐어. 내가 안 괜찮아.”

바보처럼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서 윈터는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툴툴거리는 윈터를 보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메이딜리언은 여전히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기다려. 조만간 내가 저 자식 목을 가져다줄 테니까.”

윈터가 서늘한 시선을 빛내며 말했다.

그 박력 넘치는 말에 메이딜리언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기대할게요.”

* * *

그날 밤, 윈터는 들쥐 손님들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리비우스 블라디미르]

쪽지에 적힌 이름은 아주 익숙했다.

다름 아닌 그녀의 외삼촌, 정확히는 알버트의 아버지였으니까.

“흐음.”

윈터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가 칼리스타에 의뢰한 것은 아이셀의 특제 마력 폭탄을 구매한 자들의 명단이었다.

물론 리비우스 말고도 폭탄을 구매한 자들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리어트는 윈터가 찾는 인물을 정확하게 가려냈다.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후계자를 해쳤을 때,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자.

또는 자신이 그러할 것이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자.

‘감히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낮에 들은 알버트의 말이 자연스레 떠오르자 윈터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되지도 않게 기고만장한 데에는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까.”

미약한 밤바람이 윈터의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고 지나갔다.

그녀는 손에 쥔 쪽지를 굴리며 고민했다.

머릿속에서는 벌써 리비우스와 알버트, 이 두 부자를 어떻게 요리할까 하는 두근두근한 계획들이 마구 떠올랐다.

이번 일을 리비우스가 독단으로 했을 리 없다.

그는 이미 윈터의 어머니인 오필리아 블라디미르에게 한 번 패배했으니까.

감히 현 공작인 오필리아에게는 덤비지 못했겠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섬으로 유배되듯 떠난 윈터는 꽤 만만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히르칸 같은 쥐새끼가 넘어간 거겠지.

“다시는 쪽도 못 쓰도록 기를 눌러줘야겠네.”

공작가에 스며든 칙칙한 곰팡이들을 남김없이 씻어내야 했다.

메이딜리언이 앞으로 걸어 나갈 길에 조금의 걸림돌이라도 되지 않도록.

“내일은 특식을 준비해줄게.”

기특한 소식을 물어다 준 들쥐들을 보며 윈터가 속삭였다.

그리고 까만 눈 너머를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고생한 너희들도 보너스 두둑이 챙겨줄 거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

들쥐들과 연결되어 있던 수인 정보원들이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빵 부스러기를 정신없이 먹던 들쥐들이 영문도 모르고 두 손을 번쩍번쩍 드는 것을 보며 윈터가 작게 웃었다.

“기대해, 알버트.”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윈터의 금빛 눈동자가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날, 의무실에 누워 대자로 퍼져 있던 알버트는 영문도 모르고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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