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에이, 그럴 리가 있어?”
“맞아, 맞아. 블라디미르 영애랑 아주 절친한 사이라고 알버트가 그랬잖아.”
빙글빙글 웃으며 하는 말에 알버트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어릴 적엔 종종 같이 놀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는 법.
자존심 빼면 시체나 다름없는 알버트는 일부러 턱을 치켜들고는 말했다.
“다, 당연하지! 당장 따라와. 소개해 줄 테니까.”
다혈질인 알버트는 평소에도 발끈하면 얼굴이 벌게지곤 했다.
지금도 그는 눈에 띄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대며 몸을 돌렸다.
같이 붙어 다니며 그런 알버트를 뻔히 알고 있던 영식들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해서 이제 완전히 나았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알버트가 무슨 생각으로 제게 오는 줄도 모르고, 윈터는 한창 연회장을 찾아준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걱정하는 척 건강에 문제는 없는지 물어보는 질문들이 불쑥불쑥 들어오는 것만 제외하면,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러운 대화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이봐.”
대화의 흐름을 끊어놓은 것은 엉거주춤 다가와 선 알버트였다.
평소에 알버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는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윈터는 저를 부르는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이봐’라는 친밀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호칭을 듣고 자기를 부르는 거라고 대체 누가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알버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윈터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묘한 대치 상태인 윈터와 알버트를 번갈아 보며 수군거렸기 때문에 더 그랬다.
덕분에 목까지 붉으락푸르락해진 알버트가 성큼성큼 윈터에게 다가가 그 앞에 섰다.
샹들리에 불빛을 가리는 어두운 그림자에 마침내 윈터가 고개를 돌렸다.
“……뭐야, 알버트?”
윈터가 조금 미간을 찌푸리며 알버트를 불렀다.
고작 그게 뭐라고, 꽤 친밀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에 알버트는 조금 우쭐해졌다.
물론 윈터는 조금의 친근감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난데없이 나타난 불청객 때문에 기분이 저조해진 상태였다.
“무슨 일이야?”
“아아, 인사해. 여기는 순서대로 아심, 카이라트, 해리슨, 레이몬드야.”
제 뒤를 가리키며 알버트가 거들먹거렸다.
어쩜 모아놔도 꼭 이런 조합인 건지.
가문에서도 내놨다고 표현하는 떨거지들의 등장에 윈터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도박에 술주정은 기본이고, 각종 폭행과 사치에 이르기까지.
칼리스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간 한심한 인물들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들쥐들조차 크게 팔을 엑스자로 교차하며 ‘얘네는 답이 없어!’하고 알려줬을까.
게다가 알버트는 또 어떤가.
얼간이 중 최고 얼간이인 그는 딱 봐도 저들 사이에서 물주 역할인 것 같았다.
“바, 반갑습니다. 영애!”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디 손등에 입 맞출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알버트가 제 이름들을 소개해 주자마자 그를 제치고 나온 떨거지들이 앞다퉈 자신을 소개했다.
평소 자신을 대하는 것과는 눈에 띄게 다른 저자세에 알버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알버트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속으로 쯧쯧 혀를 차며 한심하다 생각하던 윈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제일 뒤에 있던 금발 머리 남자.
줄곧 샐샐 웃는 표정의 그가 이 무리의 리더 격인 자였다.
이름이 아마 레이몬드였지?
“제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요?”
“네, 그럼요.”
“흐음, 과연 무슨 얘기를 했을지 무척 궁금해지네요.”
“야, 그건…….”
윈터와 레이몬드의 대화가 제가 원하는 방향과 달라지자 얼른 알버트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레이몬드가 한 발 더 빨랐다.
“영애와 무척 친하다고 하더군요. 평소에도 블라디미르 공작 각하께서 알버트를 믿고 중요한 일을 많이 맡기신다죠?”
“어머, 그래요?”
“예. 어릴 적부터 서로 누나 동생으로 칭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레이몬드에 의해 다소 과장된 말에 윈터가 비죽 웃었다.
“누나, 라.”
이내 그녀의 시선이 알버트를 향했다.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았어? 난 그것도 지금 알았는데.”
“그, 그건……!”
공공연하게 친분을 자랑하던 알버트를 대놓고 부정하는 말이었다.
애초에 윈터는 어릴 적부터 남에게 무관심했다.
알버트의 나이조차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 그 방증이었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알버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윈터는 그런 알버트 대신 레이몬드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는 윈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알버트를 보며 보란 듯이 픽 웃어 보였다.
아마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한 것도 바로 레이몬드일 것이다.
원래부터 남이 유도한 대로 끌려가는 건 딱 질색이었던 윈터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알버트를 조금 건져줄까 하던 순간이었다.
“이런, 이런. 다들 여기 모여 계셨군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순식간에 윈터와 알버트에게로 집중되던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사람들 사이로 나타난 것은 더티 블론드 머리카락과 노란빛의 눈동자를 가진 중년의 미남이었다.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딱 봐도 알버트와 닮은 이목구비에 윈터가 자세를 달리했다.
저 남자가 바로 리비우스 블라디미르.
현 블라디미르 공작의 동생이자 윈터의 외삼촌이었다.
“알버트 너는 안 그래도 바쁜 녀석이 굳이 여기까지 오다니. 하여간 네 사촌 하나는 끔찍이도 챙기는구나.”
“아, 아버지.”
“앞으로도 윈터가 황도 적응을 잘하도록 네가 도와주려무나.”
“……알겠습니다.”
장성한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리비우스가 뿌듯하게 웃었다.
본인에게는 그럴 의도가 요만큼도 없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니 알버트는 서툴지만 사촌을 아끼는 철부지가 되어 있었다.
교묘하게 상황을 알버트에게 유리하게 만든 리비우스가 은밀히 윈터에게 시선을 번뜩였다.
상황을 이렇게까지 자초한 게 제 아들과 그 녀석의 절친한 친구들이라는 건 조금도 깨닫지 못한 얼굴이었다.
애써 비웃음을 참고 있던 윈터를 향해 리비우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윈터.”
“네. 그러게요, 삼촌. 그동안 잘 지내셨죠?”
윈터 또한 리비우스를 보며 반갑게 웃었다.
무려 아이셀의 특제 폭탄을 잔뜩 구매해주신 우량 고객님이셨으니까.
“그럴 리가 있니.”
윈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비우스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어찌나 표정 변화가 극적이던지 하마터면 배우를 마주하고 있는 줄 알 뻔했다.
“네가 마력 폭주를 일으켜 얼마 못 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신파를 찍는 리비우스의 말에 주변이 웅성거렸다.
리비우스의 말은 당연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알버트가 윈터 때문에 영지로 쫓겨난 것이 부당하다며 항의하기 바빴던 걸 뻔히 다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조카를 아껴 마지않는 삼촌인 척하는 꼴이라니.
“어머,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그럼 그게 그냥 떠도는 헛소문이 아니었군?”
“어쩐지. 아까부터 은근히 낯빛이 창백하다고 느낀 게 영 기분 탓만은 아니었네.”
윈터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단 얘기를 내부자가 직접 떠벌리는 꼴에 다들 웅성거렸다.
“이제 마력을 쓰는 데는 문제가 없는 게 맞니? 전에는 폭주도 일으키고 상황이 아주 심각했잖니.”
“……네, 그럼요. 지금은 너무 건강해서 탈인걸요.”
조카를 아끼는 척 흠집 내기 바쁜 리비우스의 꼴이 그다지 보기 좋지 않았으나 원래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더 흥미가 있는 법이다.
오만한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가 알고 보니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니.
게다가 마력 폭주까지. 다들 재밌어할 소문일 것이다.
다들 안 그런 척 리비우스의 말에 귀가 쫑긋한 게 느껴졌다.
“네가 몸 건강히 돌아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단다.”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들의 반응을 기민하게 살피던 리비우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라는 듯 제 어깨를 도닥이는 그의 손을 당장이라도 뿌리치고 싶었으나 윈터는 애써 이를 악물고는 참았다.
“이제 다 나은 게 확실하지?”
“그렇다니까요, 하하.”
리비우스는 집요하게 윈터의 상태를 확답받으려 했다.
점점 어깨를 잡은 손길이 강해지는 것 같다고 느끼던 윈터가 조금 짜증을 섞어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훌쩍 뒤로 물러선 리비우스가 다들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네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구나.”
뜻밖의 말에 윈터가 미심쩍은 듯 되물었다.
“……제안이라고요?”
“그래. 폭주만 아니라면, 네 마력은 차기 대마법사로도 손색이 없었잖니.”
난데없는 대마법사 언급에 주변이 다시 웅성거렸다.
윈터는 슬슬 리비우스가 바라는 게 뭘까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준비했던 대사를 읊었다.
“어릴 적부터 기량이 뛰어났던 네게 곧 건국제에 있을 무투 대회를 추천하고 싶구나.”
무투 대회라는 말에 윈터의 표정이 돌변했다.
“하, 무투 대회요?”
제니어스 제국의 무투 대회에서는 무기나 마도구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마력 활용만으로 자웅을 겨룬다.
타국에서도 이 무투 대회를 감상하기 위해 사람이 몰려들 만큼 제국 최고의 행사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 번째는 무투 대회의 상 때문이었다.
우승자에게는 그 어떤 것이든 황제가 소원을 들어주니까.
초대 우승자인 레녹스 그레이가 건국 황제인 알렉산드라에게 자신을 받아달라고 한 것이 가장 유명한 일화다.
덕분에 매해 올해 우승자는 무슨 소원을 빌지 점치는 게 하나의 유흥처럼 자리 잡았다.
이후로 누군가는 막대한 상금, 권력이나 작위 같은 걸 요구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황제의 기사 자리를 맡게 해달라고 청하여 명예를 드높이곤 했다.
특히 실력만 있다면 작위에 상관없이 자신의 재능을 뽐낼 수 있어 재능 있는 평민들의 등용문으로 여겨졌다.
메이딜리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