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뭐?”
메이딜리언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윈터가 아픈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흐음, 이렇게 보면……? 아하, 그렇군. 그런 거였군.”
반면에 의원은 막힌 속이 뻥 뚫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결 산뜻한 얼굴로 윈터를 살폈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메이딜리언에게 명령했다.
“아가씨가 얼른 낫기를 바라신다면, 우선 그 손 놓고 조금 떨어지시죠.”
“하.”
그 당당한 요구에 어이가 없어진 메이딜리언이 헛웃음을 쳤다.
하지만 의원의 말을 무시하기도 영 맘에 걸렸다.
결국 그는 두고 보자는 눈빛으로 의원을 쏘아보며 조심스레 윈터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멀어졌다.
놀라운 일은 바로 그다음에 일어났다.
눈도 똑바로 못 뜨고 휘청거리던 윈터가 뚝 헛구역질을 멈춘 것이다.
덕분에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묘해졌다.
기뻐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순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종의 저주 같습니다.”
어느새 메이딜리언에게 슬쩍 다가온 의원이 말을 붙였다.
궁 밖에서 자란 2황자는 마치 돌아온 탕아와 같은 느낌이었다.
눈이 돌아가게 잘생긴 외양에도 불구하고 살기등등한 모습은 모두를 겁먹게 하기 충분했다.
그런데 윈터라는 아가씨가 깨어나자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순종적인 강아지인 것처럼 행동하는 메이딜리언의 모습은 놀랍기 짝이 없었다.
윈터가 아픈 원인을 알아내지 못하면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닐까 막연히 걱정하고 있던 의원은 그 순간 두려움을 내려두었다.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있는 한 결코 제가 했던 겁박을 현실로 만들 수 없을 거라는 걸 눈치챈 덕분이었다.
“저주라고?”
“예. 그리고 매개체는 바로 메이딜리언 님이십니다.”
용기가 생긴 의원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메이딜리언은 대놓고 자기 때문에 윈터가 아프다는 말에도 화내지 못했다.
자신이 화낼 주제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과 더불어 대체 언제 제가 저주의 매개체가 되었나 되짚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없으면 아가씨는…….”
“예. 금방 기운을 차릴 겁니다.”
메이딜리언이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마른침만 삼키는 그의 눈빛이 낮게 침잠했다.
의원의 말이 마치 지금 두 사람의 상황뿐만 아니라, 윈터와 메이딜리언의 미래 전부를 의미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자신만 아니었으면 윈터가 이렇게 아플 일도, 고생할 일도 없었을 텐데.
잠시 잊고 있던 죄책감이 메이딜리언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아까와 달리 말이 없어진 그는 천천히 윈터에게서 멀어졌다.
소리도 없이 밖으로 나온 메이딜리언을 발견한 데보라가 얼른 다가와 물었다.
“아가씨는 어때요? 괜찮으신 거예요? 의원이 뭐래요?”
부산스럽게 여럿이 들어갈 수가 없어서 데보라는 문 앞만 지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들어갔을 때보다 더 어두워져서 덜컥 겁이 났다.
대꾸는커녕 누구 하나 걸리면 죽여 버릴 듯 살벌한 표정에 데보라가 흠칫 어깨를 굳혔다.
다행히 이번엔 메이딜리언이 입을 열었다.
“곧 괜찮아질 거야.”
“휴, 다행이다.”
데보라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다가, 아가씨가 깨어나면 나한테 알려 줘.”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딜런 님은 안 기다리세요?”
“…….”
데보라의 물음에 메이딜리언은 침묵했다.
어딘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데보라는 눈만 굴렸다.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누워 있는 방의 문을 한 번 힐끔 보더니 몸을 돌려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데보라를 통해 윈터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 * *
“그래서 제가 딜런 님한테 가서 알려 드렸어요.”
“그랬구나. 잘했네. 고마워.”
“헤헷.”
막 깨어난 윈터의 침대맡에 서서 데보라가 쫑알거렸다.
안 그래도 의원에게서 아무래도 이번에 기절한 원인이 메이딜리언 때문인 것 같다는 말을 전해 들은 윈터였다.
난데없이 저주라니. 듣는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몸이 자꾸만 늘어져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가볍게 혀를 찬 윈터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어, 아가씨, 갑자기 움직이시면 위험해요!”
“괜찮아. 이제 멀쩡한걸.”
메이딜리언과 떨어지자 어질어질하던 머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해졌다.
아직 속은 좀 울렁거리지만, 그래도 정신을 잃기 직전보다야 몸 상태는 훨씬 호전되었다.
“어디 가시려고요?”
“으응.”
재빨리 두꺼운 숄을 가져온 데보라가 윈터의 어깨에 그것을 둘러주었다.
쓰러지는 와중에도 데보라를 통해 위치를 파악한 윈터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친자 검사를 하기 전에 메이딜리언과 에른스트 후작을 만나게 하고 싶었는데.
그 순간에는 아픈 것마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산책이라도 하려고.”
“이 밤에요?”
윈터의 말에 데보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창밖에 새파란 달이 막 떠오른 참이었다.
저택의 사용인들 대부분이 바쁜 하루를 정리하고 쉬러 간 시간이었다.
하지만 줄곧 침대에서 정신이 혼곤하던 윈터는 홀로 눈이 말똥말똥했다.
“제가 같이 갈게요.”
“아니야. 그냥 혼자 갈게.”
“그래도 위험…….”
“내가 누군지 까먹은 건 아니지?”
불안한 듯 입술을 삐죽이는 데보라를 보며 윈터가 픽 웃었다.
본의 아니게 자꾸 픽픽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줘서 좀 그렇긴 한데, 윈터는 무려 무투 대회의 준결승까지 올라간 실력자였다.
그리고 윈터의 방대한 마력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다른 누구보다 데보라가 잘 알았다.
직접 목격하고, 겪어봤으니까.
“하긴, 그건 그렇네요.”
결국 데보라가 머쓱한 얼굴로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금방 다녀올게. 얼마 안 걸릴 거야.”
그런 그녀의 걱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윈터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데보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싱긋 미소 지은 윈터가 곧 후작가 저택을 나섰다.
아까부터 창밖으로 보이던 라벤더 정원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겸사겸사 갑갑한 속도 비우고.
“으음, 좋다.”
달빛이 가득한 정원을 구경하며 윈터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청명한 밤바람을 타고 물에 젖은 라벤더 향이 물씬 풍겼다.
마치 얇은 연보라색 이불을 덮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한복판에서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생각했다.
황궁에서 나와 마차를 타는 동안 그답지 않게 조금 들떠 있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아가씨, 보고 싶었어요.’
그래, 그렇게 말했지.
“후후.”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편지에서는 잘 지내고 있다며 짤막하고 무뚝뚝한 인사만 보내더니, 얼굴을 보자마자 어쩜 곧바로 그런 말이 나오는지.
원작의 메이딜리언을 알고 있다면 더욱 놀라울 만한 말이었다.
곧 윈터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오늘따라 제 나약한 몸뚱이가 왜 이렇게 원망스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메이딜리언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는데,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고 방해만 하는 것 같았다.
“어쩜 맘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작게 중얼거린 윈터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차마 데보라가 있는 앞에서 이런 못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서, 그녀는 일부러 바깥으로 나왔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윈터가 조금 흐트러진 숄을 다시 여미며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밤 풍경을 음미하던 그녀의 표정이 낮게 가라앉았다.
아까와 달리 바람이 스산했다.
누군가,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처음엔 혹시 데보라인가 싶었지만 발소리가 한참은 더 묵직했다.
그래서 메이딜리언인가 했지만 곧 그럴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메이딜리언이었다면 제 몸이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었으니까.
작게 심호흡을 한 윈터는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상대는 점점 그녀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오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윈터의 손에서 짧은 얼음 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한밤의 습격자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을 때, 윈터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려 상대의 숨통을 노렸다.
“……이런.”
흠칫 놀란 상대가 황급히 윈터의 손목을 잡아챘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체온에 윈터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선선히 나온 사과에 작게 혀를 찬 윈터가 얼음 창을 없애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상대 또한 잡았던 윈터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누군데 내 뒤를 쫓은 거지?”
윈터의 물음에 남자가 제 턱을 긁적였다.
마침 바람이 불며,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은발이 반짝였다.
얼음 호수처럼 새파란 눈동자.
어딘지 모르게 금욕적이고 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중년의 미남을 마주한 윈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묘하게 인상이 익숙했다.
아주 잘 아는 누군가를 닮은 듯한데.
“내 저택에 온 손님이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동무나 해주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아?”
윈터는 조금 늦게 남자의 말을 이해했다.
자신의 저택이라니.
에른스트 후작가를 당당하게 제 저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후, 후작님?”
“반갑습니다, 블라디미르 소공작.”
싱그럽게 미소 짓는 얼굴을 보며 윈터는 기절할 뻔했다.
인상이 익숙한 거야 당연했다.
에른스트 후작은 다른 누구도 아닌 메이딜리언의 큰아버지였으니까.
“몰라뵀습니다. 죄송합니다!”
상황 파악을 끝낸 윈터가 얼른 사과부터 전했다.
초면에 대뜸 목부터 따려 들었던 그녀를 보며 에른스트 후작은 그저 사람 좋게 웃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하하.”
아니, 그렇다기엔 당신 목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는데요.
윈터는 차마 다 말하지 못하고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