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너, 뭐야.’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궁금하던 메이딜리언을 실제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 리어트는 웃었다.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쓰러진 윈터를 부축하고 있던 그를 보며 메이딜리언은 본능적으로 리어트를 경계했다.
물론 그에게 유감이 많은 것은 리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금세 알게 되었다.
너무 화가 나고 분하면, 의도와 달리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구나.
‘당장 아가씨를 내려놔.’
그 말을 듣자마자 리어트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이미 윈터에게 붙인 이들을 통해 그녀가 마력 폭주를 일으켰고, 그 원인이 메이딜리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온다니.
윈터를 부축한 채 몸을 일으킨 리어트가 메이딜리언을 향해 빈정거렸다.
‘윈터를 통해서 말은 많이 들었는데, 듣던 대로 응석이 심하네.’
‘……뭐라고?’
와락 미간을 찌푸리는 얼굴은 척 봐도 어린 티가 났다.
그런 메이딜리언을 마주하는 리어트의 심정은 조금 절망적이었다.
윈터가 제 목숨을 걸어 가며 지키는 자가 조금쯤은 더 괜찮은 놈일 줄 알았는데.
이토록 앞뒤 분간 못 하고 날뛰는 놈이라니.
‘돌아가. 넌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그가 가까워질수록 간신히 가라앉았던 윈터의 마력도 요동쳤다.
저 애송이는 질투에 눈이 멀어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지금도 윈터를 부축한 리어트의 손을 노려보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헛소리.’
메이딜리언은 리어트의 경고를 가볍게 무시했다.
리어트의 생각대로, 그의 눈에는 지금 쓰러진 윈터와 그런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리어트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자에게 편안히 몸을 맡긴 채 쓰러진 윈터가 안타깝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안절부절못하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쯧쯧 혀를 찬 리어트가 한 번 더 경고했다.
‘얌전히 윈터가 바라는 대로 해.’
‘감히……!’
그 말에 메이딜리언의 눈에 불이 튀었다.
리어트의 모든 것이 메이딜리언의 심기를 거슬렀다.
윈터라는 제어장치가 없는 그는 금세 살기를 피워올리며 리어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런 메이딜리언을 멈칫하게 한 것은, 리어트의 목에 걸린 펜던트였다.
붉은 마석이 박혀 있는, 통신석으로 쓸 법한 목걸이.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금세 알아차린 리어트가 픽 웃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그거…….’
‘뭔지 궁금해?’
메이딜리언의 붉은 눈동자가 펜던트를 따라 이동했다.
리어트는 그 순간 속이 뒤틀렸다.
가끔 윈터는 늘 제 몸에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던 낡은 펜던트를 그리운 듯 살펴볼 때가 있었다.
펜던트에 얽힌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그는 그때마다 의아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눈동자가 펜던트와 꼭 닮은 색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리어트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펜던트를 쥐고 미소 짓는 얼굴은 얼핏 무척이나 의기양양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전에 윈터랑 나눈 거야.’
‘아가씨랑, 나눴다고?’
리어트의 말에 멈칫하던 메이딜리언이 중얼거렸다.
‘그래.’
리어트가 가볍게 긍정하자 메이딜리언의 붉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펜던트와 윈터, 그리고 리어트를 바라보던 메이딜리언에게서 어느덧 살기가 가셨다.
금방이라도 상대의 목을 물어뜯을 듯 으르렁거리던 기세는 어디로 간 건지, 주춤 뒤로 물러서는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충격으로 얼룩져 있었다.
‘……아가씨랑, 나눈 거라고.’
몇 번 의미 없이 중얼거리던 메이딜리언이 이내 말도 없이 그대로 돌아섰다.
마치 무리에서 내쫓긴 늑대처럼 꼬리를 말고 숲속으로 사라지는 메이딜리언의 뒷모습을 보며 리어트는 자조했다.
‘……우습군.’
메이딜리언이 상처를 받았다는 걸 코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마음에 흠집을 내느라 정신없던 주제에, 돌아보니 제 손에 더 상처가 가득한 듯한 모습이었다.
“으음…….”
윈터가 뒤척이는 소리에 리어트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 평온한 윈터의 얼굴을 차마 오래 마주할 수 없었다.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아아, 최악이네.”
같잖은 질투에 물들어서 어린애랑 실랑이를 하는 꼴이라니.
헛웃음을 짓던 리어트가 곧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이 꼭 흐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 * *
숲을 벗어나자마자 비가 내렸다.
무겁게 어깨를 때리는 빗줄기에도 메이딜리언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쉴 새 없이 말을 재촉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어딘지 멍했다.
이상하게 제대로 된 생각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축축한 빗소리와 함께 메이딜리언은 자꾸만 리어트와 함께 있던 윈터가 떠올랐다.
남들에게 약한 모습 보이는 걸 싫어하면서, 윈터는 리어트에게 편안하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리어트 또한 그런 윈터를 소중한 듯 감싸고 있었지.
‘아가씨, 지금 무슨 생각 해요?’
메이딜리언은 언젠가 윈터와 했던 대화도 기억해 냈다.
붉게 상기되어 있던 얼굴이, 그렇게 묻자 흠칫 놀라며 더듬더듬 낯선 이름을 꺼냈었다.
‘아, 리어트라고…….’
‘……리어트?’
‘응. 마누트라 섬에서 사귄 친구야.’
그렇게 말하며 윈터는 웃었다.
자신을 보며 늘 불안해하고, 걱정스러워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리어트를 생각하는 윈터는 더없이 뿌듯하고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해 줄게. 분명 너도 맘에 들 거야.’
윈터의 그런 얼굴을 보자마자 메이딜리언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리어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상대방을 만나게 된다고 해도 그가 제 맘에 들 리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실제로 마주한 리어트는 대번에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
윈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 주려는 듯 정염을 담고 있던 눈동자.
그의 품 안에서 윈터는 더없이 안락하고 평온해 보였다.
“……하.”
메이딜리언은 말의 고삐를 당장이라도 끊어낼 듯 세게 쥐었다.
그가 줄곧 원했던 것이 바로 그런 거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프지 않고, 슬프거나 불안하지도 않고, 그저 편안하고 행복하기만 한 윈터.
그게 제 손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 메이딜리언의 심장을 옥죄었다.
자신은 늘 윈터를 아프게 하고 다치게 하고, 힘들게만 하니까.
극심한 질투와 자괴감으로 메이딜리언이 몸서리쳤다.
“저어, 메이딜리언 님.”
지독한 상념을 끊어낸 것은 뜻밖에도 아디엘이었다.
어느새 바짝 메이딜리언의 뒤를 쫓아온 그녀의 얼굴에는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살수들을 모조리 상대하고도 지친 기색 하나 없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그녀는 조금 들떠 있는 상태였다.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우승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이렇게나 위력적인 실력을 갖추고 계셨을 줄이야……!”
메이딜리언을 따라 쉬지도 못하고 말을 달린 탓에 잔뜩 지쳐 있기는 했으나, 아디엘의 목소리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생생했다.
사실 처음엔 그녀도 이 황자인지 아닌지도 모를 인간을 모시고 베르무트까지 가야 한다는 사실이 영 탐탁지 않았다.
황궁에서도 제일 세력이 약한 4기사단에서 지내면서 아무리 단장이라지만 가끔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힘들거나 억울하고 이리저리 치이는 일이 많았던 그녀였다.
이번에도 아무도 가지 않는 데다, 섭정 황제가 대놓고 눈치까지 주는 친자 검사 동행으로 제가 뽑히고 나니 이제 4기사단은 완전히 버리는 패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런데 살수들을 순식간에 썰어 버리는 메이딜리언을 목격하고 나니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남들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아주 대단한 행운에 당첨된 거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불길하다고 생각했던 새빨간 눈동자도, 도저히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비현실적인 외모도 지금에 와서는 아주 비범한 상징처럼 느껴졌다.
특히 스치기만 해도 살수들을 무력화시키던 그 검은 마력은 또 어떻던가!
조금 두렵기는 해도, 아디엘은 제가 엉겁결에 잡게 된 행운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메이딜리언이 짧게 대답했다.
곧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부디 내가 그 대단한 실력으로 경을 죽이지 않게 해 줘.”
“……네, 네?”
워낙 나긋나긋한 목소리라 아디엘은 처음엔 메이딜리언이 한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당황해서 되묻는 아디엘을 가만히 보던 메이딜리언이 옅은 한숨과 함께 재차 말했다.
“조용히 가고 싶다는 뜻이야.”
원래 성질 같았으면 진작 썰어 버리고도 남았겠으나, 황실 기사를 멋대로 죽이면 상황이 곤란해진다.
메이딜리언 자신이 아니라, 윈터가.
이미 자신 때문에 일정이 어그러졌다며 걱정하고 있던 윈터였다.
그런 그녀에게 또 다른 속 시끄러운 일을 던져 줄 수는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자신이 방금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것도 모른 채 아디엘이 절도 있게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황실 기사단들이 맹렬히 달렸다.
밤새 달린 그들은 마침내 베르무트에 입성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둑한 새벽, 신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던 신관들은 뜻밖의 손님을 먼저 맞게 되었다.
“소속과 이름을 밝혀 주십시오.”
“나 아디엘 클러스터, 황실에서 증명을 위해 찾아왔소.”
얼굴을 반쯤 가린 신관이 아디엘의 말에 횃불로 뒤쪽의 일행들을 이리저리 살폈다.
곧 신관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더니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로브를 벗던 메이딜리언은 신전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신전에서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끝내 그 원인을 찾지 못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선 몸을 정결히 하셔야 합니다.”
고요한 신전 홀에 신관의 말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낯선 공간에,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은 채 메이딜리언이 대뜸 물었다.
“얼마나 걸리지?”
“최소 일주일은 기다리셔야 합니다.”
성마른 질문에도 신관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알겠다.”
작게 혀를 찬 메이딜리언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벌써 윈터가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