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 * *
일렁이는 촛불 그림자 아래로 작은 종이가 가늘게 떨렸다.
곧 사정없이 종이를 구긴 크비누스가 쾅, 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그의 맞은편에 서 있던 아르만 백작이 그 반동에 놀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실패라니! 어찌 사람 셋 죽이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해낸단 말이야!”
크비누스의 뺨이 분노로 파들파들 떨렸다.
아르만 백작은 슬쩍 바깥을 살폈다.
시종들을 모두 물리기는 했으나 그래도 궁에는 듣는 귀도, 보는 눈도 많았다.
이럴 때일수록 몸을 사려야 했다.
“무투 대회의 결승전까지 오른 실력자들 아닙니까. 실패할 가능성도 꽤 높았…….”
“닥쳐!”
아르만 백작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메이딜리언의 숨통을 못 끊어 놓은 것이 어지간히도 분통이 터진 모양이었다.
크비누스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의 폭언에 아르만 백작도 기분이 썩 좋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크비누스의 분노부터 잠재워야 했다.
굽실거리며 살살 저를 달래려 드는 아르만 백작을 말없이 응시하던 크비누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자네 아들이 좀 나서야겠네.”
“예……? 아스터가, 말입니까?”
난처한 듯 아르만 백작의 얼굴에 망설임이 어렸다.
이대로 가만히만 있어도 차기 황제가 될 줄 알았던 아스터의 앞길에 왜 이리도 장애물이 많은지.
느닷없이 나타난 메이딜리언도 이미 충분히 못마땅했는데, 이제는 크비누스까지 나서서 아스터를 장기 말 취급하고 있었다.
“그 간도 작은 녀석이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속내는 숨긴 채 아르만 백작이 슬쩍 발을 빼려 했다.
그러나 크비누스는 가볍게 후후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1황자가 할 일은 없어.”
“그게 무슨…….”
“불씨만 놔주면, 알아서 활활 잘 타오를 것이야.”
여전히 막연하기만 한 크비누스의 말에 결국 아르만 백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혜안을 제게도 조금 나눠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아, 별것도 아니야.”
그러나 크비누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 별것도 아닌 일에 굳이 1황자까지 나서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르만 백작이 답답해서 제 가슴을 퍽퍽 내리치기 직전이 되어서야 크비누스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미인계를 쓸 거라네.”
“……예?”
비죽 웃는 크비누스와 달리 아르만 백작의 안색은 해쓱해지고 말았다.
* * *
“크비누스가 아주 몸이 달았군.”
황궁에서 온 서신을 던지듯 내려 둔 블라디미르 공작이 짧게 평했다.
맞은편에 부복하고 있던 나일라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안 좋은 소식입니까?”
“아아, 글쎄.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안 좋다고 해야 하나.”
공작은 자신을 생각하기 전에 황궁에서 온 제안을 듣고 윈터가 지을 표정부터 떠올려 봤다.
보나 마나 아주 난처해하고 황당해하겠지.
딸의 얼굴을 상상하며 공작이 픽 웃었다.
“전부 쓸데없는 수작이라는 것도 모르고.”
감히 공작가의 후계를 넘보려 하다니.
어떻게 혼쭐을 내줄까 고민하던 공작은 곧 나일라에게 명했다.
“에른스트 후작령으로 기사들을 보내라.”
“아가씨를 모셔오시려는 겁니까?”
“그래. 최대한 빨리 데려와야 한다.”
“알겠습니다.”
턱을 괸 채 크비누스의 서신을 보던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과연 윈터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 * *
쓰러지고 이틀을 꼬박 넘기고 나서야 윈터는 의식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에른스트 후작에게 독대를 청했다.
몸이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벌써 움직여도 되는가?”
아침부터 불쑥 찾아온 윈터를 마주하며 에른스트 후작은 퍽 놀랍다는 듯 물었다.
“네, 그럼요. 이제 아주 쌩쌩한걸요.”
원래도 그 이상한 마도구만 아니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건데.
무투 대회 때부터 의도치 않게 마력을 혹사하는 바람에 심장에 탈이 나고 만 것 같았다.
윈터는 태연한 얼굴로 생긋 미소 지었다.
“메이딜리언이 불순 종자들은 즉결 처분했네.”
“그렇군요.”
이미 리어트를 통해서 전부 들었던 탓에, 윈터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메이딜리언의 성격을 안다면 아직까지 그 인간들이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살수들도 전부 사라졌다네.”
“……그랬군요.”
그것 또한 리어트를 통해서 이미 전해 들었다.
원래라면 그 즉시 체포해서 후작성에 구금한 뒤 배후를 캐내거나 황도로 돌아가 암살 사건을 공론화해야 하는데 일이 꼬였다.
메이딜리언은 다른 추격이나 암살 시도를 대비해 최대한 빨리 베르무트로 향했어야 했고, 윈터나 후작 쪽은 부상자와 사상자가 꽤 있어서 전열을 가다듬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하필 윈터도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데다 리어트도 신분이 불분명한 외부인이나 다름없으니 상황을 정리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고 갔지만 윈터는 짤막하게 평했다.
암살 사건을 공론화하기엔 마도구를 가지고 있던 수상한 이들은 메이딜리언이 즉결 처분해 버렸고, 그 사실을 알리기엔 시기가 좋지 않았다.
다른 누구에게도 아닌 오직 윈터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마도구라니.
그 사실이 알려지면 윈터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도 알려지게 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일만은 가능한 한 일어나지 않아야 했다.
“소공작은 이만 황도로 돌아가시게.”
“네?”
자꾸만 머리가 복잡해져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윈터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말을 꺼낸 에른스트 후작은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쓰러진 사이에 이미 준비해 두었던 말인 듯했다.
“메이딜리언은 어차피 황자로 밝혀질 것이고, 보호 마법까지 새기고 나면 크비누스가 더 할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네.”
“그건, 그렇죠.”
크비누스가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메이딜리언이 베르무트로 들어가는 걸 막은 이유가 바로 보호 마법 때문이었다.
아스터도 그 마법 덕분에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황자로 밝혀지기 전에 해치워 버리려고 마지막까지 발악한 것이겠지.
“그리고 공작가에서 어젯밤 급한 연락이 왔소.”
“연락이요?”
윈터의 물음에 짧게 고개를 끄덕인 에른스트 후작이 전보를 내밀었다.
[윈터, 공작가로 속히 귀환 요망.]
그 흔한 안부 인사나 사유도 하나 없이 속히 귀환하라니.
윈터는 전보를 읽자마자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이러는 거지?
“동행은 내가 소공작을 대신할 테니 오후쯤 공작가에서 파견한 기사들이 오면 함께 돌아가시게. 섭정께도 내가 따로 연락을 넣겠네.”
처음엔 꽤 친근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거리를 두는 것 같은 에른스트 후작이 윈터는 영 의아하기만 했다.
대답 대신 윈터가 후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후작이 갑자기 안절부절못하고 시선을 피하다 헛기침을 하며 부산스럽게 굴었다.
끝내 윈터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그가 한숨처럼 말했다.
“그리고 정말 미안하네.”
“……네?”
예상치 못한 말에 이번엔 윈터가 당황했다.
“아니, 후작님께서 갑자기 왜 제게 사과를…….”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가 이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게 후작님 탓도 아닌데요.”
“내 탓도 조금쯤 있는 것 같네.”
“후작님께서요?”
“그래.”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작이 또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룬 사람처럼 그의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팠던 사람이 윈터가 아닌 후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고민이 깊은 것 같은 후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윈터가 슬쩍 물었다.
“고민이 깊어 보이시는데, 제가 아픈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그게…….”
입술을 달싹이던 후작이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제 이마를 부여잡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침내 그가 고백했다.
“아무래도 후작가에 쥐새끼가 있는 것 같네.”
“아아.”
이상한 것은 윈터의 반응이었다.
놀라기는커녕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그 모습을 본 에른스트 후작이 의아해하는 순간, 윈터가 그의 앞으로 작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부디 각하께서 불편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단정히 접힌 쪽지를 받아든 후작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윈터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싱긋 웃었다.
후작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윈터가 내민 쪽지를 펼쳐 보았다.
“이게 뭐…….”
안을 열어 본 후작의 눈이 커졌다.
쪽지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얼마 전 후작의 심복이 그에게 가져다준 첩자들의 목록과도 정확히 일치했다.
심지어 몇 명 더 추가가 되어 있기까지 했다.
“이걸, 이걸 자네가 대체 어떻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을 잇던 후작은 이내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오늘 그가 어떤 이야기를 꺼낼 줄 알고 이걸 준비해 왔던 걸까.
이내 아연실색했던 후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요긴하게 쓰겠네.”
하지만 선뜻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윈터가 이 목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녀의 끄나풀도 여기에 있다는 뜻이니까.
심지어 후작은 윈터가 스스로 그 사실을 드러내기 전까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새삼스레 윈터를 살폈다.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후계자. 메이딜리언의 마음을 쥐고 있는 인물.
후작은 윈터를 마냥 연약하고 가련한 아가씨라고 생각하며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천진한 외양으로 모두를 속이고 있지만, 윈터의 머릿속에는 이미 에른스트 후작가의 포크 숫자까지 속속들이 다 들어 있을지도 모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건 메이딜리언 님을 위해서만 쓰는걸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윈터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