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이번에도 직구로 날린 말이었다.
작게 혀를 찬 윈터가 덧붙였다.
“뻔히 눈에 보이는 수에 넘어가 줄 수는 없으니까요.”
그 말에 아스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늘 의뭉스럽게 대화하는 인간들 속에서 자란 그는, 이렇게까지 대놓고 제 생각을 언급하고 좋고 싫음을 표시하는 사람을 만난 게 난생처음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 약혼이 터무니없는 크비누스의 계략이라는 건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이전 무투 대회 때 대타로 나온 일이나, 베르무트 동행 때문에 안 그래도 윈터와 메이딜리언 사이에는 알음알음 염문설이 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의 형과 약혼이라니.
윈터를 이용해 둘을 갈라놓고 결국에는 동귀어진시키려는 생각인 게 훤했다.
물론 그 생각을 아스터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아스터는 윈터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과의 약혼을 거절하는 이유가 메이딜리언을 사랑하기 때문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는 속 시원히 물어보기로 했다. 윈터가 그랬던 것처럼.
“소공작.”
“네, 전하.”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얼마든지요.”
윈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조금 빠르게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던 아스터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속셈이 뭡니까?”
“푸흡, 켁.”
과연 뭘 물어보려나 기대하며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려던 윈터는 그대로 머금고 있던 차를 뿜고 말았다.
윈터가 사레가 들려 콜록대자 그녀보다 더 당황한 아스터가 벌떡 일어나서는 손수건을 내밀었다.
“미, 미안합니다. 많이 놀랐습니까?”
“아니요, 괜찮, 괜찮습니다. 크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낸 윈터는 머쓱한 얼굴로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아직도 코가 얼얼했다.
설마 아스터가 그런 걸 물을 줄은 몰랐다.
마냥 순진하고 해맑은 황자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속셈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줄이야.
아스터는 잔기침을 하는 윈터를 걱정스레 살피면서도 질문을 거두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윈터가 대답했다.
“……그 애가, 메이딜리언이 전부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것은 온전한 진심이었다.
메이딜리언 앞에서 말할 때도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아스터 앞에서 말하니 두 뺨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얼굴을 아스터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껏 과연 윈터의 속셈은 무엇일까, 그녀는 무엇을 계산하고 있는 것일까 고민하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알고 싶던 윈터의 속셈은 오히려 전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순수한 열망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스터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뜨거운 심장, 냉정한 머리. 권력과 지력을 모두 갖춘 윈터가 아스터는 탐이 났다.
그들 주위를 둘러싼 환경과 배경을 아예 배제하지는 못하겠지만, 그걸 다 떠나서도 아스터는 윈터와 지금보다는 조금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께는 죄송하지만 이 혼담은…….”
“딱 열흘만.”
윈터가 거절하려고 입을 여는 찰나, 아스터가 한발 더 빨랐다.
“딱 열흘만 나랑 같이 있어 봐요.”
“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아스터는 흐릿하게 웃었다.
심장이 기분 좋게 쿵쿵 울렸다.
“내가 아주 싫은 건 아니죠?”
“그, 렇죠……?”
“날 죽일 생각도 없잖아요, 그쵸?”
“당연하죠.”
“그럼 제게도 기회를 줘요.”
눈가를 찡긋한 아스터가 처음으로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당신의 선택이 달라질 수도 있잖아요?”
* * *
“그래서 어떻게 했어?”
윈터의 말을 잠자코 듣던 리어트가 벌떡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
황궁에서 공작가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칼리스타로 잠깐 샌 윈터였다.
크비누스가 아스터와의 혼담을 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비웃었던 리어트는 윈터의 심란한 표정을 보고는 제가 더 혼란스러워했다.
“그러자고 했어.”
“뭐?”
리어트는 결국 와락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지만, 간신히 1황자를 향한 욕지거리를 참아 낸 리어트가 야유했다.
“어휴, 이 바람둥이.”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윈터는 허허 웃었다.
“전에 메이도 그렇게 말했었는데, 이제 부정할 수가 없네.”
아스터는 늘 조금 주눅이 들어서 남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갑자기 그렇게 웃으며 저랑 놀아 달라고 하는데 쉽사리 거절의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어쩌면 모든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닐까.”
이미 소설로 읽고 있었기에 윈터는 아스터를 믿었다.
밝고 천진하고, 불운한 어린 시절을 딛고 일어선 선한 남자주인공.
그러나 그게 어디까지나 여자주인공인 칸나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걸 간과했었다.
“설마 거기서 그렇게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
“아무리 그래도 정말 약혼까지 할 건 아니지?”
“그럼, 당연하지.”
리어트가 혹시나 해 물었지만 윈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그녀는 일부러 아스터의 제안에 응했다.
어차피 다른 이유를 전부 떠나서 1황자와 공작가의 결합은 메이딜리언에게 치명적이었다.
쓸데없이 아스터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윈터와 아스터의 결합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왕 크비누스가 깔아 준 판을 윈터는 최대한 유용하게 써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스터가 열흘만 시간을 달라고 했을 때, 충격적이지만 동시에 아주 좋은 기회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안 그래도 염문설로 시끄러운데, 지옥의 삼각관계라는 낭설로 황도를 시끄럽게 하며 윈터와 아스터가 시선을 잔뜩 끌어가면 반대로 메이딜리언은 조금 더 수월하게 황궁에 입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아스터를 만난다는 핑계로 황궁에 드나들며 메이딜리언의 수족들을 그들 쪽 사람들로 적당히 채워 넣을 수도 있겠다는 계산이 두 번째였고.
“1황자가 의심은 안 해?”
윈터는 제 생각을 속속들이 리어트와 공유했다.
처음엔 미심쩍어하던 리어트도 끝내는 윈터의 생각에 동의하며 물었다.
“그런 사람은 아니야. 의심해도 어쩔 수 없고.”
“하긴, 그건 그렇지. 근데 1황자랑 전부터 알던 사이야?”
“아니. 그럴 리가. 왜?”
“되게 잘 아는 것처럼 말하길래.”
리어트의 물음에 윈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근데 지금은 모르겠어.”
원작대로 흘러가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조금씩 틀을 비껴가기 시작했고, 그녀가 알던 인물들은 종종 전혀 다른 쪽으로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상대의 저의를 의심하며 속셈이 뭐냐고 묻는 아스터라든가.
또, 원작의 여자주인공을 두고 애먼 데에 플래그를 꽂는 메이딜리언이라든가.
“……하아.”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떠올리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보니 어영부영 사건들을 거치며 본의 아니게 메이딜리언의 고백은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윈터는 알았다.
똑똑한 메이딜리언이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리라는 것을.
덕분에 날이 갈수록 윈터의 머릿속만 복잡해지고 있었다.
“리어트.”
“응?”
“난 애 키우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어.”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하는 말에 리어트는 코웃음을 쳤다.
윈터는 그 ‘애’라는 녀석이 감히 저를 잡아먹으려 드릉드릉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어디 쉬울 줄 알았어?”
“그러게나 말이야.”
잔뜩 늘어져서 웅얼거리는 윈터를 가만히 보던 리어트가 훅 고개를 숙였다.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윈터가 눈을 떴다.
아주 잠깐,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윈터의 금빛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리어트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고민, 내가 좀 해결해 줄까?”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유혹적으로 울렸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윈터가 되물었다.
“……내가 고민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 것 같아?”
“뭐, 하긴. 그렇네.”
픽 웃은 윈터가 리어트를 밀어냈다.
잠시 밀려 줄까 말까 고민하던 리어트가 이내 순순히 몸을 뒤로 물렸다.
“무슨 고민인 줄 알고 해결해 준대?”
“글쎄, 나야 모르지. 근데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어려울 때일수록 돕고 살아야지.”
평소처럼 가볍기 짝이 없는 말투로 대화를 이어나가며 리어트는 속으로 스스로를 열심히 비난하고 빈정댔다.
겉으로는 호인인 척하면서 뒤로는 제 잇속을 차리는 자신이 퍽 비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윈터가 고개를 끄덕이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그가 아는 윈터라면 결코 제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리어트는 잠시 쓸데없는 상상을 했다.
“그럴까?”
픽 웃은 윈터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러나 리어트는 이어지는 말을 기대하지 않았다.
“됐어. 안 그래도 정신없는 애한테 내가 무슨.”
이번에도 그의 사랑은 잔인하고 선량하게 그를 밀어냈다.
그를 가장 정신없게 하는 사람은 바로 윈터였는데도.
“너만 아니면 이렇게 바쁠 일도 없는데 말이지.”
리어트는 조금쯤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러자 윈터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알아. 너한텐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리어트를 바라보는 윈터의 눈빛은 더없이 다정했다.
그걸 알기에 리어트의 속은 늘 시끄러웠다.
드러내지도 못할 애정이 악마처럼 곁에서 속살거렸다.
차라리 고백해 버리라고. 그래서 끝내 이 모든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하라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리어트는 겁이 많았다.
윈터에 한해서는 늘. 모든 것을 두려워했다.
“이제 그만 가 봐. 또 들를 데도 있다며.”
복잡한 속내를 감춘 채 리어트가 윈터의 등을 떠밀었다.
“아아, 맞다. 오늘 제니마 상회도 가야 해.”
아침부터 쉴 틈 없이 바쁜 일정을 떠올리며 윈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내 옷매무새를 점검한 그녀가 리어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난 가 볼게.”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제 목에 걸린 연락용 마도구를 흔들며 리어트가 말했다.
그걸 보며 윈터가 킥킥 웃었다.
“넌 무슨 작동도 안 되는 걸 아직도 걸고 다녀?”
“……그러게.”
윈터가 처음으로 제게 줬던 거라서 아직도 하고 다니는 거지만, 정작 당사자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리어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난 간다.”
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윈터가 문을 열었다.
곧 굳게 문이 닫혔다.
표정 없이, 리어트가 주저앉았다.